한유(韓愈) 768~824
당(唐)나라를 대표하는 문장가(文章家)이며 정치가(政治家)인 그는
당송8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위대한 석학(碩學)이다.
중국(中國)과 우리나라를 비롯한 일본(日本)에
광범위한 영향을 끼치며
후대(後代) 성리학(性理學)의 원조(元祖)로 불리는 사상가(思想家)이기도 하다.
당시 유학자(儒學者)들은 논어(論語)를 제외한
맹자(孟子), 중용(中庸), 대학(大學), 주역(周易) 등을 소홀히 다뤘으나
한유(韓愈)는 문장(文章)과 시(詩)에서
위의 서적들을 많이 인용 하였다.
따라서 한유(韓愈)을 통해서
사서(四書)라 불리는 유학서(儒學書)들이
일반인들에게 광범위하게 퍼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어려서 일찍 부모를 여의고
고아(孤兒)로 자랐다고 알려진다.
처음 과거(科擧)에 응시했을 때는
인습(因習)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문체(文體)를 구사하여
보수적(保守的)이던 채점관(採點官)에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해 낙방했다.
그후 25세에 진사시(進士試)에 응시(應試)하여 급제(及第) 한다.
한유(韓愈)는 일찍부터 유교(儒敎)를 받아들이고 믿었으며
봉건적(封建的)인 윤리(倫理)와 사회질서(社會秩序)를 중시했다.
따라서 불교(佛敎)와 도교(道敎)를 배척하여
황제(皇帝) 앞에서까지 불교(佛敎)를 맹렬히 비판했던
관리(官理)로도 유명하다.
독실한 불교신자(佛敎信者)이기도 했던
당(唐) 헌종(憲宗) 황제(皇帝)는
당시 30년에 한 번 열리는
봉상(鳳翔) 행사를 주관하여 법문사(法門寺)의 불사리(佛舍利)를
장안(長安)의 황궁(皇宮)으로 들여 친히 친견(親見)및 공양(供養)을 하자,
이에 한유(韓愈)가
"불골을 논하는 표(諫迎佛骨表)"를 헌종(憲宗)에게 올려
과거 양(梁)나라 무제(武帝) 때의 고사(故事)까지 언급 해가며
"부처는 믿을 것이 못 된다(佛不足信)"고
여러차레 간언(諫言)을 하였다.
이에 헌종(憲宗)이 대노(大怒)하여
"저자를 당장 끌고가 처형(處刑)하라"고 엄명(嚴命)을 내렸으나,
재상(宰相) 배도(裴度)와 최군(崔群)의 충정(忠情)어린 간언(諫言)으로
사형(死刑)을 겨우 면하게 된다.
대신 조주자사(潮州刺史)로 좌천(左遷)되었다.
조주(潮州)는 지금의 광동 성(廣東省) 광주(廣州)로 알려진다.
이듬해 헌종(憲宗)이 죽고
유교(儒敎)를 숭상(崇尙)하는 목종(穆宗)이 즉위하자,
다시 중앙으로 소환되어
국자제주(國子祭酒) 즉 요즘으로 치자면 대학(大學) 학장(學長)에 임명되었다.
그 뒤 병부시랑(兵部侍郞)과 이부시랑(吏部侍郞)
그리고 어사대부(御史大夫)등의 높은 관직(官職)을 두루 역임하다
향년(享年) 57세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死後)에 예부상서(禮部尙書)로 추증(追贈)되었고
문공(文公)이라는 높은 시호(諡號)를 제수받았다.
한유(韓愈)는 시(詩)와 문장(文章)을 여럿 남겼는데,
새롭고 기이한 어구(語句)를 많이 인용하여
난해한 시풍(詩風)이 특징이다.
평이하면서 통속적(通俗的)인 시풍(詩風)을 특징으로 하던 백거이(白居易)에 맞서
중당(中唐) 시단(詩壇)의 한 흐름을 형성했다.
맹교(孟郊), 장적(張籍), 이하(李賀), 왕건(王建), 가도(賈島) 등이
한유(韓愈) 문하생(門下生)들로
당(唐)나라의 시문학(詩文學) 발전에
큰 업적(業績)을 남긴 제자들이 많았다.
풍부한 학식(學識)과 해박한 지식(知識)을 겸비한
한유(韓愈)는
유종원(柳宗元)과 더불어
당(唐)나라을 대표하는 사상가(思想家)이기도 하며,
당(唐), 송(宋)을 통털어
여덜 명의 고학자(故學者)에 이름을 올린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명으로도 이름을 드날렸다.
送桂州嚴大夫(송계주엄대부): 계림으로 엄대부를 보내며
蒼蒼森八桂(창창삼팔계): 푸르른 숲 울창한 팔계(八桂)
玆地在湘南(자지재상남): 여기는 상수(湘水) 남쪽에 있다네.
水作靑羅帶(수작청라대): 강은 푸른 비단 띠 같고
山如碧玉簪(산여벽옥잠): 산은 푸르른 벽옥 같구나.
戶多輸翠羽(호다수취우): 많은 집들은 물총새 깃털처럼 덮였고
家自種黃甘(가자종황감): 집집마다 누런 감귤나무 있네.
遠勝登仙去(원승등선거): 신선이 되어 오르는 것 보다 낫기에
飛鸞不假驂(비란불가참): 나는 새 타고 날아갈 필요도 없겠구나.
팔계(八桂): 광시 성(廣西省)에 있는
산수경치(山水景致)가 수려한 관광지를 말한다.
상수(湘水)는: 상강(湘江)을 말하는데,
오늘날의 허난 성(河南省) 장사시(長沙市)를 가로질러
동정호(洞庭湖)로 들어가는 강(江) 이름이다.
계림(桂林)의 이강(漓江) 산수경치(山水景致)를 읊은 이 시(詩)는
많은 이들이 즐겨 읽었고
산수화(山水畵)의 소재로도 유명한 시(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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