自題金山畵像(자제금산화상): 금산에서 자화상에 스스로 적다.
心似已灰之木(심사이회지목): 마음은 이미 재가 된 나무토막이요
身如不繫之舟(신여불계지주): 몸은 매어놓지 않은 배라네.
問汝平生功業(문여평생공업): 평생의 공적(功勣)이 무엇인가 물으면
黃州惠州儋州(황주혜주담주): 황주(黃州), 혜주(惠州), 담주(儋州)라 답하리.
소동파(蘇東坡)는
후저우(湖州) 즉 호주의 지사(知事)로 근무 중이던
서기 1079년에
조정(朝廷)의 정치(政治)를 비방하는 내용의 시(詩)를 썼다는 죄목으로
어사대(御史臺)에 체포되었고,
당시 송(宋)나라의 수도인 카이펑(開封) 즉 개봉으로 끌려가
뼈저린 고초(苦楚)를 겪었다.
이것이 이른바
소동파(蘇東坡)의 "필화사건(筆禍事件)"이다.
이 사건으로 그는 좌천(左遷)되어
황주(黃州), 혜주(惠州), 담주(儋州) 등지를 옴겨다니며
오랜세월 지방관(地方官)으로 떠돌았다.
그리고 조정(朝廷)에서 그에게 내린 벌로,
"정치(政治)에는 일체 관여하지 못하며 근무지를 떠나서도 안 된다"는
거주(居住) 이동(移動)의 자유(自由)까지 박탈하였다.
이것은 일종의 유배형(流配刑)에 해당되는
큰 형벌(刑罰)이었다.
세월이 흘러 소식(蘇軾)의 나이 65세가 되던 해
철종(哲宗)이 죽고,
휘종(徽宗)이 즉위하면서
오랜 유배에서 풀려나 사면(赦免)을 받게 된다.
그가 사면을 받은 때는
중국 남쪽의 배트남 근처 섬인 담주(儋州) 즉 오늘날의 하이난도(海南島)에 유배되었을 때였다.
유배(流配)에서 풀려나 고향을 향해 올라오면서
금산(金山)을 지나다가,
화가(畵家) 이용면(李龍眠)이
지난날 그려준 자신(自身)의 초상화(肖像画)에
지금 소개하는 이 시(詩)를 써 넣었다고 전한다.
그 후 소식(蘇軾)은 상주(常州)로 갔는데
때마침 한창 우기(雨期)인 장마철이었다.
습한 기후를 견디지 못하고 노쇄한 몸에 설사병(泄瀉病)이 걸려,
달포 가량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뜨고 말았다.
유배에서 풀려난지 1년만인 66세였다.
소동파(蘇東坡)에 대한 삶의 흔적은
본 블로그에 그의 명작(名作) "적벽부(赤壁賦)"를 소개하면서
간략하게 들여다 봤기에 여기서는 생략한다.
본 시(詩)는 오랜 귀양살이에 지치고,
만년(晩年)을 떠돌며 유배(流配)로 보낸 삶의 회한(悔恨)과
울분이 함께 녹아있어
읽는 이로 하여금 숙연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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