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唐)나라 순종(順宗) 때,
황제(皇帝)를 감싸고 아첨(阿諂)으로 눈을 흐려놓고 권력(權力)을 휘두르며
폭정(暴政)을 일삼던 환관(宦官)들에게
반기(反旗)를 들고 개혁(改革)을 외치며 일어나
환관(宦官)들을 누르고 개혁(改革)을 시행하는 듯 했으나,
결국 그들의 세(勢)에 밀려 실패하고 만다.
주동자(主動者)인 왕숙문(王叔文)은 살해(殺害)당하고,
뜻을 같이 했던 유종원(柳宗元)을 비롯해
유우석(劉禹錫), 한태(韓泰), 한엽(韓曄),
진간(陳諫), 능준(凌准),
정이(程異), 위의집(韋執誼) 등은 간신히 죽음을 면했으나,
벼슬이 강등(降等) 되어
모두가 사마(司馬)라는 직책(職責)을 받고 황궁(皇宮)에서 쫏겨나 머나먼
오지(奧地)로 유뱃길을 떠났다.
이때 쫏겨난 여덜 명을 이름하여
"팔사마(八司馬)"라 칭하는데,
유종원(柳宗元)은 장안(長安)에서
먼 남쪽의 후난성(湖南省) 영주(永州)땅으로 유배(流配) 된다.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중 한명으로 불리는
석학(碩學) 유종원(柳宗元)은
융저우(永州)에 머물며
정치적(政治的) 좌절(挫折)에 대한 울분을 조금씩 삭혀갔다.
차츰 그곳의 아름다운 자연(自然)에 심취하며
마음에 안정(安定)을 찾아간 그는
생애 최고의 문학적(文學的)
역작(力作)이라고할 "영주팔기(永州八記)"를 남긴다.
영주팔기(永州八記)는 영주지방(永州地方)을 유람하며
수려한 자연(自然) 풍광(風光)의 아름다움을 글로 표현한 기행문(紀行文)이다.
그는 얼마후 광시좡족자치구(廣西壯族自治區)의 류저우(柳州)로
유배지(流配地)를 옮겨간다.
수려(秀麗)한 자연경관(自然景觀)에 마음이 안정된 탓인지
그는 번뜩이는 천재성(天才性)을 발휘하며
유주(柳州)의 백성들을 정성으로 보살피고
그들의 숙원(宿願)들을 하나 하나 해결해 나갔다.
그리하여 유주(柳州) 백성들로부터 큰 존경(尊敬)을 받는다.
유종원(柳宗元)은 유주(柳州)에서 지방관(地方官)으로
4년 째 되던 해 습한 기후로 생긴 풍토병(風土病)을 이겨내지 못하고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이 때가 그의 나이 47세였다.
짧은 생이지만 그의 업적(業績)은 실로 컷기에
훗날 유주(柳州) 백성들은 그를 깊이 존경하며
그의 업적(業績)을 기려 사당(祠堂)을 세워주웠다.
이름하여 "류허우츠(柳侯祠) 즉 유후사"가 그곳으로
지금까지도 사당(祠堂)이 남아있다.
류저우(柳州) 백성들에겐 훌륭한 관리(官理)였지만
그의 가슴 한켠에는
억울하게 유배(流配)된 울분과 이루지 못한 정치적(政治的) 야망(野望)이
아픈 현실로 남아 때때로 가슴을 짓눌렀다.
이때 지은 "강설(江雪)"을 비롯한 여러 편의 명작(名作) 중에,
고향(故鄕)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히 배어든 시(詩) 한 편을 소개하고자 한다.
향수(鄕愁)가 짙게 흐르는 그의 시(詩)는
오늘날까지도 읽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과 함께 깊은 감동(感動)을 주고 있다.
與浩初上人同看山寄京華親故(여호초상인동간산기경화친고):
호초 스님과 함께 산을 바라보다가 장안의 친구에게 시를 부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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若爲化作身千億(약위화득신천억): 만약에 이 몸이 천억 개로 변할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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