垓下歌(해하가): 해하에서 부르는 노래.
力拔山兮氣蓋世(역발산혜기개세): 힘은 산을 뽑을 만하고 기운은 세상을 덮을 만한데,
時不利兮騶不逝(시불이혜추구서): 때가 이롭지 못하여 오추마(烏騅馬)도 나아가지 않는구나.
騶不逝兮可奈何(추불서혜가나하): 오추마(烏騅馬)가 나아가지 않으니 어찌해야 좋은가~
虞兮憂兮奈若何(우혜우혜나약하): 우희(虞姬)야~ 우희(虞姬)야~ 그대를 어찌한단 말이냐~?.
역사상(歷史上) 천하(天下)에서 가장 힘이 센 사람으로 항우(項羽)를 꼽는다.
"힘이 항우(項羽) 같다"는 말을 종종하는데,
힘은 산봉우리를 송두리째 뽑아 버리고
기개(氣槪)는 온 세상을 덮을만하다고 그는 스스로를 노래했다.
항우(項羽)의 힘과 기상(氣像)이 이토록 크건만,
전쟁터에서 분신(分身)으로 자신을 태우고 적진(敵陣)을 종횡무진(縱橫無盡) 누비던
애마(愛馬)인 오추마(烏騅馬)마저 지쳐버려
더 이상 싸우려 들지 않으니 그도 별 도리가 없다.
이 절망적(絶望的) 상황에서
수많은 전쟁터를 동행(同行)하며 고락(苦樂)을 함께한
사랑하는 연인(戀人) "우희(虞姬)" 그대를 어찌하면 좋단말이냐며 울부짖는다.
항우(項羽)는 어린시절
막내 숙부(叔父) 항량(項梁)에게서 교육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항량(項梁)의 부친(父親) 즉 항우(項羽)의 조부(祖父)가 항연(項燕)인데,
그는 초(楚)나라의 유명한 장군(將軍)이었다.
항연(項燕)은 전쟁터에서
진(秦)나라 장수(將帥) 왕전(王翦)에게 죽임을 당했다.
항우(項羽)의 집안은 대대로 초(楚)나라 장수(將帥)의 집안으로
"항(項)"지방 즉 요즘의 "하남성(河南省)" 지방을
봉읍(封邑)으로 받았기 때문에 항씨(項氏)로 성(姓)을 삼았다.
항우(項羽)는 어려서부터 공부하기를 싫어하여
검술(劍術)을 익혔으나 그 마져도 신통치 않았다.
이에 숙부(叔父) 항량(項梁)이 나무라자
"글이란 자기 이름자만 쓰는 정도면 되고
칼은 한 사람을 대적할 정도면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 만인(萬人)을 대적할 수 있는 법(法)을 가르쳐 주십시오" 라며 졸랐다.
이때부터 항량(項梁)은 항우(項羽)에게 병법(兵法)을 가르쳤다.
이에 항우(項羽)는 매우 기뻐하였으나
조금 알았다 싶으면 더이상 배우려 들지 않았다.
바로 여기서 유래된 말이
"서족이기성명(書足以記姓名): 글이란 제 이름만 써도 족하다"는
변명 같은 말이 생겨났다고 역사서(歷史書)는 적고 있다.
항우(項羽)는 24세 때 고향 강동(江東)에서
8천 명의 군사(軍士)를 거느리고 진(秦)나라를 치러 나아가니,
그의 명성(名聲)에 자원(自願)하여 차츰 불어나기 시작한 군사(軍士)가 30만 명까지 늘어났다.
마침내 진(秦)나라를 멸하고
스스로를 "초패왕(楚覇王)"이라 칭하며
자신을 따르던 장수(將帥) 18명에게 땅을 나누어 주는 등
패업(覇業)을 이루는 듯 했으나,
자신의 힘과 기개만 믿고 부하들의 충고(忠告)를 무시하며
고집만 피우다 점차 궁지에 몰려 결국
유방(劉邦)과 천하(天下)를 양분(兩分)하기로 합의한다.
이 때가 BC 그러니까 기원전 203년이라고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는 적고 있다.
그러나 1년 후인 BC 202년 한왕 유방(劉邦)이 30만의 제후병(諸侯兵)을 이끌고
항우(項羽)를 유인하며 공격을 가해온다.
군대를 세 갈래로 나누어 해하(垓下)에서 항우(項羽)를 포위해 버렸다.
이 작전에서 장군(將軍) 한신(韓信)은
겹겹으로 항우(項羽)를 둘러싸고 책사(策士) 장량(張良)은 병사들로 하여금
사방(四方)에서 초(楚)나라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항우(項羽)의 군사들은 한밤중에 들려오는
고향(故鄕)에서 들었던 낮익은 노랫소리에
그만 눈물을 흘리며 전의(戰意)를 잃고 와르르 무너져 한군(漢軍)에 투항(投降)하고 만다.
바로 여기서 나온 유명한 고사(古事)가
"사면초가(四面楚歌)"이다.
항우(項羽)는 장막(帳幕) 안에서
군사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한군(漢軍)에 항복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지금 소개하는 "해하가(垓下歌)"를 즉석에서 지어 노래로 불렀다.
이에 그의 연인(戀人) 우희(虞姬)도 시(詩)를 지어 노래로 화답하고
곧바로 자살(自殺)했다고 하는데...
覇王別姬(패왕별희): 항우와 우희.
漢兵己略地(한병기략지): 한나라 병사가 이미 초나라 땅을 차지했고
四面楚歌聲(사면초가성): 사면에서 들리는 것은 초나라 노랫소리.
大王義氣盡(대왕의기진): 대왕의 의기가 다 했으니
賤妾何聊生(천첩하료생): 천첩이 어찌 살리오.
이 시(詩)를 지어 노래로 부르며 우미인(虞美人)이 자살하자,
항우(項羽)는 우희(虞姬)를 가매장 해놓고 포위망(包圍網)을 뚫고 달아난다.
일설(一說)에는 도망가면서 항우(項羽)가 우희(虞姬)의 머리를 잘라
말에 매달고 갔다는 설(說)도 있으나,
우희(虞姬)의 묘(墓)가 있는 위치상으로 볼 때
신빙성(信憑性)이 많이 떨어진다.
지금의 안후이성(安徽省) 영벽현(靈壁縣)에서 7km정도 떨어진 벌판에는
우희(虞姬)의 묘(墓)가 있다.
해하(垓下)에서 수십 겹의 포위망(包圍網)을 뚫고
항우(項羽)가 달아나면서
겨우 살아남은 8백 명의 군사(軍士)를 이끌고 도망을 쳤는데,
이를 뒤쫓는 유방(劉邦)의 군사(軍士)는 5천의 기마병(騎馬兵)이었다.
항우(項羽)는 도망치면서 회수(淮水)를 건넜다.
이 때는 따르는 병사(兵士)가 1백명으로 줄었으며
음릉(陰陵)에 이르자 강동(江東)으로 가는 길을 잃어버렸다.
한 농부(農夫)에게 길을 물으니 농부(農夫)가 속여 다른 길을 알려주었다.
알려준 곳은 늪지대라 발이 푹푹 빠져 속도가 나지 않았다.
결국 유방(劉邦)의 군사들이 따라잡을 듯 가까워졌다.
간신히 탈출하여 차성(車城)이란 곳에 이르니
남은 병사(兵士)가 전부 합해 28명 뿐이었다.
또 다시 도망을 가
오강(烏江)에 이르자 따르는 병사가 한 명도 없었다.
정장(亭長)이란 사람이 배를 가리키며 항우(項羽)에게 말했다.
"강동(江東)이 좁다지만 사방 천 리에 인구 수도 수십 만입니다."
"빨리 저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
후일(後日)을 도모하십시오."
그러자 항우(項羽)는
"내가 강동(江東)을 떠날 때
8천의 군사(軍士)를 데리고 서쪽의 진(秦)나라로 진군했었는데,
이제 혼자 돌아가면 그들의 부형(父兄)들이 무어라 하겠소~?.
나를 다시 왕(王)으로 추대한다 해도
내가 어찌 그들을 대면(代面)할 수 있겠소이까~!.
나는 부끄러워 갈 수가 없소이다." 하고는
정장(亭長)이란 사람에게
자신이 타던 오추마(烏騅馬)를 건네주며
배에 싣고 가 잘 기르라고 부탁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남을 알고 항우(項羽)는
다가온 적군(敵軍)과 백병전(白兵戰)을 벌였다.
한(漢)나라 병사(兵士) 수백 명을 죽이고
자신도 여러 군데 상처를 입고 지쳐있었다.
이때 항우(項羽) 앞에 나타난 자가 여마동(呂馬童)이란 자인데,
그는 항우(項羽)와 죽마고우(竹馬故友)였으나 항우(項羽)를 배신하고
유방(劉邦)의 군사(軍士)에 합류하여
항우(項羽)의 목을 배러 나타난 자였다.
항우(項羽)는 여마동(呂馬童)을 보자,
"너는 내 오랜 친구가 아닌가~?" 하고 물으니
여마동(呂馬童)은 곁에 있던 한(漢)나라 장수(將帥) 왕예(王翳)에게
"이 자가 초왕(楚王) 항우(項羽)이다~"라고 소리쳤다.
이에 항우(項羽)가 말하기를
"한왕(漢王) 유방(劉邦)이
내 목에 천금(千金)의 상(賞)을 걸고 만호(萬戶)의 읍(邑)을 준다 하니,
내 너를 위하여 은덕(恩德)을 배풀리라~"하고는
스스로 목을 찔러 자살해버렸다.
이에 왕예(王翳가 항우(項羽)의 머리를 취하고,
이어 양희(楊喜), 여마동(呂馬童), 여승(呂勝),
그리고 또 다른 장수(將帥) 한 명이
사지(四肢)를 잘라 나누어 갖었다.
나머지 군사들은 항우(項羽)의 살점 하나라도 서로 차지하려고
자기들끼리 싸움이 붙어 수십 명이 죽었다.
이리하여 총 5명의 장수(將帥)들이
천금(千金)과 만호(萬戶)의 식읍(食邑)을 상(賞)으로 받았다 라고,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는
이 상황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항우(項羽)가 마지막으로 싸우다 숨진 곳이
오강(烏江)이란 그리 크지 않은 강변이다.
오강(烏江)은 오늘날의 안후이성(安徽省) 화현(和縣)의
오강진(烏江津)이란 곳이다.
이곳에 그의 묘(墓)을 세워 패왕묘(覇王墓)라 했고,
그 앞의 산에 세운 항우(項羽)의 사당(祠堂)이 패왕사(覇王祠)이다.
이 패왕사(覇王祠)에는
당(唐)나라 때 명필(名筆) 이양빙(李陽氷)이 쓴
"서초패왕영사(西楚覇王靈祠)"라는 편액(扁額)이 걸려 있다.
이 이양빙(李陽氷)이란 사람
어디서 한번 쯤 들어봄직한 이름이지 않은가~?.
바로 본 블로그에서
"이백(李白)의 생애(生涯)와 시풍(詩風)에 관한 소견(所見)"을 올릴 때,
이백(李白)이 숨을 거둔 곳이 그의 친척인 종숙(從叔)의 집이다.
바로 이백(李白)의 종숙(從叔) 즉 5촌 당숙(堂叔) 되는 이가
항우(項羽) 사당(祠堂)에 걸린 편액(扁額)을 쓴
이양빙(李陽氷)이란 문필가(文筆家) 겸 현령(縣令)이었다.
항우(項羽)와 우희(虞姬)의 사랑 이야기는
전쟁터에서 꽃 피운 러브 스토리(Love Story)의 고전(古典)으로,
경극(京劇)을 비롯한
여러 연극(演劇)과 가무극(歌舞劇)으로 만들어져
"패왕별희(覇王別姬)"란 이름으로
중국 전역에서 지금도 성황리에 공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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