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송(北宋)의 말로(末路).
그리고
눈물에 섞어 쏟아내는 시(詩) 한 수.
당(唐)나라가 멸망하고
조광윤(趙匡胤)이 세운 송(宋)나라는,
당나라의 화려한 문화와 문물을 이어받아 활짝 꽃을 피웠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런 송나라였지만
북송(北宋)은 나라를 창업한지 167년만에 멸망하고 맙니다.
대부분의 나라가 그러하듯 북송(北宋)도 예외없이
망국(亡國) 군주(君主)의 운명(運命)은 매우 비참했습니다.
송(宋) 휘종(徽宗)은 본명이 "조길(趙佶)"이며
북송(北宋) 제 8대 황제(皇帝)입니다.
그는 뛰어난 예술적 재능을 갖춘 군주로써,
특히, 그의 회화(繪畵)는 북송(北宋) 때 뿐만 아니라
중국 역사에서 역대 황제(皇帝)들 중 최고의 자질을 갖춘 인물로 평가 받습니다.
그러나 황제(皇帝)로서의 자질(姿質)은 형편없었습니다
특히, 채경(蔡京), 고구(高毬), 이언(李彦), 동관(童貫) 등...
고위 대신들은 무능한 황제(皇帝)를 등에 업고 사적(私的)인 이익(利益)만을 챙기는데
급급한 자들이었습니다.
황제(皇帝)는 황제대로 자신의 예술(藝術)을 살찌우기 위해서라면
국고를 아낌없이 지출했습니다.
거대한 조경석(造景石) 및 기화요초(琪花瑤草) 등을
먼 강남(江南)에서 개봉(開封)의 황궁까지 운반하는데 거액의 국고(國庫)를 물 쓰듯 써버립니다.
국고(國庫)가 금새 바닥나자 그는 텅빈 국고를 메우기 위해
완안석(王安石)이 주창한 신법(新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증세(增稅)에 박차를 가합니다.
이를 반대하던 구양수(歐陽脩), 사마광(司馬光) 등은 관직에서 쫏겨나고
소동파(蘇東坡) 등은,
결국 유배형(流配刑)을 받고 머나먼 강남(江南)으로 추방됩니다.
이와같은 혼탁한 상황에 민중반란(民衆叛亂)이 빈발하고,
조정(朝廷)은 이들을 진압하는데 정신이 없을 지경입니다.
이 혼란한 시기에서 힌트를 얻어 이야기를 부풀리고
협객들의 활략상을 기술한 책이 바로
시내암(施耐庵)이 작품을 쓰고
나관중(羅貫中)이 손을 본 "수호전(水滸傳)"입니다.
당시의 송(宋)나라 주변 상황을 살펴보면,
북쪽의 숙적이던 요(遼)나라는
중국 동북지방 만주에서 일어난 여진족(女眞族)의 위협을 늘 받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둘은 늘 다툼이 심했습니다.
여진족(女眞族)은 요(遼)의 착취에 대항해 부족이 단결하여
서기 1,115년 스스로 나라를 세우니 바로 "금(金)나라"입니다.
요(遼)나라가 껄그러운 송(宋)나라 조정은
금(金)나라와 화친(和親)을 맺고 공동으로 요(遼)를 공격합니다.
요(遼)를 멸망시키자마자
요(遼)가 차지하고 있던 땅 전 지역은 금(金)의 군대가 차지하고는 약탈을 일삼습니다.
그리고는 요나라 백성들을 자기들 마음대로 북방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등,
이득만을 챙기는 속내를 드러내며 자기들 마음대로 좌지우지하자,
송나라는 배신을 당한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런 금(金)에 대항하기 위해
송(宋)은 멸망한 요(遼)의 잔당들과
은밀히 손을 잡고 금(金)나라를 칠 것을 모의한 것이 발각됩니다.
결국 금(金)의 분노를 사게 되어,
서기 1,127년 금나라는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여 수도 개봉(開封)을 함락시키고,
송나라 조정을 압박하여 막대한 물자를 요구합니다.
그리고는 두 차례에 걸쳐
황제 흠종(欽宗), 상황 휘종(徽宗)을 비롯한 대신들과
황제의 친인척을 포함한 1,000여 명을 북쪽으로 연행해 갑니다.
역사는 이것을 "정강의 변(靖康之變)"이라고 부릅니다.
휘종(徽宗)은 금(金)나라가 처들어오자
조서를 내려 각지에 다급히 구원군을 요청합니다.
자신은 겁에 질려 스물다섯 살의 태자 조환(趙桓)에게 급히 황위(帝位)를 물려주니
그가 바로 "흠종(欽宗)"입니다.
그리고 휘종(徽宗)자신은
재상(宰相) 채경(蔡京)과 동관(童貫) 등의 호위를 받으며
양쯔강(長江) 남쪽 연안의 진강부(鎭江府)로 도망을 칩니다.
황궁(皇宮)을 접수한 금(金)나라 병사들은 새 황제 흠종(欽宗)에게,
황금(黃金) 500만 냥,
백금(白銀) 5,000만 냥, 소와 말(牛馬) 10,000두, 비단 100만 필을
강력히 요구하여 약속을 받아냅니다.
또한 태원(太元), 중산(中山), 하간(河間), 등
세 곳의 기름진 드넓은 옥토를 자신들에게 헌납할 것을 요구하여
이 또한 약속을 받은 후에야 북으로 철군합니다.
그러고 나서 불과 반 년 남짓 지나자,
금(金)나라 군사들이 동서(東西)두 갈래 길을 통해 개봉(開封)으로 또 쳐들어 옵니다.
흠종(欽宗)은 친히 금(金)나라 군사 진영으로 찾아가
항복을 요청하는 동시에 자신이 다스리는 송(宋)나라를
금(金)나라의 신하(臣下)나라임을 자청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죄를 고합니다.
그리고는 하남(河南), 하북(河北) 두 지역의 광활한 옥토마저 금(金)나라에 또 바칩니다.
금(金)나라 조정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금괴 1,000만 정(錠), 은괴 2,000만 정(錠),
비단 1,000만 필을 더 바치라고 요구하며 윽박지릅니다.
흠종(欽宗)은 금나라의 압박에 견뎌내지 못하고
궁중(宮中)의 황실 여인네들을 모두 금(金)나라에 노예로 넘기기로 합니다.
이중에는 자신의 딸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금(金)나라는 이것마저도 양에 차지 않았던지,
서기 1,127년 정월, 금(金)나라 군사들은 흠종(欽宗)을 폐위시키고
일반 서인(庶人)으로 강등시켜 구금합니다.
다음 달엔 상황(上皇)으로 물러나 있던 휘종(徽宗)도 구금합니다.
그리고는 그해 3월에 장방창(張邦昌)이란 자를 새 황제(皇帝)로 세우고는
송(宋)나라를 좌지우지 합니다.
그리하여 송나라 황궁의 창고는 텅텅 비었고,
북송(北宋)은 결국 창업한지 167년만에 멸망하고 맙니다.
금(金)나라는 이어 송(宋)나라의 휘종(徽宗)과 흠종(欽宗)을 비롯한
대신(大臣)들과 관리들을 포로로 압송합니다.
포로 중에는 소설 수호전(水滸傳)에 나오는 양산박 협객들의 난을 진압한
장숙야(張叔夜)와 송(宋)나라의 충신(忠臣) 악비(岳飛) 장군을 모함하여 죽게 만든,
매국노(賣國奴) 진회(秦檜)도 포함되었습니다.
북으로 끌려가는 포로들은
그해 5월 연산(燕山) 즉 지금의 북경(北京)에 도착합니다.
휘종(徽宗)은 때마침 시들어 떨어지는 살구꽃을 보고는
자신의 한심한 신세를 담은 시(詩) "연산정(燕山停)"을 짓습니다.
그는 이 사(詞)에서 비바람에 시든 살구꽃을 들어,
허리째 껶여버린 자신의 운명(運命)에 비유하면서 무한한 애수(哀愁)를 쏟아냅니다.
흠종(欽宗)도 압송되어 포로로 끌려가는 길에서
시시때때로 하늘을 우러러 통곡을 합니다.
그때마다 금나라 병사들은 크게 질책하며 제지하자,
흠종은 곡소리조차 마음대로 낼 수 없는 처량한 신세가 더더욱 한스럽습니다.
흠종(欽宗)과 송(宋)나라 관원들은 그해 7월 초에 연산(燕山)에 도착하였고,
휘종(徽宗)을 포함한 일행 및
다른 포로들도 모두 한자리에 모여 서로 만납니다.
그해 9월 중순 금(金)나라는
압송되어 온 송(宋)나라 두 황제(皇帝)를
중경(中京) 즉 지금 내몽고(內蒙古) 수성(宇城)에 있는 사대명성(四大明城)으로 옮깁니다.
황실(皇室)의 일가와 친척들 중 1,800여 명은 연산(燕山)에 남깁니다.
일가친척(一家親戚)들과 서로 헤어질 때는
마침 가을과 겨울이 맞물리는 철이었는데,
북녘의 찬바람이 시시때때로 불어오는 쌀쌀한 날씨에
서로 부등켜 안고 눈물을 쏟으며 아쉬운 이별을 합니다.
두 황제(皇帝)와 황실 가족 일부는 다시 길을 떠나
시월 중순경에 천리나 떨어진 중경(中京)에 도착합니다.
1년 후인 서기1,128년 3월, 두 황제(皇帝) 및 그 수행원들은
또다시 통새주(通塞州)란 곳으로 옮겨졌고,
금(金)나라 황실로부터 각각 1,500경 즉 여의도 면적의 12배에 달하는
광활한 벌판을 하사 받습니다.
이것은 스스로 개간하여 밭을 갈고 파종을 하는 등,
자급자족(自給自足)하라는 뜻이었습니다.
평생을 궁중에서 존귀한 몸으로
주지육림(酒池肉林)에 빠져 지내던 휘종(徽宗)과 흠종(欽宗)은
콩과 보리조차 분간 못할 정도였는데,
어찌 거친 농사를 해낼 수 있으랴~.
결국 땅바닥에 주저앉아 긴 탄식(歎息)을 토해내자,
지난 시절의 추억이 더더욱 그립고 통탄스러운지라 눈물이 또 비 오듯 쏟아집니다.
휘종(徽宗) 부자(父子)는 정치(政治)에는 어리석고 무능한 자였습니다.
서예(書藝)와 그림(畵) 등 예술에는 뛰어났고
시문(詩文)에도 대단히 조예(造詣)가 깊었습니다.
워낙 시(詩)를 잘 짓고 그림을 잘 그렸기에
풍류황제(風流皇帝)라 불렸던 휘종(徽宗)은 북받치는 비애(悲哀)를 누를 길 없는지라,
즉석에서 “안아미(眼兒媚)”라는 사패(詞牌)에 사(詞)를 붙여서
다음과 같이 눈물과 섞어 쏟아냅니다.
眼兒媚(안아미): 눈이 예쁜 아이
玉京曾憶舊繁華(옥경회억구번화): 구중궁궐 화려한 기억이 새로운데
萬里帝王家(만리제왕가): 제왕가는 만리나 멀어졌구나.
瓊樓玉殿,(경루옥전): 단청이 아롱진 전각들에서는
朝宣弦管(조선현관): 아침에는 삼현륙각 요란했고
暮列笙琶(모열생파): 저녁에는 생황과 비파소리 흥겨웠다네.
花城人去今蕭瑟蕭,(화성인거금슬소): 꽃 같던 도읍은 주인 없어 쓸쓸하고
春夢繞胡沙(춘몽요호사): 춘몽에 오랑캐땅의 모래바람만 감도네.
家山何在(가산하재): 고향산천은 어디메뇨?.
忍聽羌管,(안청강관): 오랑캐 피리소리 듣노라니
吹徹底梅花(취철저매화): 매화가 속절없이 지는구나.
이에 흠종(欽宗)은 눈물을 쏟으며
다음과 같이 화답(和答) 시(詩)를 지어 읊조립니다.
宸傳三百舊京華(신전삼백구경화): 왕업이 3백년 전해온 도읍이었고
仁孝自名家(안효백명가): 인과 효가 넘친 명문대가였소이다.
一旦奸邪(일단간사): 어느 아침 간사한 무리가 일어나
傾天折地(경천절지): 하늘과 땅이 뒤집어졌는데
忍聽琵琶(인청비파): 비파소리 듣고 계시다니요?.
如今在外多蕭瑟,(여금재외다소슬): 눈앞의 이 광경 소슬하기 그지없고
迤邐近胡沙(이리근호사): 오랑캐땅의 모래바람만 감돌 뿐입니다.
家邦萬里(가방만리): 집과 고국에서 만리나 떨어진
伶仃父子(령정부자): 외톨이 두 부자는
向曉霜花(향효상화): 새벽서리 맞은 꽃과 같사옵나이다.
유구한 역사를 돌이켜 보면...
“이긴 자는 왕(王)이요, 진 자는 역적(逆賊)”임은
무정(無情)한 세월과 함께 지나간 승자(勝者)의 논리(論理)일 뿐입니다.
결국 인간 역사는 “영원한 승자(勝者)도 패자(敗者)도 없고"
"흩어지면 모이고 모이면 또 흩어지며,
흥(興)하면 망(亡)하는 것"이...
자연(自然)의 섭리(攝理)이며 질서(秩序)임을,
북송(北宋)의 두 황제(皇帝)
휘종(徽宗)과 흠종(欽宗)의 말로(末路)에서 또다시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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