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산(廬山) 즉 여산은...
중국(中國)이 자랑하는 천하명산(天下名山)이다.
1996년에 세계문화유산(世界文化遺産)으로 등재 된 산이며
기이한 절벽과 시원스레 퍼붓는 폭포수 그리고 시시때때로 변화하는 운무(雲霧)는
찾는 이의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특히 봄철에는 복사꽃이 주변으로 만발하고
산기슭을 따라 선홍빛 두견화(杜鵑花)가 지천으로 피어나
황홀한 선경(仙境)을 연출한다.
여산(廬山)은
장강(長江) 기슭에 자리한 강주(江州)의 파양호(鄱陽湖) 호숫가를 따라 이어진 산맥이기에
일년 내내 강수량이 풍부하고 아열대성 수목(樹木)이 울창하여
옛부터 명사들이 찾아와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이토록 아름다운 명산에는 역사 깊은 사찰(寺刹)이 있는데,
동진(東晋) 말기의 전원시인(田園詩人) 도연명(陶淵明)과
북송(北宋) 때의 관리(管理) 겸 문인(文人)이며,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인
소동파(蘇東波)의 시(詩)에도 자주 등장하는 "서림사(西林寺)",
그리고 서림사(西林寺) 동쪽에 있다고 하여
이름 붙은 "동림사(東林寺)"가 여산(廬山)에서는 널리 알려진 사찰이다.
지금 소개하는 백거이(白居易)의 시(詩)에 등장하는 "대림사(大林寺)"도
위 사찰과 비슷한 시기에 창건하였으며
지금부터 대략 1,700년 전에 세워진 역사가 깊은 절집이다.
이들이 여산(廬山)의 3대 명찰(名刹)로 불린다.
백거이(白居易)는 서기 835년 그의 나이 63세 때
그동안 지은 시(詩)들을 간추려 엮은 "백씨문집(白氏文集)" 60권본을
이곳 동림사(東林寺)에 봉납할 정도로
여산(廬山)의 사찰들은 그와 인연이 깊다.
백거이(白居易) 외에도
여산(廬山)을 찾아와 시(詩)나 글을 남긴 문사들은 손에 꼽을 수 없이 많다.
소동파(蘇東波), 이백(李白), 왕안석(王安石),
황정견(黃庭堅), 육유(陸游), 도연명(陶淵明), 등은
대중에 널리 알려진 문사(文士)들이다.
이들 중 특히 도연명(陶淵明)은 이곳 여산(廬山)에 머물면서
그의 작품 중 최고의 명작으로 꼽히는 "귀거래사(歸去來辭)"와 "도화원기(桃花源記)"를
완성하기도 했다.
그리고 소동파(蘇東波)도
유배길에 이곳 여산(廬山)을 들렸다.
산세의 수려함이 오묘하고 웅장하여 한 눈에 다 볼 수 없음을 한탄한 시(詩)를
서림사(西林寺) 벽에 써놓고 떠났다.
"여산진면목(廬山眞面目)"이란 유명한 말이 이 시(詩)에서 유해한다.
이쯤에서 여산(廬山)에 관한 이야기는 줄이고
다시 백거이(白居易)의 시(詩)로 돌아가...
大林寺桃花(대림사도화): 대림사 복사꽃
人間四月芳菲盡(인간사월방비진): 인간 세상 4월엔 꽃이 다 졌는데
山寺桃花始盛開(산사도화시성개): 산사에는 복사꽃이 이제서 활짝 피었네.
長恨春歸無覓處(장한춘귀무멱처): 봄이 돌아간 곳, 찾을 길 없어 안타까웠는데
不知轉入此中來(부지전입차중래): 그 봄이 산중으로 옮겨온 줄 나만 몰랐구나.
백거이(白居易)는
이곳 여산(廬山)에 들어와 초당(草堂)을 짓고
뜰 앞에 못을 파 물고기도 기르고 연도 심고 가꾸었다.
사람들은 그가 만든 못을 그의 성(性)을 따서 "백가지(白家池)"라 불렀다.
그는 초당(草堂)에 머물며 향로봉(香爐峰)도 오르고,
동림사(東林寺)와 서림사(西林寺) 그리고 대림사(大林寺) 등을 오가며
여산(廬山)의 아름다움에 흠뻑 취해 여러 편의 시(詩)를 남겼다.
그러던 어느 해 늦은 봄날
다시 대림사(大林寺)를 찾았는데,
처음 보는 작은 오솔길이 있어 따라 가보니 이미 지고 없는 복사꽃이
그곳에는 만발하여 선경(仙境)을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
뜻하지 않게 늦은 복사꽃을 본 백거이(白居易)는
"대림사도화(大林寺桃花)"란 시(詩)를 짓고
"화경(花徑): 꽃길"이란 두 글자를 돌바닥에 새겨놓았다.
시(詩)에서 "4월에 다른 곳에는 꽃이 다 졌다"고 한 것은
음력(陰曆)으로 4월을 말한다.
당시에는 양력(陽曆)이 아닌 음력(陰曆)을 사용하던 시절이기에
본 시(詩)를 이해함에 있어서 착오가 없기를 바라는 바이다.
왠지 이 대목에서는
도연명(陶淵明)의 도화원기(桃花源記) 색채가 너무도 짙게 묻어난다.
아무튼 훗날 강주(江州) 사람들은
백거이(白居易)를 기려 이곳을 "백사마화경(白司馬花徑)"이라 불렀다는데,
백(白)은 그의 성씨(姓氏)이고
사마(司馬)는 그가 좌천되어 강주(江州)에 머물면서 이곳에 자주 들릴 때 벼슬이름이다.
그는 조정(朝廷)의 미움을 받아
강주사마(江州司馬)로 좌천되었던 울분의 시기에
불후의 명작 "비파행(琵琶行)"을 토해냈다.
백거이(白居易)는
황제(皇帝)에게 간언(諫言) 즉 직언(直言)을 올리는
간관(諫官)의 자리인 좌습유(左拾遺)의 직위(職位)에 한 때 있기도 했다.
이후 직책을 옴겨 간언(諫言)하는 직책에 있지 않으면서
간언(諫言)의 상소(上疏)를 황제(皇帝)께 올렸다는 이유로,
외진 고을인 강주(江州)의 사마(司馬)라는 직책(職責)으로 쫓겨났다.
평소엔 늘 상 있는 일이기에 별 문제 될 게 없었지만,
그를 경계하고 질투하던 권신(權臣)들의 트집과 비방이
좌천(左遷)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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