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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전 명시 감상

등금릉봉황대(登金陵鳳凰臺): 금릉 봉황대에 오르다... 이백(李白)

登金陵鳳凰臺(등금릉봉황대): 금릉 봉황대에 오르다.

鳳凰臺上鳳凰遊(봉황대상봉황유): 봉황대 위에 봉황이 노닐었다더니
鳳去臺空江自流(봉거대공강자류): 봉황은 가고 텅 빈 누대엔 강물만 흐른다.
吳宮花草埋幽徑(오궁화초매유경): 오(吳)나라 궁궐 터엔 화초가 오솔길을 덮었고
晉代衣冠成古丘(진대의관성고구): 진(晉)나라 고관들도 옛 언덕에 묻혔다네.
三山半落靑天外(삼산반락청천외): 삼산은 하늘 위로 반쯤 걸렸고
二水中分白露州(이수중분백로주): 두 줄기 강물은 백로주로 갈라져 흘러가네.
總爲浮雲能蔽日(총위부운능폐일): 뜬 구름은 해를 가리고도 남는데
長安不見使人愁(장안불견사인수): 장안은 보이지 않고 수심만 잠기는구나.

 

"금릉(金陵)"은 오늘날의 "남경(南京)"을 말한다.
남경(南京)은 삼국시대(三國時代) 때는 오(吳)나라 그리고 육조시대(六朝時代)에 와서는

동진(東晉), 송(宋), 제(齊), 양(梁), 진(陳)나라, 등이

이곳을 도읍으로 정하고 나라를 열었을 만큼 역사가 깊으며,
당시에는 "건업(建業)"이나 "건강(建康)"이란 이름으로 불렸었다.


봉황대(鳳凰臺)는 남경(南京) 시내 서남쪽에 있었는데

지금은 그 자리에 웅장한 열강루(閱江樓)가 세워져 있다.
청(淸)나라 때 편찬된 "강남통지(江南通志)"에 보면

육조시대 송(宋)나라 문제(文帝) 16년 서기로 439년에

공작처럼 생긴 오색 빛깔의 새 3마리가 산에서 날아오자

사람들은 그 새를 봉황(鳳凰)이라 여겼다.

 

너무나 기이하여 새가 앉은 자리에 누대(樓臺)를 세우고

"봉황대(鳳凰臺)"라 이름지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이백(李白)은 사실 율시(律詩)를 많이 짓지 않았다.
그의 시(詩)들은 짧은 절구(絶句)가 대부분인데,
본 시(詩)는 그가 남긴 율시(律詩) 중에서도 가장 많이 알려진 시(詩)로

수작(秀作)에 속한다.


지난날 이백(李白)이

"안사安史)의 난(亂)" 야랑(夜郞)으로 유배(流配)를 갔을 때 지었다고도 하고,
궁굴에서 쫏겨나 천하(天下)를 유람할 당시

금릉(登金)에 들러 지었다는 설도 있어서 어느 게 맞는지 모르겠다.


이백(李白)은 최호(崔顥)가 지은 "황학루(黃鶴樓)"란 시(詩)를 매우 좋아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로,
그 시(詩)와 겨뤄보고 싶어서

이 시(詩)를 지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당시 이백(李白)이 무한(武漢)의 황학루(黃鶴樓)에 올라

장강(長江)의 풍치에 매료되어

붓을 들고 시(詩)를 지으려는 순간 누벽(樓壁)을 올려다 보니,
시(詩) 한 수가 큼지막하게 걸려 있었다.


자세히 읽어보니

최호(崔顥)가 지은 "황학루(黃鶴樓)"란 시(詩)였다.
이 시(詩)에 감동한 이백(李白)은

시(詩) 짓기를 포기하고 붓을 던졌다는 일화(逸話)는 매우 유명하다.

 

그 후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최호(崔顥)의 명작(名作) 황학루(黃鶴樓)와

겨뤄보고자 봉황대(鳳凰臺)에 올라
본 시(詩)를 짓고서는 우열(優劣)을 가려 보고자 했다고 한다.
이와같은 내용은

"당시기사(唐詩紀事)""초계어은총화(苕溪漁隱叢話)"에도 실려 있는 내용으로
사실인 듯 하다.


송(宋)나라 말기(末期) 때 문인(文人) 방회(方回)는

"영규율수(瀛奎律髓)"에서 두 시(詩)를 가리켜

"격률(格律)이나 기세(氣勢)가 우열(優劣)을 가리기가 쉽지 않다" 라고 하였다.


두 사람의 시(詩)는 모두

운용(運用)이나 언어(言語)의 흐름이 자연스러우며
지나친 수식(修飾)을 삼가해

소탈하면서도 매끄러운 것이 특징이다.


"등금릉봉황대(登金陵鳳凰臺)" 시(詩)는

높은 곳에 올라 옛날을 추념(追念)하는 내용이 주류이다.
역사적(歷史的)인 전고(典故)와

눈 앞의 경물(景物), 그리고 자신의 느낌을 섞어
나라를 걱정하는 우국충정(憂國衷情)으로 끝을 맺은 작품으로,

당시(唐詩)의 특징이 잘 녹아든 수작(秀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