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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전 명시 감상

연가행(燕歌行): 제비에 띄워보내는 노래 ... 조비(曹丕)

燕歌行(연가행): 제비에 띄워 보내는 노래

秋風蕭瑟天氣凉(추풍소슬천기량): 가을바람 쓸쓸하고 날씨마저 서늘하니
草木搖落露爲霜(초목요락로위상): 초목은 흩날리고 이슬은 서리가 되네.
群燕辭歸鵠南翔(군연사귀안남상): 제비 떼 떠나가고 기러기 남쪽으로 나는데
念君客遊多思腸(념군객유다사장): 객지에 떠도는 그대를 생각하니 애간장이 타네요.
慊慊思歸戀故鄕(겸겸사귀련고향): 고향에 돌아가기를 못내 바라면서도
君何淹留寄他方(군하엄류기타방): 그대는 어찌하여 오래도록 타지에 머무는가요~?.
賤妾耿耿守空房(천첩경경수공방): 천첩은 외로이 빈 방을 지키는데
憂來思君不敢忘(우래사군부감망): 근심되어 그대 생각 차마 잊을 수가 없습니다.
不覺淚下沾衣裳(부각루하첨의상): 얼결에 눈물이 옷자락 적시고
援琴鳴絃發淸商(원금명현발청상): 거문고 당겨 줄을 뜯어도 슬픈가락만 쳐지니
短歌微吟不能長(단가미음부능장): 짧은 노래 가냘픈 소리 오래가지 못하네요.
明月皎皎照我床(명월교교조아상): 밝은 달빛 내 침상을 환하게 비추
星漢西流夜未央(성한서류야미앙): 은하수가 서편으로 기울어도 밤이 끝나지를 않는구려.
牽牛織女遙相望(견우직녀요상망): 견우 직녀가 멀리서 서로를 바라만 보듯이
爾獨何辜限河梁(이독하고한하량):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토록 오도가도 못하나요~?.

 

삼국지(三國志)를 좋아하고 심도있게 읽은 분이라면

조조(曹操)와 그의 두 아들 조비(曹丕) 그리고 조식(曹植)이,
문학적(文學的)
특히 시적(詩的)으로 대단히 조예(造詣)가 깊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본 블로그에서

아버지 조조(曹操)의 "단가행(短歌行)"동생 조식(曹植)의

"동작대 부(銅雀台 賦)" "칠보시(七步詩)"를 소개 했는데,
이번에는 조조(曹操의 세째 아들 조비(曹丕)의
"연가행(燕歌行)"을 소개하고자 한다.


후한말(後漢末) 어지러운 정세(政勢)에서

아버지 조조(曹操)가 탄탄하게 이룩한 기반(基盤)을 바탕으로
아버지에 이어 후한(後漢)의 승상(丞相)에 오르자,
곧이어 위왕(魏王)의 지위(地位)까지 오른다.

 

건안(建安) 말년(末年)에는

헌제(獻帝)를 패위(廢位)시키고 한(漢)나라를 멸망시킨다.

그리고는 도읍(都邑)을 장안(長安)에서 낙양(洛陽)으로 옴겨

국호(國號)를 "위(魏)"라 선포(宣布)하고 황제(皇帝)에 등극(登極)한다.


그 후 천하(天下)를 통일(統一)하고자

손권(孫權)의 오(吳)나라를 두 번이나 쳤으나 별 이득(利得)이 없었다.

 

그는 한(漢)나라를 찬탈(簒奪)한  패륜왕(悖倫王)으로 불리며

재임기간 내내 큰 부담으로 어께를 짓눌렸다.


그러나 천성(天性)이 문학적(文學的) 소질(素質)이 뛰어나

아버지 조조(曹操)와 동생 조식(曹植) 등 3부자는,
건안문학(建安文學)과 위(魏) 문학(文學)을 크게 발전시킨
장본인(張本人)들이기도 하다.

 

당시(當時) 높은 관리들 사이에 "부(賦)""시(詩)"가 유행하여

시(詩)에서는 오언시(五言詩)들이 주류(主流)를 이루었으나,
조비(曹丕)는 이것을 뛰어넘어

"칠언고시(七言古詩)"를 확고히 정착시키는 업적(業績)을 이룩했다.


지금 소개하는 "연가행(燕歌行)"

최초의 칠언시(七言詩)라고 보는 학자(學者)들이 많다.
그리고 견우(牽牛) 직녀(織女) 이야기가
이 시(詩)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한(漢)나라 때 이미 전설(傳說)로 널리 펴졌슴을 알 수 있다.

 

아무튼 조비(曹丕)는 틈틈이 문학(文學)에 힘을 쏟아

"전론(典論)""시부(詩賦)"를 많이 지었다.
오늘날까지 전해오는 그의 작품(作品)이
약 1백 편 가량 되는 것으로 볼 때,

그의 문학적(文學的)인 열정(熱情)이 어느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동생 조식(曹植)이
자신보다 문학적(文學的)인 면에서 뛰어나 인기를 독차지 해

주변에 많은 명사(名士)들이 모여들자,
그는 시기(猜忌)가 일어 동생을 죽이고자 궁궐로 불러들인다.

 

위왕(魏王)의 지위(地位)에 있던 조비(曹丕)는

조식(曹植)을 문무대신(文武大臣)들 앞으로 불러내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며 트집을 잡는다.


"듣자하니 네가 시(詩)를 잘 짓는다고 소문이 무성한데...

그게 사실인지 내가 확인 좀 해봐야겠다."

"너와 나는 형제이니 형제(兄弟)의 정(情)을 내용으로 시(詩)를 짓돼,

형제란 말이 단 한자라도 들어가서는 아니 된다."

 

"만약 시(詩)를 일곱 걸음만에 짓지 못하면

이 모두는 세상을 어지럽힌 헛소문을 네놈이 퍼트린 것으로 간주하여

너의 목숨을 거두겠다"며 윽박지른다.

 

이에 조식(曹植)은 많은 관리(管理)들 앞에서

형제지간(兄弟之間)에 겪어야 하는 권력(權力)의 비정함에 눈물을 쏟으며

지어 읊은 시(詩)가 "칠보시(七步詩)"

전에 본 블로그에 그의 삶과 함께 소개를 했었다.


이때 조비(曹丕)는
동생이 즉석에서 지어 읊는 안타까운 시(詩)를 듣고는

동생 조식(曹植)보다 오히려 더 많은 눈물을 쏟으며,
동생의 시(詩)에 감동(感動)과

비정한 권력(權力)의 안타까움에 흐느껴 울었다.


결국 동생 조식(曹植)을 차마 죽이지 못하고 풀어주며

멀리 변방(邊方)으로 내쫓는다.


그러나 조식(曹植)을 따르던 측근들 모두에게는 
반역(叛逆)이란 죄를 씌워

3족(三族)을 멸(滅)하는 잔인성(殘忍性)을 보였으며,
자신(自身)의 권위(權威)에

조금이라도 끼어드는 자(者)가 있으면
그가 가까운 친인척(親姻戚)이라 할지라도 결코 용서치 않고
목숨을 빼앗았다.

 

어찌보면 이와같은 냉정함이 어지러운 시대(時代)에

병약(病弱)한 자신(自身)을 지키기 위한

최선책(最善策)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이렇듯 냉정한 조비(曹丕)지만

가슴 속에는 문학적(文學的)으로 뛰어난 재능(才能)과 섬세한 낭만(浪漫)

그리고 따스한 정(情)이 흐르고 있었으니...
시대적(時代的) 환경(環境)이

악인(惡人)과 선인(善人)을 만드는 건 아닌지 모를 일이다.


시(詩)의 문학사적(文學史的) 측면에서 볼 때

조비(曹丕)는 짧은 재위(在位) 기간(期間)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족적(足跡)을 남겼다.


낭군(郎君)과 떨어져 사는 아낙의 입장에서 쓴
"연가행(燕歌行)"
어쩌면 이리도 속 깊은 정(情)을 섬세하게 그려냈는지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마치 아낙의 속내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정적(情的)인 표현이 가히 압권(壓卷)이다.

 

조비(曹丕)는 웅대한 스케일이나

남성적(男性的) 기개(氣槪)를 나타내는 시(詩)보다는

주로 정적(情的)인 작품(作品)을 많이 남겼다.


본 작품에서도 출정(出征)한 남편을 그리며

고향(故鄕)에 홀로 남은 아내의 상사(相思)의 정(情)을
견우(牽牛)와 직녀(織女)에 견주며 표현한 시(詩)로
읽을수록 애틋함이 묻어난다.


제왕(帝王)이 지은 시(詩)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섬세한 정(情)이 흘러

마치 아녀자가 지은 시(詩)로 착각마저 들게하는 명작(名作)이다.


어지러운 시대(時代)에 태어나
아버지 조조(曹操)의 후광(後光)을 업고

스스로 나라를 선포하며 황제(皇帝)에 올랐지만,
재임(在任) 기간(期間) 내내 폐병(肺病)으로 고생하다

제위(帝位) 7년 만인 40세에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