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高句麗)
金花折風帽(금화절풍모): 금화(金花) 꽂은 바람막이 꼬깔모자,
白馬小遲回(백마소지회): 머뭇거리며 배회하는 백마(白馬)여.
翩翩舞廣袖(편편무광수): 넓은 옷소매 훨훨 날리는 그 모습은,
似鳥海東來(사조해동래): 마치 새가 해동(海東)에서 오는 듯 하구나.
시선(詩仙) 이백(李白)이
고구려(高句麗) 민족(民族)이 춤을 추는 모습을 보고 읊은 시(詩)이다.
당(唐) 태종(太宗) 때인 서기 645년 경부터
고구려(高句麗)와 당(唐)나라는
산발적(散發的)이지만 격렬한 전쟁을 치뤘다.
결국 서기 668년에 고구려(高句麗)가 멸망(滅亡)하게 된다.
이때 수많은 고구려(高句麗) 난민(難民)들이
당(唐)나라로 끌려와 노예로 팔려가거나 전쟁터로 끌려가게 되는 수난(羞赧)를 겪었다.
이백(李白)이 살던 서기 700년 경에는
이런 고구려(高句麗)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애환(哀歡)이나 향수(鄕愁)를 달래려 춤을 추는 모습들을
가끔은 볼 수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 주(註) -
본 시(詩)를 좀더 깊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당(唐)과 고구려(高句麗)의 정세(政勢)를 살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여,
간략하게나마 정세를 소개하고자 한다.
통일국가 수(隋)나라가 38년 간의
짧은 통치(統治) 기간(期間)을 끝으로 멸망하고,
중원대륙(中原大陸)에 새로운 나라가 열렸는데 바로 당(唐)나라이다.
수(隋)나라가 고구려(高句麗)에게 살수(薩水)에서 크게 패하면서
국력(國力)이 급격히 쇠퇴(衰退)해 망하자,
이에 커다란 울분을 삼킨 자(者)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당(唐)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이다.
당(唐)나라 초대(初代) 황제(皇帝)인 고조(高祖) 이연(李淵)은,
고구려(高句麗)에 비교적 호의적(好意的)인 감정(感情)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아들 이세민(李世民)과는 의견 충돌이 잦았는데,
특히 외교(外交) 분야(分野)에서 잦은 마찰을 일으켰다.
결국 이세민(李世民)은 역모(逆謀)를 도모(圖謀)하여,
아버지와 형제들을 모조리 죽이고서
당(唐)나라 황제(皇帝) 자리를 찬탈(簒奪)한 패륜아(悖倫兒) 였다.
그런데 이런 이세민(李世民)은 황제(皇帝) 자리에
패륜적(悖倫的) 무력(武力)으로 등극(登極) 했지만,
중국(中國) 역사상(歷史上) 가장 통치(統治)를 잘한
훌륭한 황제(皇帝)로 꼽이는 인물이기도 하니 참으로 아이러니컬 하다.
당태종(唐太宗)을 모델로 하여 바른 정치(政治)에 대한 신하들과의
문답(問答)을 통해서 설명하는 내용의 심서(心書)인,
오긍(吳兢)이 지은 "정관정요(貞觀政要)"는,
지금도 널리 읽히는 베스트셀러로,
통치자(統治者)들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반듯이 읽어봐야야 하는
교과서적(敎科書的) 통치술(統治術)의 정본(正本)으로 평가 받는다.
각설(却說)하고...
아무튼 황제(皇帝)에 오른 직후부터 이세민(李世民)은
고구려(高句麗)에 본격적인 압박(壓迫)을 가하게 된다.
봉역도(封域圖: 고구려의 지도)를 바치고,
경탑(經塔: 수(隋)나라를 멸망시킨 것을 기념하여 세운 탑)을 허물라는 등 시시콜콜 트집을 잡았다.
그리고 수(隋)나라와의 전쟁에서 잡아간 포로들을 전부 돌려달라며
고구려(高句麗)에 압력(壓力)을 가한다.
이무렵 고구려(高句麗)는
수(隋)나라를 물리친 장수(將帥)들의 기세(氣勢)에 눌려,
왕권(王權)의 급속한 약화로 국력(國力)이 기울어진 상태였다.
당(唐)나라의 겁박(劫迫)에 할 수 없이
태자(太子)를 장안(長安) 황궁(皇宮)으로 보내,
조공(朝貢)을 바치고 굽신거리는 수모(受侮)를 겪어야 했다.
이에 크게 반발한 연개소문(淵蓋蘇文)이
나약한 영류태왕(榮留太王)를 시해(弑害)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리고 황제(皇帝)에게 아첨(阿諂)을 일삼던 친당파(親黨派)신하들까지 모조리
주살(誅殺)하고 정권(政權)을 거머쥔다.
그 후 연개소문(淵蓋蘇文)은 당(唐)나라가 내건 조건들을 모두 무시하고
굽신거리며 바치던 조공(朝貢)도 끊어버린다.
이에 화가 치민 당태종(唐太宗)은
직접 100만 대군(大軍)을 이끌고 서기 645년 여름 씩씩거리며 고구려(高句麗)로 쳐들어온
그러나 안시성(安市城)에 이르러
양만춘(楊萬春) 장군(將軍)에게 발목이 잡혀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된다.
때는 무덥고 습한 우기(雨期)라
전염병(傳染病)이 급속하게 군중(軍衆)에 퍼졌으며,
잦은 비로 식량 등 군수물자(軍需物資)가 썪어가며
갑옷과 병기(兵器)들이 녹슬고 도로마저 유실되는 등,
당(唐)나라 병사(兵士)들의 사기(士氣)가 말이 아니었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몇번의 공격에서 당태종(唐太宗)이
눈에 화살을 맞아 큰 부상을 입게 되자,
결국 피눈물을 흘리며 퇴각(退却)한다,
그 후유증으로
당태종(唐太宗)은 병이 깊어져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
태종(太宗)이 죽자 그의 아들 이치(李治)
즉 당고종(唐高宗)이 등극(登極)했으며,
그는 아버지 태종(太宗)의 복수를 위해
서기 662년 고구려(高句麗)로 쳐들어왔다.
그러나 이번에도 살수(薩水) 즉 청천강에서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용맹한 군사들에 막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겁을 먹고는 후퇴하고 만다.
이 일이 있고 얼마 후 고구려(高句麗)에서는 연개소문(淵蓋蘇文)이 늙어
병사(病死)하는 변고(變故)가 발생한다.
따라서 그의 장남(長男)인 연남생(淵男生)이
아버지의 권력(權力)과 지위(地位)를 모두 물려 받았다.
연남생(淵男生)이 드넓은 고구려(高句麗)의 영토(領土) 순찰(巡察)을 위해
변방(邊方)으로 나간 사이,
둘째 동생 연남건(淵男建)이 군사(軍士)를 일으켜 군부(軍部)를 장악하고,
연남생(淵男生)의 처(妻)인 형수(兄嫂)와 조카들까지
모조리 처형(處刑)하는 급변사태(急變事態)가 발생한다.
이에 충격을 받은 연남생(淵男生)은 고구려(高句麗)로 돌아갈 수 없게 되자,
당(唐)나라로 귀순하여 고구려(高句麗)를 처부수는 일에 앞장 서는 등,
동생 연남건(淵男建)의 배신(背信)과
충성(忠成)을 다한 고구려(高句麗)에 복수(復讐)의 칼날을 세운다.
그리고 당(唐)나라를 적극적(積極的)으로 도와
고구려(高句麗)를 칠 기회를 노린다.
당시 권력(權力)이 뒤바뀐 고구려(高句麗) 내부에서는
보복에 보복을 가하는 등 혼란이 극에 달해 있었다.
이 기회를 노칠리 없는 당(唐)나라는 이적(李勣) 장군(將軍)이 이끄는
55만 명에 달하는 대 군사(軍士)를 보내
신라(新羅)와 손잡고 다시 처들어가
정세(政勢)가 어지럽던 고구려(高句麗)를 쉽게 함락(陷落)시키고 만다.
이리하여 대(大) 제국(帝國) 고구려(高句麗)는
한반도(韓半島)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그 해가 서기 668년 9월에 일어난 일이다.
이때부터 라 당연합군(羅,唐聯合軍)이란 명분(名分)을 내세워
신라(新羅)와 본격적으로 교류를 넓히게 되며,
당(唐)나라는 대동강(大同江) 이북(以北) 땅을 차지했고
신라(新羅)는 사실 별 실익(實益)을 얻지 못했다.
그 후 당(唐)나라는
고구려(高句麗) 영토(領土)를 떠돌던 수많은 유민(流民)들을 잡아가 노예(奴隸)로 팔거나,
이민족(異民族)과의 전쟁(戰爭)이 끊이지 않는
서역(西域)의 변방(邊方)으로 보내곤 했었다.
당(唐)나라의 용맹한 장수(將帥)
"고선지(高仙芝)"도 이때 끌려간
고구려(高句麗) 유민(流民) 출신의 장수(將帥)로 알려진 인물이다.
변방(邊方邊方)의 이민족(異民族)들로부터
노략질을 끈임없이 받던 당(唐)나라는,
궁여지책(窮餘之策)으로 획기적(劃期的)인 정책(政策)을 시행했는데,
변방(邊方)에서 혁혁한 전공(戰功)을 세우면,
출신성분(出身成分)이나 민족적(民族的) 차별(差別)을 두지 않고 그에 합당한 벼슬를 내렸다.
그리고 전쟁에서 빼앗은 지역(地域)을 다스리도록
특권(特權)을 주는 파격적(破格的) 정책(政策)도 시행했다.
따라서 수많은 전공(戰功)을 세운 고선지(高仙芝)가
당(唐)나라의 당당한 장군(將軍) 반열에 오를 수 있었으며,
서역(西域)을 관활(寬闊)하는 절도사(節度使) 즉,
요즘의 도지사(道知事)에 해당하는 지위(地位)까지 누릴 수 있었다.
당시 당(唐)나라 내(內)에서도
과거(科擧)에 급제(及第)가 어려운 유생(儒生)들은
차라리 변방(邊方)에 나아가서 공(功)을 세워 벼슬길에 오르려,
스스로 자원하여 전쟁터로 떠나는 젊은이가 비일비재(非一非再) 했었다.
전에 본 블로그에 소개한
"규원(閨怨): 어린아씨의 원망"이란 왕창령(王昌齡)의 시(詩)도,
바로 출세(出世)를 위해 변방(邊方)으로 떠난 낭군(郎君)을
그리워하는 내용의 시(詩)였다.
어찌어찌 하다보니 쓸데없이 사설(私說)만 길어졌다.
아무튼 본 시(詩)는...
고구려(高句麗)가 멸망(滅亡)하고
이리저리 떠돌던 고구려(高句麗) 유민(流民)들이 당(唐)나라에 끌려와 살면서,
향수(鄕愁)와 애환(哀歡)을 달래며 추는 전통춤을 보고 이백(李白)이 지은 시(詩)이다.
따라서 고구려(高句麗)란 시(詩)는 명시(名詩)의 반열(班列)을 떠나,
대시인(大詩人) 이백(李白)이 지은 시(詩)였기에
반가운 마음에 소개를 했다.
이백(李白)이 살던 서기 700년 경에는
고구려(高句麗) 유민(流民)들이 장안(長安)을 비롯한 여러 곳에 이미 끌려와 살던 때였다.
시(詩)를 보면 금화(金花)를 꽂은 화려한 꼬깔모자와 말이 등장한다.
넓은 소매옷을 휘저으며 덩실덩실 추는 추임새의 아름다움이,
해동(海東) 즉 고구려(高句麗)에서 날아온 새와 같다고 그는 표현했다.
고구려(高句麗)의 춤은
드넓은 요동(遼東) 땅을 거침없이 누비던
기상(氣像)과 한민족(韓民族) 특유(特有)의 섬세함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춤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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