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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전 명시 감상

촌행(村行): 어느 마을을 지나다... 왕우칭(王禹稱)

왕우칭(王禹稱) 945~1001

 

북송(北宋) 때 시인(詩人)으로 제주(濟州) 거야(鉅野) 사람이며,

자는 원지(元之)로 쓴다.
집안이 대대로 농사를 짓고 살다 보니 늘 가난하게 살았다.


송 태종(宋 太宗) 8년 서기 979년 과거에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었고,

단공(端拱) 초에는 좌습유(左拾遺)와 직사관(直史館)이란 벼슬을 지내기도 했다.


서기 995년에는 한림학사(翰林學士)와

지심관원겸통진은대봉박사(知審官院兼通進銀臺封駁司)란 긴 이름의 관직(官職)을 지냈다.
왕우칭(王禹稱)은

"조명(詔命): 황제가 백성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적은 문서(文書)"

적절치 않은 부분이 있으면

그때마다 이의(異議) 제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태종(太宗)이 죽고 진종(眞宗)이 즉위하자 왕우칭(王禹稱)은 기다렸다는 듯,

1),변방(邊方)의 방어를 강화하고,

2),불필요한 병사(兵士)와 관원(官員)을 줄이며,

3),선거(選擧)를 엄격하게 시행하고,
4),쓸데없이 많은 승려(僧侶)들을 환속(還俗)시켜야 하며,

5),소인배(小人輩)들이 득세(得勢)하는 일을 철저하게 막을 것 등,

다섯 가지 시무(時務)를 올렸다.

 

따라서 이 상소문(上疏文)은

조정(朝廷) 안밖의 커다란 반향(反響)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무렵 송(宋)나라를 건국한 조광윤(趙匡胤)의 실록(實錄)

즉 태조실록(太祖實錄)을 편찬했는데,

왕우칭(王禹稱)이 그 일을 맡았다.

 

역사적(歷史的) 사실 중에 좋은일만 적질 않고 있는

그대로 잘 잘못을 모두 기록하자,

 진종(眞宗) 황제(皇帝)가 진노(震怒)하여

왕우칭(王禹稱)은 조정(朝廷)에서 쫓겨나 황주지주(黃州知州)로 유배(流配) 된다.
유배지(流配地)에서도 황제(皇帝)에게 성소문(上疏文)을 올리는 등 

직언(直言)을 계속하자,

진종(眞宗)은 노여움이 극에 달해

그를 다시 멀고 험난한 기주(蘄州)땅으로 내쳐버려 결국 그곳에서 죽게하고 말았다.

 

성격이 대쪽 보다 더 강직(剛直)한 탓에 직간(直諫)을 잘하기로 유명하여

자주 관직(官職)이 깎일 정도 였으니,
그 성격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갈 일이다.


그가 지은 "삼출부(三黜賦)"

그런 그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작품(作品)이기도 하다.
왕우칭(王禹稱)은
두보(杜甫)와 백거이(白居易)의 시(詩)들을 줄겨 읽고 배웠으며,

타인들에게도 그들의 애국충절(愛國忠節) 정신(精神)을 배우길

권할 정도로 애국자(愛國者)였다.


그는 때때로 눈물을 많이 흘렸던 것으로 알려지기도 하는데,

대쪽 같은 강직한 성품 이면에는

에 못지않은 가슴이 따스하고 여린 낭만파(浪漫派)이기도 한  시인(詩人)이었다.


그는 학문적(學問的)으로

한유(韓愈)와 유종원(柳宗元)의 학풍(學風)과 시문(詩文)까지

심도있게 섭렵(涉獵)하기도 했기에,
폭넓은 문학적(文學的) 깊이는 널리 알려진 부분이다.


다재다능(多才多能)한 그의 천재적(天才的) 소질(素質)은

그림에도 조예(造詣)가 깊었으며,

인물화(人物畵)도 잘 그렸다.

 

또한 그는 북송시대(北宋時代) 시문혁신운동(詩文革新運動)의 선구자(先驅者)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히기도 한다.
저서로는 소축집(小畜集) 30권과 소축외집(小畜外集) 20권 중

현재 7권이 남아있다.

 

村行(촌행): 어느 마을을 지나다.

 

馬穿山徑菊初黃(마천산경국초황): 말 타고 산길을 가자니 국화가 이젠 누렇게 피었고
信馬悠悠野興長(신마유유야흥장): 유유히 말 가는대로 길을 맡기니 흥취 절로난다.


萬壑有聲含晚籟(만학유성함만뢰): 해질녘 골짜기마다 온갖 소리 들려오는데
數峰無語立斜陽(수봉무어립사양): 석양에 우뚝 선 몇 봉우리는 말이 없구나.


棠梨葉落胭脂色(당리엽락연지색): 팥배나무잎은 연지빛으로 물들어 떨어지고
蕎麥花開白雪香(교맥화개백설향): 메밀꽃은 흰눈처럼 피어 향기 날리네.


何事吟餘忽惆悵(하사음여홀추창): 무슨 일일까~?. 읊고난 뒤 갑자기 서글퍼짐은
村橋原樹似吾鄉(촌교원수사오향): 마을의 다리와 들판의 나무들이 내 고향 같구나.

 

모든이에게 고향(故鄕)은 있다.

고향(故鄕)하면 으레 그리움이나 추억(追憶)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본 시(詩)는 왕우칭(王禹稱)이 서기 991년 상주(商州)에 유배(流配)되었을 때

쓴 시(詩)로 알려져 있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현재의 답답한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싶은 마음이 짙게 깔린 시(詩)이다
말을 타고 산과 들길을 지나며,
국화(菊花)가 곱개 핀 길가도 지나고 석양빛에 물든 산봉우리 옆도 지나간다.


골짜기마다 시끄러운 온갓 소리는 저녁이 되어 부산해지는 소리로,
떠나온 고향에서 많이 들어봄직한 낮익은 소리들이다.
팥배의 고운 단풍과 메밀꽃이 하얗게 핀 밭길을 지나가며

제 흥에 겨워 흥얼대다가 문득 가슴이 져려온다.

 

왠일일까~?.
바로 고향(故鄕)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다.
저 마을 앞을 흐르는 냇가에 놓인 다리와 들판의 낮익은 나무들은

떠나온 아련한 고향(故鄕)을 떠올리게 한다.


순간 울컥한 마음에 서럽다.
유배(流配)에 처한 몸이다 보니

고향(故鄕)의 풍경(風景)을 닮은 정겨운 모습들이 오히려 자신의 처지를 서럽게 한다.


불의(不義)를 보면 참지 못했고,

잘못을 보면 황제(皇帝)에게도 직언(直言)을 서슴치 않던 그가,
당당하게 대접받으며 살 날이
과연 그의 생전에 찾아올 수 있었을까~?.


결국 아첨꾼들의 농간(弄奸)으로
조정(朝廷)은 고사하고

그토록 그리던 고향(故鄕) 땅도 밟아보지 못하고,
유배지(流配地)에서 서럽게 생을 마감하고 말았으니...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메밀꽃이 피었다 지고...

이젠 들국화가 하나 둘 꽃망울을 터트리는 서늘한 가을 초입에,

"촌행(村行)"이란 시(詩)와 함께

송(宋)나라의 대쪽 같은 관리(官理)

왕우칭(王禹稱)이 문득 생각남은 왠일이지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