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거이(白居易) 772~846
자는 낙천(樂天) 호는 향산거사(香山居士)로 쓰며 시호는 문(文)으로
당(唐)나라 중기 하남성(河南省) 신정현(新鄭縣) 사람이다.
백거이(白居易)가 이 시기에 태어난 것은 어찌보면 그로서는 행운이었는지도 모른다.
왜냐면 과거제도(科擧制度)가 널리 활성화 되어
실력이 있는 일반 양민들도 응시할 기회가 주어지던 시기에 살았기 때문이다.
백거이(白居易)는
서기 800년 그의 나이 29세 때 진사시(進士試)에 급제(及第)하였다.
급제 후 탄탄대로의 출세로 한림학사(翰林學士)를 거쳐 좌습유(左拾遺) 등
좋은 직위(職位)에 발탁되는 행운(幸運)도 따랐다.
당시로서는 늦은 나이였던 37세 되던 해에 부인 양씨(楊氏)와 늦깍이 결혼을 한다.
그래서 그런지 당(唐) 현종(玄宗)과 양귀비(楊貴妃)의 사랑을 노래한
장편(長篇) 서사시(敍事詩) "장한가(長恨歌)"에는
부인(夫人)에 대한 백낙천(白樂天)의 사랑이 잘 반영 되있다고 보는 사람이 많다.
서기 811년 돌아가신 모친상(母親喪)을 지내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갔던 그는
3년 후 장안(長安)으로 돌아왔으나,
태자좌찬선대부(太子左贊善大夫)라는
별 볼일 없는 한직(閑職)의 벼슬자리 밖에 얻지 못했다.
게다가 이듬해 발생한 재상(宰相) 무원형(武元衡)의 암살사건(暗殺事件)에 관하여
직언(直言)을 했다가,
조정(朝廷)의 분노(憤怒)를 사
강주사마(江州司馬)로 좌천(左遷) 되는 불운(不運)을 맞는다.
사마(司馬)라는 직책(職責)은
별로 할 일도 없고 그저 손님을 맞이하고 접대하며 세월만 보내는
있으나마나한 명분 뿐인 한직(閑職)으로,
중앙의 관리가 좌천되어 유배(流配)를 가면 이 직책을 많이 받았다.
아무튼 이 사건은
백거이(白居易)가 관리(管理)에 임명 된 이래 처음 겪은 뼈저린 좌절이었고
매우 큰 심적(心的) 고통이었다.
그로인해 그의 시심(詩心)은 오히려 유유자적(悠悠自適)하고
감상(感傷)으로 향하게 하는 계기도 되었다.
바로 이 고난(苦難)의 시기에
백거이(白居易) 최고의 서정시(敍情詩)로 일컬어지는
불후의 명작 "비파행(琵琶行)"이 완성된다.
서기 820년 자신을 좌천시켰던 헌종(憲宗)이 죽고 뒤이어 목종(穆宗)이 즉위하자,
백거이(白居易)는 중앙으로 복귀하여 낭중(郎中)란 직책(職責)을 얻어
조칙(詔勅) 제작(製作) 임무를 맡게 되며
국가(國家)의 이념(理念)을 적립하는데 매진하게 된다.
그후 쉰살이 넘은 나이에 조정(朝廷)에서 당쟁(黨爭)이 일자
회호리를 피하고자 자진하여
강남(江南)으로 내려가 항주자사(杭州刺史)와 소주자사(蘇州刺史)를 지내기도 했으며
이후 많은 벼슬자리를 옴겨다녔다.
그 와중에서도 그는 늘 시(詩)와 함께 살았다.
그가 지은 작품(作品)의 수는 대략 3,840편 정도라고 하는데,
작가(作家)와 작품(作品) 수가 크게 번성한
중당시대(中唐時代)란 걸 감안하더라도
이와 같이 많은 작품을 창작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그는 다방면으로 훌륭한 친구를 많이 사귀었는데
친구들과 서로 주고 받은 시문(詩文)에는 정(情)이 물씬 배어있는 걸 알 수 있다.
특히 원진(元稹)과 유우석(劉禹錫) 사이에 오고 간 글을 모은
"원백창화집(元白唱和集)"과 "유백창화집(劉白唱和集)"은
중당시대(中唐時代)의 문단(文壇)을 화려하게 장식한
백거이(白居易) 문학(文學)의 결실로 일컬어질 정도이다.
그의 여러 작품 가운데는 정치적(政治的) 이념(理念)을 주장한 것도 있고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 것도 있는데,
모두 평이한 언어로 알기 쉽게 표현했으며 시(詩)에 봉급(俸給)의 액수까지 언급하는 등,
그는 생활 자체가 청념했으며 매사에 당당했었다고 전해진다.
백낙천(白樂天)의 시문(詩文)들이 쉽다보니
당시 문인(文人)들 사이에 속되다는 비판을 종종 받기도 했지만
그것은 일반 서민들 모두와 함께 나누고 싶은 배려와
애민적(愛民的) 식견(息肩)을 염두에 둔 표현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는 한 편의 시(詩)가 완성 될 때마다
집안에서 일하는 노파(老婆)에게 읽어주고 어려워하는 곳을 찾아 고치기까지 할 정도로
평이한 문체(文體)와 글자를 애용했으며,
꼼꼼한 퇴고(推敲) 또한 잊지 않았다고 한다.
이백(李白), 두보(杜甫), 한유(韓愈) 등
백거이(白居易)와 이름을 나란히 하는 시인들의 작품에는
송대(宋代) 이래 많은 주석서(註釋書)가 나왔는데 반해,
백거이 문집(文集)인 백씨문집(白氏文集)에는 그 흔한 주석서(註釋書)가 한 권도 없다.
종래의 주석서(註釋書)는
난해한 말에 관한 출전(出典)을 찾아내어 설명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으나
백거이(白居易)의 작품에는 이런 주석서(註釋書)가 필요치 않았던 까닭이다.
서기 815년 강주사마(江州司馬)로의 좌천(左遷)과 자신을 총애하던 목종(穆宗)의 죽음은
그에게 큰 좌절을 안겨주었으며,
이를 계기로 정치적(政治的) 입신(立身)을 꽤하던 정관문학(政官文學)으로부터 탈피하여
자연(自然)과 인생(人生)의 내면을 그려내는
순수문학(純粹文學)을 추구하는 전환점이 된다.
평생 지은 그의 문집(文集)은 75권으로 방대한 양을 자랑하며
말년(末年)에 정리한 문집(文集)인 "백씨문집(白氏文集)"은
여산(廬山)의 동림사(東林寺)를 비롯하여
여러 절에 분산 봉안(奉安)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수많은 시(詩)들이 오늘날까지 온전하게 내려올 수 있었다.
백거이(白居易)는
당시로서는 꽤나 장수한 75세의 나이로 낙양(洛陽)에서 생을 마감 할 때까지
늘 시(詩)와 함께 살았던 진정한 시인(詩人) 중에 시인(詩人)이었다.
- 주(註) -
중국(中國)의 한시(漢詩)를 우리말로 풀어서 옴기기란 쉽잖은 어려움이 있다.
일일이 글자의 뜻을 풀어서 옴기자니 중복되는 게 많고
문장(文章)이 필요 이상으로 길어지는 단점(短點)이 있다.
또 앞 뒤의 문맥(文脈)이 서로 연결되지 않는 게 태반이다.
그리고... 아무리 백거이(白居易)의 시(詩)가 평이하다고 하나
당시의 지명(地名)과 정치(政治), 문화(文化)를 어느 정도 이해를 하고 있어야
표현하고자 하는 시(詩) 본래의 뜻이 온전히 전해질텐데...
그런한 점이 현실(現實)에 맞게
우리글로 풀어 옴기기가 특히 어려웠던 부분이다.
한시(漢詩)는 대부분 오언(五言)이나 칠언(七言) 등
정형화(定型化) 된 글자의 조합(調合)을 통해 이루어지다 보니,
작가(作家)가 틀을 맞추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글자를 집어넣었거나
혹은 남아서 생략한 글자들이 가끔 있어
매끄럽게 우리 글로 옴긴다는 것이 현실적(現實的)으로 난감한 부분이었다.
따라서 본 비파행(琵琶行)도 필요하다고 느낀 부분들에 대해서는
내 임의로 과감하게 더하고
혹은 일정 부분을 생략한 점도 있다는 걸 밝혀두고자 하며,
일부 어순(語順)을 바꾸어 의역(意譯)으로 문장(文章)을 매끄럽게 다듬기도 했다.
이런 결과 미약한 풀이로
본래(本來)의 뜻이 왜곡(歪曲)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백거이(白居易)의 비파행(琵琶行)은
많은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고 때론 줄겨 읽는 명시(名詩)라서
큰 부담은 없으리라 자위하며
미천하고 두서없는 식견(識見)으로 옴겨봤으니...
모쪼록 블로그에 들러 읽고 가는 분이 있다면 너그러이 용서를 구할 뿐이외다.
琵琶行(비파행): 비파에 대하여
潯陽江頭夜送客(심양강두야송객): 심양강 어귀에서 밤 늦게 손님을 전송하려니
楓葉荻花秋瑟瑟(풍옆적화추슬슬): 단풍잎 갈대꽃에 가을이 쓸쓸하구나.
主人下馬客在船(주인하마객재선): 주인은 말에서 내리고 객손도 배 안에 오른다.
擧酒欲飮無管絃(거주욕음무관현): 술잔을 들어 마지막 잔을 나누고자 하나 음악이 없네.
酒不成歡慘將別(주불성환참장별): 술은 취하지 않았는데 서글피 이별하려니
別時茫茫江浸月(별시망망강침월): 이 시간 망망한 강물에 달빛만이 젖는구나.
忽聞水上琵琶聲(홀문수상비파성): 그때 어디선가 강물 위로 전해오는 비파소리
主人忘歸客不發(주인망귀객불발): 주인은 돌아 갈 생각 잊고 객도 떠나질 못 하네.
尋聲暗問彈者誰(심성암문탄자수): 음악소릴 찾아와 정중히 물었으나
琵琶聲停欲語遲(비파성정욕어지): 비파 소린 멎었는데 대답이 없네.
移船相近邀相見(이선상근요상견): 배를 옮겨 타고 다가가 서로이 마주보며
添酒回燈重開宴(첨주회등중개연): 술을 더 하려고 불을 밝혀 자리 마련하고
千呼萬喚始出來(천호만환시출래): 몇 번을 고하고 청하자 비로소 나온다.
猶抱琵琶半遮面(유포비파반차면): 비파를 안고 반쯤 얼굴을 가린 그녀.
轉軸撥絃三兩聲(전축발현삼량성): 줄을 고르고 두 세 번 튕기는 소리에
未成曲調先有情(미성곡조선유정): 곡조도 타지 않았는데 벌써 정감이 이는구나.
絃絃掩抑聲聲思(현현엄억성성사): 현을 타는 솜씨 소리마다 마음이 서려
似訴平生不得志(사소평생부득지): 평생 이루지 못한 한을 하소연하는 듯
低眉信手續續彈(저미신수속속탄): 머리 숙이고 손 뼏혀 애절하게 튕겨가니
說盡心中無限事(설진심중무한사): 마음에 서린 끝 없는 한을 토해내는구나.
輕攏慢撚撥不挑(경롱만연발부도): 살짝 눌렀다가 다시 지그시 튕기며
初爲霓裳後六絃(초위예상후육현): 먼저 곡은 슬픈 노래요, 나중 곡은 밝은 노래로고,
大絃嘈嘈如急雨(대현조조여급우): 큰 줄을 튕기니 소나기처럼 요란하고
小絃切切如私語(소현절절여사어): 작은 줄은 잔잔하니 속삭이듯 애절하다.
嘈嘈切切錯雜彈(조조절절착잡탄): 급하고 혹은 간절하게 타는 가락은
大珠小珠落玉盤(대주소주락옥반): 큰 구슬 작은 구슬이 옥쟁반에 떨어지는 소리
閑關鶯語花底滑(한관앵어화저활): 다정한 꾀꼬리 노래는 꽃 속에서 노닐고
幽咽泉流水下灘(유열천류수하탄): 흐느끼듯 샘물이 흘러 여울로 떨어진다.
水星冷澁絃凝絶(수성냉삽현응절): 고인 샘이 차갑게 얼 듯 거문고 줄 엉키 듯
凝絶不通聲暫歇(응절불통성잠헐): 엉키고 흐르지 않자 소리도 잠시 들리질 않네.
別有幽愁暗恨生(별유유수암한생): 따로이 깊은 슬픔이 일어 수심찬 한이 흐른다.
此時無聲勝有聲(차시무성승유성): 이 때는 소리 없는 것이 소리 있는 것 보다 좋구나.
銀甁乍破水漿迸(은병사파수장병): 어느새 은병이 깨어지며 물 쏟아지고
鐵騎突出刀鎗鳴(철기돌출도쟁명): 철기가 돌출하여 칼과 창이 부딪는 소리가 나 듯.
曲終抽撥當心畫(곡종추발당심화): 격한 곡이 끝나자 발을 빼고 다시 가슴에 안고 타니
四絃一聲如裂帛(사현일성여열백): 네 줄에서 울리는 소리 마치 비단을 찢는 듯 하는구나.
東船西舫悄無言(동선서방초무언): 동쪽 서쪽 배에서는 사람들 서글퍼져 할 말 모두 잊고
唯見江心秋月白(유견강심추월백): 강물에 뜬 가을달만 처량히 바라본다.
沈吟收撥揷絃中(침음수발삽현중): 격정의 곡을 끝내며 발 사이에 줄 끼우고
整頓衣裳起劍容(정돈의상기검용): 옷을 여미고 일어나 얼굴을 가다듬는 그녀.
自言本是京城女(자언본시경성녀):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본래 장안 여자인데
家在蝦蟇陵下住(가재하마릉하주): 집은 하마릉 아래에 있어 그곳에서 살았다 하네.
十三學得琵琶成(십삼학득비파성): 열 세 살에 비파를 배워 익혔고
名屬敎坊第一部(명속교방제일부): 이름이 교방 제1부에 속해 있었답니다.
曲罷常敎善才服(곡파상교선재복): 곡이 끝나면 항상 명사들도 모두가 감탄하였고
粧成每被秋娘妬(장성매피추낭투): 몸 단장을 끝내면 늘 주위의 질투도 받았습니다.
五陵年少爭纏頭(오릉년소쟁전두): 오릉의 소년들이 앞다투어 선물을 갔다주었고
一曲紅綃不知數(일곡홍초부지수): 한 곡 끝나면 받은 비단 헤아릴 수 없었지요.
鈿頭銀蓖擊節粹(전두은비격절수): 머리에 꽂은 은비녀로 장단 맞추고
血色羅裙飜酒汚(혈색나군번주오): 붉은 색 비단 치마도 술에 얼룩져 있었답니다.
今年觀笑復明年(금년관소부명년): 금년도 기뻐 웃으며 내년에도 이럴거라 믿었지요.
秋月春風等閒度(추월춘풍등한도): 가을 달과 봄바람에 언제나 여유롭게 지냈습니다.
弟走從軍阿姨死(제주종군아이사): 세월 가니 동생은 군대에 가고 양엄마 마저 죽고
暮去朝來顔色故(모거조래안색고): 저녁이 가고 아침도 가니 얼굴빛도 변해가더이다.
門前冷落鞍馬稀(문전냉락안마희): 문 앞은 말 타고 찾는 이 뜸해 쓸쓸하고
老大嫁作商人婦(노대가작상인부): 늙어가자 결국 장사꾼의 아내로 팔려갔지요.
商人重利輕別離(상인중리경별리): 그는 잇속에만 밝고 이별은 가볍게 여기는 자였는데
前月浮梁買茶去(전월부량매다거): 지난 달에 부량으로 차를 사러 떠났습니다.
去來江口守空船(거래강구수공선): 강 어구를 오가며 빈 배를 지키고 있노라면
遶船明月江水寒(요선명월강수한): 뱃전에 달은 밝고 강물은 차갑게만 느껴집니다.
夜深忽夢少年事(야심홀몽소년사): 깊은 밤에 문득 젊은 시절 생각 나서
夢啼粧淚紅闌干(몽제장루홍난간): 꿈속에서 한바탕 울고 나면 화장한 얼굴에 눈물만 흘렀지요.
我聞琵琶已歎息(아문비파이탄식): 내 그대 비파 소릴 듣고 이미 탄식하였거늘
又聞此語重喞喞(우문차어중즐즐): 또 이 말 들으니 더욱 슬퍼지는구려.
同是天涯淪落人(동시천애륜락인): 그대와 나는 똑같이 하늘에서 떨어진 외로운 몸.
相逢何必曾相識(상봉하필증상식): 이렇게 만나는 상봉이 어찌 아는 사이만의 일이랴.
我從去年辭帝京(아종거년사제경): 나도 지난 해에 장안을 떠나와서
謫居臥病瀋陽城(적거와병심양성): 귀양 와 심양에 살고 있는 몸이라오.
瀋陽地僻無音樂(심양지벽무음악): 심양은 궁벽해서 풍류도 없어
終歲不聞絲竹聲(종세불문사죽성): 일 년이 다 가도록 음악소리 한 번 듣지 못했소.
住近湓江地低濕(주근분강지저습): 사는 곳이 분강땅이라 땅이 낮고 습하여
黃蘆苦竹遶宅生(황로고죽요택생): 갈대와 대나무만 집 둘레에 우거져 있소이다.
其間旦暮聞何物(기간단모문하물): 이 속에서 아침 저녁으로 무엇을 듣겠는가.
杜鵑啼血猿哀鳴(두견제혈원애명): 두견새 울음 피를 토하고 원숭이 구슬프게 울어댈 뿐
春江花朝秋月夜(춘강화조추월야): 봄날 강가 꽃 피는 아침 가을 달밤에도
往往取酒還獨傾(왕왕취주환독경): 때때로 혼자 술잔을 기울이며 지낸다오.
豈無山歌與村笛(기무산가여촌적): 어찌 산 노래와 목동의 피리소리 없겠는가마는
嘔啞啁嘶難爲聽(구아조시난위청): 가락이 조잡하여 들어 줄 수가 없었소이다.
今夜聞君琵琶語(금야문군비파어): 오늘 밤 그대의 비파소리 들으니
如聽仙樂耳暫明(여청선악이잠명): 신선의 가락을 듣는 듯 잠시 내 귀가 맑아졌소.
莫辭更坐彈一曲(막사갱좌탄일곡): 사양 말고 다시 앉아 한 곡조 더 타준다면
爲君飜作琵琶行(위군번작비파행): 내 그댈 위해 비파에 대하여 시를 짓겠소이다.
感我此語良久立(감아차어양구립): 내 말에 감복되어 한참을 서 있더니
却坐促絃絃轉急(각좌촉현현전급): 문득 자리 앉아 줄 고르고 급히 비파를 타네.
凄凄不似向前聲(처처불사향전성): 처절함이 전 번 소리와 확연이 달라
滿座聞之皆掩泣(만좌문지개엄읍): 모였던 사람들 모두다 눈을 감고 흐느껴 울었다.
就中泣下誰最多(취중읍하수최다): 그 중에 가장 많이 울고 눈물을 흘린 자는
江州司馬靑衫濕(강주사마청삼습): 청삼을 흠뻑 적신 강주사마였노라.
백거이(白居易)는...
정(情)이 많고 마음이 여리면서도 음악에 조예(造詣)가 깊은
시인(詩人)이기도 했다.
오랜만에 들려오는 한밤의 애끓는 비파음(琵琶音)에 귀가 번쩍 트였고
좌천(左遷) 된 자신의 신세나
팔려온 늙은 기생(妓生)의 처지나,
서로의 안타까운 상련(相憐)에 눈물을 한없이 쏟았던 그다.
음악(音樂)의 대가(大家)와 시문학(詩文學)의 천재(天才)가 우연히 강배애서 만나,
비파성(琵琶聲)를 통해 녹여내는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정감(情感)은
한쌍의 늙은 학(鶴)을 보는 듯 애잔하기까지 하다.
격조(格調)와 품격(品格) 높은 음악과 시(詩)를 통해 어우러지는
서정적(敍情的) 회한(悔恨)은
그 자체가 인생무상(人生無常)을 대변하는 듯 뜨겁게 가슴을 적시며 파고든다.
따라서 비파행(琵琶行)은...
1,200년 가까이 흐른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애틋한 명시(名詩)로 남는
불후(不朽)의 명작(名作)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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