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 고전 명시 감상

별두심언(別杜審言): 두심언을 보내며... 송지문(宋之問) 別杜審言(별두심언): 두심언을 보내며 臥病人事絶(와병인사절): 나는 병석에 누워 일어나지 못 하는데 嗟君萬里行(차군만리행): 그대는 만리 먼 길을 떠나가네. 河橋不相送(하교불상송): 다리까지 나가 전송하지 못 하니 江樹遠含情(강수원함정): 강 언덕 나무숲에 정(情)만 어리는구나. 친구가 먼 길을 떠나간다. 세상이 하 분분하니 지금 헤어지면 언제 다시 만날지 기약도 없다. 마땅히 저 앞 다리까지 배웅하며 술잔을 기울이면서 석별의 정을 나누어야 하건만, 몸에 병이 깊어 배웅을 못 하는 안타까운 처지라오. 강가에 우거진 숲을 바라보며 안타까운 정만 보낸다네... 친구~!. 미안하네, 잘 가시게나... 본 시(詩)에 등장하는 "두심언(杜審言)"은 자(字)가 필간(必簡)이며, 시성(詩聖)으로 추앙받는 "두보(杜甫.. 더보기
등금릉봉황대(登金陵鳳凰臺): 금릉 봉황대에 오르다... 이백(李白) 登金陵鳳凰臺(등금릉봉황대): 금릉 봉황대에 오르다. 鳳凰臺上鳳凰遊(봉황대상봉황유): 봉황대 위에 봉황이 노닐었다더니 鳳去臺空江自流(봉거대공강자류): 봉황은 가고 텅 빈 누대엔 강물만 흐른다. 吳宮花草埋幽徑(오궁화초매유경): 오(吳)나라 궁궐 터엔 화초가 오솔길을 덮었고 晉代衣冠成古丘(진대의관성고구): 진(晉)나라 고관들도 옛 언덕에 묻혔다네. 三山半落靑天外(삼산반락청천외): 삼산은 하늘 위로 반쯤 걸렸고 二水中分白露州(이수중분백로주): 두 줄기 강물은 백로주로 갈라져 흘러가네. 總爲浮雲能蔽日(총위부운능폐일): 뜬 구름은 해를 가리고도 남는데 長安不見使人愁(장안불견사인수): 장안은 보이지 않고 수심만 잠기는구나. "금릉(金陵)"은 오늘날의 "남경(南京)"을 말한다. 남경(南京)은 삼국시대(三國時代) 때는 .. 더보기
진정(進艇): 배를 띄우다... 두보(杜甫) 進艇(진정): 배를 띄우다. 南京久客耕南畝(남경구객경남무): 남경에 오래 머물면서 남쪽 밭을 갈고 北望傷神坐北窓(북망상신좌북창): 북쪽 창에 앉아 북쪽 고향 바라보며 한탄하네. 晝引老妻乘小艇(주인노처승소정): 낮이면 늙은 아내 불러 작은 배 띄우고 晴看稚子沐淸江(청간치자목청강): 날 개이면 어린 아이 맑은 물에서 목욕하는 것 바라본다. 俱飛蛺蝶元相逐(구비협접원상축): 함께 나는 호랑나비 서로 쫓고 쫓으며 竝蔕芙蓉本自雙(병체부용본자쌍): 두 꽃 나란이 핀 연꽃도 본래부터 짝이라네. 茗飮蔗漿携所有(명음자장휴소유): 차와 단물 배 띄울 때 집에서 가지고 나왔는데 瓷罌無謝玉爲缸(자앵무사옥위항): 비록 옹기그릇에 담았지만 옥항아리 안 부럽구나. 시(詩)의 제목(題目)을 우리말로 옴기자면 "뱃놀이"라고 풀이해야 좋.. 더보기
안구사(雁丘詞): 기러기 무덤을 기리다... 원호문(元好問) 원호문(元好問) 1190~1257 금(金)나라 때 시인(詩人)이며, 흔주(忻州) 수용(秀容)이 고향으로, 지금의 산시성(山西省) 흔현(忻縣) 사람이다. 자(字)는 유지(裕之) 호(號)는 유산(遺山)으로 쓴다. 7세 때에 이미 시(詩)를 지을 수 있을 만큼 총명하였으나, 32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진사(進士)에 합격한 것으로 보아 과거(科擧)에는 큰 욕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벼슬은 상서성(尙書省) 좌사원외랑(左司員外郞)을 지냈다. 원호문(元好問)은 금(金)나라가 원(元)나라의 침입으로 망하자 벼슬을 그만두었다. 원(元)나라 조정(朝廷)에서는 그의 재주(才操)를 아까워 하며 여러차레 출사(出仕)를 종용했으나, 끝내 원(元)나라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리고는 책을 쓰는 저작(著作)일을 자신의 마지막.. 더보기
제대유령북역(題大庾嶺北驛): 대유령 북역에서 시를 짓다... 송지문(宋之問) 송지문(宋之問) 656~712 당(唐)나라 때 시인(詩人)이며 자(字)를 연청(延淸)으로 쓴다. 산시성(山西省) 분양(汾陽)이 그의 고향(故鄕)이며 서기 675년 진사(進士)에 급제하였다. 20세의 어린 나이임에도 호남형의 미끈한 얼굴 덕에 측천무후(則天武后)의 눈에 들어 습예관(習藝館)의 상문감승(尙文監丞)으로 스카웃 된 것이 벼슬길의 첫걸음이 될 정도로 일반 관리들 보다 월등히 앞서 나갔다. 그 후 측천무후(測天武后)의 영신(佞臣) 즉 정인(情人)으로 정사(政事)를 농단(壟斷)하던 장역지(張易之)에게 아첨하여 권세(權勢)를 누리자, 참다 못한 원로대신(元老大臣)들의 간언(諫言)으로 지방관(地方官)으로 쫓겨났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황궁(皇宮)으로 불려졌다. 그는 또다시 측천무후(測天武后)의 총애(.. 더보기
여호초상인동간산기경화친고(與浩初上人同看山寄京華親故): 호초 스님과 함께 산을 바라보다가 장안의 친구에게 시를 부치다... 유종원(柳宗元) 당(唐)나라 순종(順宗) 때, 황제(皇帝)를 감싸고 아첨(阿諂)으로 눈을 흐려놓고 권력(權力)을 휘두르며 폭정(暴政)을 일삼던 환관(宦官)들에게 반기(反旗)를 들고 개혁(改革)을 외치며 일어나 환관(宦官)들을 누르고 개혁(改革)을 시행하는 듯 했으나, 결국 그들의 세(勢)에 밀려 실패하고 만다. 주동자(主動者)인 왕숙문(王叔文)은 살해(殺害)당하고, 뜻을 같이 했던 유종원(柳宗元)을 비롯해 유우석(劉禹錫), 한태(韓泰), 한엽(韓曄), 진간(陳諫), 능준(凌准), 정이(程異), 위의집(韋執誼) 등은 간신히 죽음을 면했으나, 벼슬이 강등(降等) 되어 모두가 사마(司馬)라는 직책(職責)을 받고 황궁(皇宮)에서 쫏겨나 머나먼 오지(奧地)로 유뱃길을 떠났다. 이때 쫏겨난 여덜 명을 이름하여 "팔사마(八司馬)"라.. 더보기
유금산사(遊金山寺): 금산사(金山寺)에서 놀다... 소동파(蘇東坡) 금산사(金山寺)에서 놀다.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에 반대하는 상소(上疏)를 올린 소식(蘇軾)은 자신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한직(閑職)을 자청 지방관(地方官)으로 내려가길 원하여 항저우통판(杭州通判)으로 부임하게 된다. 신종(神宗) 4년 서기로 1071년 서른 여섯 살 되던 해 7월에 카이펑(開封)을 떠난 소식(蘇軾)은 항저우(杭州)로 내려가는 길에 동짓달 초순 경 금산사(金山寺)에서 보각(寶覺)과 원통(圓通) 두 승려을 만나 선(禪)에 심취한다. 이때 금산사(金山寺)에서 몇일 쉬면서 이 시(詩)를 썼다고 전한다. 이무렵은 그가 필화사건(筆禍事件)으로 유배(流配)를 떠나기 이전의 일로, 만년(晩年)에 유배(流配)로 황주(黃州), 혜주(惠州), 담주(儋州) 등을 지방관(地方官)으로 떠돌던 시기와.. 더보기
송계주엄대부(送桂州嚴大夫): 계림으로 엄대부를 보내며... 한유(韓愈) 한유(韓愈) 768~824 당(唐)나라를 대표하는 문장가(文章家)이며 정치가(政治家)인 그는 당송8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위대한 석학(碩學)이다. 중국(中國)과 우리나라를 비롯한 일본(日本)에 광범위한 영향을 끼치며 후대(後代) 성리학(性理學)의 원조(元祖)로 불리는 사상가(思想家)이기도 하다. 당시 유학자(儒學者)들은 논어(論語)를 제외한 맹자(孟子), 중용(中庸), 대학(大學), 주역(周易) 등을 소홀히 다뤘으나 한유(韓愈)는 문장(文章)과 시(詩)에서 위의 서적들을 많이 인용 하였다. 따라서 한유(韓愈)을 통해서 사서(四書)라 불리는 유학서(儒學書)들이 일반인들에게 광범위하게 퍼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어려서 일찍 부모를 여의고 고아(孤兒)로 자랐다고 알려진다. 처음 과거(..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