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秦始皇) 그는 누구인가~?.
기원전 259년 전국(戰國) 칠웅(七雄) 중, 가장 강성했던
진(秦)나라의 제 31대 왕(王)이자,
중국 최초의 "황제(皇帝)"입니다.
기원전 259년 조(曹)나라에
인질로 잡혀온 진(秦)나라 공자(公子) 영자초(嬴子楚)와
부인 조희(趙姬)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병마용갱(兵馬俑坑) 검표소*
원래 "조희(趙姬)"는
조(曹)나라 수도 한단(邯鄲)에서 기생이었는데,
조(曹)나라의 거상(巨商) "여불위(呂不韋)"의 눈에 띄어
그의 첩(妾)이 됩니다.
여불위(呂不韋)는
앞날을 예견하는 탁월한 안목(眼目)이 있었으며
상인(商人)이지만,
권력(權力)에 대한 욕심이 매우 큰 자였습니다.
여불위(呂不韋)는 고심 끝에
자신의 첩 조희(趙姬)를 영자초(嬴子楚)에게 바쳤고,
영자초(嬴子楚)는 조희(趙姬)를 아내로 맞이합니다.
이 기록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병마용갱 입장권*
또한 사기(史記) "여불위열전(呂不韋列傳)"에
"원래 조희(趙姬)는
여불위(呂不韋)의 아들을 임신하고 있었으나,
여불위(呂不韋)가 정치적(政治的) 목적(目的)에서 이를 숨겼다" 라는 내용도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여불위열전(呂不韋列傳)의 내용이
사실인지에 대한
역사학자들 간의 논쟁(論爭)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부분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자초(子楚)와 조희(趙姬)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은
줄곧 조(曹)나라에서 자라게 되며
기원전 250년, 영자초(嬴子楚)의 조부(祖父)인
소양왕(昭襄王) 영직(嬴稷)이 "주(周)나라"를 쳐 영토 중
일부분을 차지합니다.
그리고 나서 소양왕(昭襄王)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 영주(嬴柱)가
효문왕(孝文王)으로 즉위합니다.
진(秦)나라가 강성해지자,
자초(子楚)는 처자와 여불위(呂不韋)를 데리고
진(秦)나라로 돌아옵니다.
*1호갱 건물*
효문왕(孝文王)은 축하연에서 술을 너무 과하게 마셨는지
즉위한지 3일만에 사망하고,
친아들이 없던 효문왕의 뒤를 이어
양자인 자초(子楚)가 진(秦)나라 왕으로 즉위하니,
이가 바로 제 30대 장양왕(莊襄王)입니다.
자초(子楚) 즉 장양왕(莊襄王)과 조희(趙姬)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은 이름이 "정(政)"이었으며,
그는 곧 태자(太子)에 책봉되었지만
몸이 좀 허약했다고 합니다.
3년 뒤에 아버지 장양왕(莊襄王)이 죽자,
태자(太子) 정(政)은 13세의 어린 나이로
"진(秦)나라의 제31대 왕(王)"에 등극합니다.
*1호갱 내부 전경*
진(秦)나라 왕에 오른 정(政)은
스스로 정치를 할 수 있는 나이가 못 되었기에,
여불위(呂不韋)가 "상방(相邦)"이 되어
섭정(攝政)으로 국사(國事)를 돌보게 됩니다.
여불위(呂不韋)는
정(政)의 아버지인 자초(子楚)가 장양왕(莊襄王)에 등극하자,
지난날 큰 도움을 준 것에 대한 배려로
승상(丞相)이 되고 문신후(文信侯)에 봉해집니다.
그러던 장양왕(莊襄王)이 죽고 태자 정(政)이
진(秦)나라 왕에 오르자마자,
승상(丞相)보다 높은 "상방(相邦)"이 된 것입니다.
그는 섭정(攝政)을 맡은 직후부터 마음대로
국사(國事)를 휘두릅니다.
한편, 원래 색(色)을 밝혔던 진왕(秦王)의 어머니 조희(趙姬)는
태후(太后)가 되고
"태후(太后)"는 남편 장양왕(莊襄王)이 죽자
여불위(呂不韋)를 계속적으로 유혹했고,
여불위도 원래 자신의 첩(妾)이었던 조태후(曹太后)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다시 만난 그들은
지난날의 은밀한 연정(戀情)을 이어갑니다.
그렇게 한동안 연정(戀情)을 불태우던 여불위(呂不韋)는
진왕(秦王) 정(政)이 점점 자라게 되자,
국모(國母)가 된 태후(太后)와의 불륜(不倫)을 지속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차츰 느끼게 됩니다.
또 한편으로는 나이 든 자신이,
한창 젊은 나이이며
색정(色情)을 유달리 밝히는 조태후(曹太后)의 열정을 감내할 수 없음도
큰 고민거리였습니다.
그리하여 고심을 거듭한 끝에,
자신이 조종할 수 있는
대타(代打)를 물색하게 됩니다.
*발굴작업에 열중인 작업자들*
그러던 중
양물(陽物)이 크고 좀 멍청하다 싶은 "노애(嫪毐)"라는 자를 찾아내,
환관(宦官)으로 변장을 시켜
황궁(皇宮)으로 들여보내
자신을 대신한 태후(太后)의 성적(性的) 노리개로 소개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어린 진왕(秦王) 뒤에서 실권(實權)을 움켜쥐고
진(秦)나라를 좌지우지 합니다.
한편, 조태후(曹太后)는 노애(嫪毐)와 함께
아에 수도 함양(咸陽) 황궁(皇宮)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거처를 옴겨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랑놀음에 정신이 팔려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도 모르고 지냅니다.
그러는 사이 조태후(曹太后)와 노애(嫪毐) 사이에서
2명의 아들이 태어납니다.
노애(嫪毐)는 태후(太后)의 사랑과 총애(寵愛)를 등에 업고
"장신후(長信侯)"로 봉해졌으며
막강한 권세(權勢)까지 얻게 됩니다.
이제는 자신을 태후(太后)에게 소개 시켜 준 여불위(呂不韋)까지도 겁을 내는
막강한 실세(實勢)로 성장했으며
행실(行實)도 점점 대범해집니다.
기원전 238년 진왕(秦王) 정(政)이 성인식(成人式)으로
잠시 함양(咸陽) 황궁(皇宮)을 비운 사이,
태후(太后)와의 밀통(發覺)이
진왕(秦王) 측근들에 발각되자,
노애(嫪毐)는 오히려
진왕(秦王) 정(政)과 상방(相邦) 여불위(呂不韋)를 제거하고
자신이 왕(王)이 되고자 반란을 일으킵니다.
*조각품들을 모아 조립이 완성된 병마용*
이 소식을 전해들은 진왕(秦王)은 진노하여
곧바로 군사(軍事)와 근위병(近衛兵)들을 보내
난(亂)을 진압합니다.
반란의 주범인 노애(嫪毐)를 문무백관(文武百官)들 앞으로 끌어내,
"거열형(車裂刑): 팔, 다리 그리고 머리를
각각 말 5마리가 끄는 마차에 하나씩 매달아 끌게 하여 찢어죽이는 형벌"에 처합니다.
그리고 나서 어머니 조태후(曹太后)와
노애(嫪毐)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들도
"능지처참형(陵遲處斬刑):
살을 도려내고 팔 다리 목 다섯군데를 토막내 죽이는 형벌"을 집행합니다.
뒤이어 어머니를 태후(太后)에서 해임하고
감금시킵니다.
진왕(秦王) 정(政)은
이 사건의 전말(顚末)을 파혜쳐 불륜(不倫)의 근본이었던
여불위(呂不韋)를 상방(相邦) 자리에서 내치고,
자결(自決)을 강요합니다.
*2호갱 내부 모습*
이듬해 여불위(呂不韋)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이때부터 진왕(秦王)은
간섭 없는 친청(親政)을 비로소 시작하며 진(秦)나라를 통치하게 됩니다.
여기서 잠시,
진(秦)나라의 중원(中原) 통일(統一)을 살펴보면,
이미 진왕(秦王) 정(政)이
즉위(卽位) 전인 장양왕(莊襄王)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아버지 장양왕(莊襄王)이 기원전 250년
"주(周)나라"를 정벌(征伐)하였으며,
진왕 정이 즉위한 후,
주변의 여러나라 중 세력(勢力)이 가장 약했던
"소한(小韓)"을 멸망시킵니다.
뒤이어 2년 후 기원전 228년 "조(曹)나라"까지
침략하여 멸망시켜버립니다.
그해 진왕(秦王) 정(政)에게 일생일대(一生一大)의 큰 위기가 닥칩니다.
연(燕)나라의 태자(太子) 단(丹)이
자객(刺客) "형가(荊軻)"를 시켜
잔치에서 진왕(秦王) 정(政)을 죽이려 했으나,
아슬아슬하게 실패하는 위기일발(危機一髮)의 긴박한 상황이 발생합니다.
*흰색줄은 땅속에 병마용이 뭍힌 것이 확인된 지역을
표시한 선이며 발굴은 미지수*
그리고 나서 3년 후인
기원전 225년 "위(魏)나라",
2년 후에는 가장 강헸던 "초(楚)나라"를 함락시키켰으며,
1년 후 "연(燕)나라"와
"제(齊)나라"까지 차례로 쳐서 멸망시킵니다.
마침내 진왕(秦王) 정(政)은
40세의 나이에 중원(中原)의 7개 국(國)을 통일하게 됩니다.
*미 발굴지역을 컴퓨터로 단층 촬영한 것을 보여주는 안내판*
중원(中原)을 통일한 자신감에 한껏 들떠있던 정(政)은,
"진왕(秦王)"이라는 칭호(稱號)가
자신에겐 어울리지 않는다며,
새로운 칭호(稱號)를 찾아보라고 신하들에게 명합니다.
곧이어 승상 "왕관(王綰)"과 "이사(李斯)" 등의 주청(奏請)으로
새로운 칭호를 고르는데...
*3호갱 내부로 중앙의 구멍은
우물을 파다 병마용을 발견했다는 곳*
처음에는 도교(道敎)에 나오는 신비한 칭호인
"태황(太皇)"과 "천황(天皇)"
그리고 "지황(地皇)" 중에서 어느 칭호를 정해야 할지 고민을 합니다.
이사(李斯)와 왕관(王綰) 등은
그 중에서
가장 높은 직위인 "태황(太皇)"의 칭호를 바칩니다.
고심 끝에 진왕(秦王) 정(政)은
"삼황오제(三皇五帝)"에서 "황(皇)"과 "제(帝)"를 따와
이를 합쳐서 "황제(皇帝)"라 칭하기로 하고,
자신은 황제(皇帝)가 처음이니
"시황제(始皇帝)"라 부르라고 명합니다.
또한 그는 자신이 "시황제(始皇帝)"로 시작하며,
자신의 뒤를 잇는 황제들은 "2세, 3세" 등으로 불러
만세(萬歲)까지
진(秦) 제국(帝國)이 지속되기를 바라노라고 선포합니다.
*발굴 병마용 중 가장 완벽하게 보존된 것을 별도로 전시한 모습*
시황제(始皇帝)는 승상 이사(李斯)의 의견에 따라,
제후(諸侯)들에게 봉토을 나누어 주고
다스리게 했던 "봉건제(封建制)"를 없애버립니다.
그리고 황제가 파견한 관리가 지역을 맡아 다스리는 "군현제(郡縣制)"로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합니다.
그는 또 황제(皇帝)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함양궁(咸陽宮)에서
제2궁, 제3궁을 회랑(回廊)으로 연결하는 공사를 지시하여
웅대한 궁전으로 개축합니다.
*엉덩이 부분의 색상이 아직도 남아있슴*
또한, 전국 각지의 농민들을 사역(使役)에 동원하여
폭 50m의 황제(皇帝) 전용 도로를 만들었습니다.
그는 자신를
역사상 어느 누구도 감히 이루지 못한 일을 해낸
천재(天才)라고 스스로 자부하여,
정무(政務)를 직접 챙겼습니다.
따라서 법(法)은 시황제(始皇帝)가 모두 정했으며,
결재(決裁)도 혼자만이 했습니다.
이러다 보니 결재를 기다리는 상소(上疏)가
함양궁(咸陽宮)에
산더미처럼 쌓여갔습니다.
*완벽하게 발굴된 궁사(弓師)의 모습*
상소(上疏)를 저울로 달아,
결재량(決裁量)은 하루에 1석 즉 30kg으로 정해서
그 양만 했다고 합니다.
그는 도량형(度量衡)과
화폐(貨幣), 문자(文字) 등을 통일하여
제국(帝國)을 효율적으로 다스렸으며,
도로를 정비하여 각지의 교통체계(交通體系)를 강화하였습니다.
시황제(始皇帝)는 또 남녁으로
군사(軍師)를 파견하여 4개 군을 신설하였으며,
북방의 흉노족(匈奴族)이 수시로 내려와 중원(中原)을 위협하자,
대장군(大將軍) "몽염(蒙恬)"을 변방(邊方)으로 보내,
흉노(匈奴)를 정벌하고
오늘날의 내몽고(內蒙古)지역 일부를 차지하기도 합니다.
기원전 213년, 시황제 나이 47세 때
함양궁(咸陽宮)에서 황제는 큰 연회를 베품니다.
연회 도중
박사 "순우월(淳于越)"과 복야(僕射) 주청신(周靑臣)이
"봉건제(封建制)"와 "군현제(郡縣制)"를 놓고 언쟁을 벌입니다.
*진시황 마차와 기타 유물들을 따로 전시한 특별관*
그후, 조회(朝會)에서
순우월(淳于越)이 봉건제(封建制)를 부활해야 한다고 다시 주장하자,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승상(丞相) 이사(李斯)는,
"30일 내에 진(秦)나라의 역사(歷史)와 의술(醫術), 농경(農耕) 등에 관한 책 이외의
모든 책들을 태워버려야 한다"며
황제(皇帝)께 주청(奏請)을 올립니다.
*이곳 유믈들은 별도로 세계유산으로 등재 됨*
시황제(始皇帝)는 이를 받아들여 곧바로 실행하라고 명을 내립니다.
그리하여 전국의 모든 서적들은 남김없이 거둬들여
불태워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분서(焚書)"입니다.
기원전 212년,
시황제(始皇帝)는
"지금처럼 권력을 누리며 병들지 않고 오래 사는 방법은 없을까~?" 하고
고민하던 중,
방사(方士)들 중에
후생(侯生)과 노생(盧生)에게
짐을 위한 "불로장생약(不老長生藥)"을 구해오라며 은밀히 명을 내립니다.
이에 그들은 약을 구하기는커녕
시황제(始皇帝)를 비판하며 도망쳐 버립니다.
화가 난 시황제(始皇帝)에게,
조정(朝廷) 안에 도망친 놈들과 같은 수상한 유생(儒生)이 더 있다는
제보(提報)가 들어옵니다.
이를 조사하자,
유생(儒生)들은 모두 자기가 아니라며 잡아뗐으나
시황제(始皇帝)는 이들을 모두 잡아들입니다.
그 수가 460여 명이나 되었는데
그들을 커다란 구덩이를 파 함께 넣고 생매장했으니,
이것이 바로 "갱유(坑儒)"입니다.
따라서 이를 모두 합쳐서
"분서갱유(焚書坑儒)"라 부르게 된 것입니다.
*진시황 영혼이 타는 마차, 발견 당시 모습의 사진*
이와같은 사실에 분개한 맏아들이며 황태자(皇太子)인 "부소(扶蘇)"가
시황제(始皇帝)에게 부당함을 간언(諫言)하였나,
부소(扶蘇)는 오히려
시황제(始皇帝)의 분노를 사
대장군(大將軍) 몽염(蒙恬)이 있는 국경(國境)으로 추방됩니다.
*동마차 발견 당시 상황을 자세히 적어놓은 책(冊)*
시황제(始皇帝)는 북방의 유목민인 흉노(匈奴)의 침입을 염려하여
대장군 몽염(蒙恬)에게
서쪽 임도로부터 동쪽 요동까지
만리(萬里)나 되는 장성(長城)을 잇도록 명합니다.
*완벽하게 복원된 모습*
이 만리장성(萬里長城)에 동원된 인부가
150만여 명이나 되었고,
그 중 일하다 죽은 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라고
여러 역사책은 기술하고 있습니다.
*시황제가 탄 마차를 앞에서 선도하는 마차*
또한, 시황제(始皇帝)는 함양(咸陽) 근교에
호화로운 궁전 "아방궁(阿房宮)"을 짓도록 했으며...
70만 명의 인부를 동원하여
함양(咸陽) 근교의 여산(驪山)에 자신의 능묘(陵墓)를 건설하도록 명을 내립니다.
이런 엄청난 토목공사(土木工事)는,
국가(國家) 재정(財政)을 바닥내고 말았습니다.
*시황제 영혼이 타는 마차, 실물의 1/4 크기로 만들어져 있슴*
시황제는 풍수(風水)에 따라
국토 순행(順行)을 많이 했던 제왕(帝王)입니다.
어느 해 순행 중,
우공갈석(禹貢碣石) 즉 현재의 "낭아산(狼牙山)"에 도착합니다.
기후와 경치가 좋아 그곳에서 수개월 가량을 머물었는데...
어느 날 황제(皇帝)의 꿈에
전설에 나오는 "봉래산(蓬萊山)"을 보게 되었고,
그 봉래산(蓬萊山)에 가면 "불로초(不老草)"가 있다는 꿈을 꿉니다.
황제(皇帝)가 신하들에게 꿈 이야기를 하자,
"서복(徐福)"이라는 방사(方士)가
자신이 불로불사약(不老不死藥)을 반듯이 구해오겠다며 나섭니다.
서복(徐福)이 봉래산(蓬萊山)으로 불로초(不老草)를 구하러 갈 배에는
수많은 보물과 소년, 소녀 3,000명을 태우고 떠났는데...
그후 서복(徐福) 일행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천하(天下)에 부러울 것이 없었던 시황제(始皇帝)는
한가지 풀 수 없는 큰 고민이 바로 죽음이었습니다.
지금 누리고 있는 권세(軍勢)를 오래도록 누리고 싶지만
인생(人生)이 길지 않은지라,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방법은 없을까~?" 하고 늘 고민하게 됩니다.
따라서 먹으면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불로불사약(不老不死藥)을 간절히 원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소문이 퍼져나가자
전국 각지에서 별의 벌 요상한 방사들까지 궁으로 모여듭니다.
그들은 "어디를 가면 불사약(不死藥)을 구할 수 있다던가~",
아니면 자기가 "불로불사(不老不死)의 기도를 올린다"면서
돈을 뜯어가는 자가 부지기 수로 늘어나자,
시황제(始皇帝)는 효험이 없는 자는 사형(死刑)에 처한다는
법률까지 만들기도 했습니다.
시중에는 가짜 불로장생약(不老長生藥)이 넘쳐나게 되었고
그 많은 약 중에 효염이 좋다는 약을 골라
시황제는 오래도록 정성껏 먹었습니다.
아뿔사, 그런데 바로 그 약이
독성(毒性)이 강한 "수은(水銀)"이 들어있는 약이였습니다.
결국 수은(水銀)에
조금씩 조금씩 중독되어
황제(皇帝) 자신의 생명까지 단축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시황제(始皇帝)는 생전에 다른 황제들과는 달리
여성 편력(遍歷)은
그다지 심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나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 등...
역사서(歷史書)에
후궁(後宮)에 관한 직접적인 기록은 없습니다.
다만, 시황제(始皇帝)가 죽은 후 그의 대를 이은 "2세황제(二世皇帝)"가
시황제(始皇帝)의 후궁(後宮)들 중,
자식을 낳지 않은 자는 모두
시황제(始皇帝)를 따라 죽게 하였으며...
그 수가 매우 많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많은 수의
후궁(後宮)을 두었던 것은 사실인 듯 합니다.
그는 재위 기간 중
무려 다섯 차례나 전국 곳곳을 순행하였습니다.
그런 와중에
여러 협객(俠客)들이 그를 시해(弑害)하려고 덤벼들었습니다.
시황제(始皇帝)는 형가(荊軻) 사건(事件) 이후로
순행(順行) 시,
항상 다섯 대의 수레를 군사들이 겹겹이 호위토록 했고
자신은 그 수레 중 하나를 택해 타고 다녔다고 합니다.
이는 자신을 죽이려고 덤벼드는 협객(俠客)이
얼마나 두려웠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시황제(始皇帝)는 기원전 210년
마지막 순행길에 오릅니다.
여기에는 승상(丞相) "이사(李斯)"와
환관(宦官)인 중거부령(中車府令) "조고(趙高)",
그리고 자신의 26번째 아들이자 막내아들인 "호해(胡亥)"가 동행합니다.
*병마용관 출구 부근 가무극 전용극장*
이 내용을...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기록을 보면,
황제(皇帝)는 돌아오는 도중 평원진(平原津)에 이르렀을 무렵
하늘에서 유성(流星)이 떨어졌는데,
그 운석(隕石)에 누군가가 "시황제사이지분(始皇帝死而地分)"
즉, "시황제가 죽고 천하가 갈라진다" 라고 써놓은 것을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에 충격을 받은 시황제(始皇帝)는
병으로 누웠는데,
화가 난 시황제(始皇帝)는
군사들을 동원하여 그 지역의 주민들을 몰살하였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병이 어느정도 호전(好轉)을 보이자
순행을 계속합니다.
사구평대(沙丘平臺) 즉
오늘날의 허베이성(河北省) 핑샹(平鄕) 부근에 이르렀을 때,
병이 매우 위독해졌습니다.
자신의 병이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위독함을 직감한
시황제(始皇帝)는,
조고(趙高)에게 유언장(遺言狀)을 받아 쓰라고 명합니다.
이를 받아 쓴 유언장(遺言狀)과 황제(皇帝)의 옥새(玉璽)를
적장자(嫡長子)인
황태자(皇太子) 부소(扶蘇)에게 전달케 합니다.
덧붙여 부소(扶蘇)에게 명하여
"함양(咸陽)에 와서 자신의 장례(葬禮)를 주관하고
자신의 대를 이어 진(秦)나라를 다스리라"고
유언(遺言)을 남깁니다.
기원전 210년 음력 7월 22일,
진시황제(秦始皇帝) "영정(嬴政)"은 5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이사(李斯)와 조고(趙高), 호해(胡亥)는
시황제(始皇帝)의 죽음을 숨겼으며,
황제(皇帝)의 시신(屍身)이 있는 수레 옆에
절인 생선을 같이 운반하여
시신(屍身)이 썩는 냄새가 들키지 않도록 합니다.
그리고 조고(趙高)는
시황제(始皇帝)의 유서(遺書)를 조작하여,
황태자(皇太子) 부소(扶蘇)와
대장군(大將軍) 몽염(蒙恬)에게 자결을 명합니다.
이에 부소(扶蘇)는 명을 받들어 자결하였으나,
몽염(蒙恬)은
유서(遺書)에 대해 의심을 품어 자결하지 않자,
조고(趙高)는 몽염(蒙恬)을 황궁으로 불러들여 일단 감옥에 가두어 둡니다.
시황제(始皇帝)의 시신(屍身)은
자신이 만든
지하(地下) 궁전(宮殿)인 여산(驪山)에 묻힙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시황제(始皇帝)의 서열 26번째 아들 "호해(胡亥)"가
진제국(秦帝国) 황제(皇帝)에 오르니
그가 진(秦)나라 "2세황제(二世皇帝)"입니다.
원래 2세황제는
대장군(大將軍) 몽염(蒙恬)을 살려주려 했으나...
조고(趙高)의 조작된 말을 듣고는
몽염(蒙恬)과 그의 동생 몽의(蒙毅)를 반역 혐의로 몰아 죽입니다.
그리고 후환(後患)을 두려워 한 그는
그의 가족들에게 삼족(三族)을 멸하는 잔인한 형벌을 내립니다.
*진시황 석상*
이곳 여산(驪山)에는 진시황(秦始皇)의 거대한 석상이
천하를 굽어보며 서 있습니다.
그는 처음으로 중원(中原)을 통일한 군주(君主)이며
황제(皇帝)란 칭호도 처음으로 사용한
제왕(帝王)입니다.
때로는 대범하게... 때로는 잔인하게...
주변국을 정벌하며 위세(威勢)를 떨쳐,
폭군(暴君)이란 꼬리표가 따라다니기도 합니다.
역사상(歷史上) 가장 호화롭다는
아방궁(阿房宮)을 건설하기도 했으며...
불로장생(不老長生)을 꿈꾸며
영원한 황제(皇帝)로 남기를 원하기도 했습니다.
*병마용갱(兵馬俑坑)에서 1.5km 떨어진 곳에 있는 진시황릉(秦始皇陵).
좌측은 매표소, 우측은 릉(陵)*
살아서 안 되면
죽어서라도 영원한 황제로 남길 간절히 바랬던...
어찌보면 참으로 한심하고 바보같은 꿈을 꾸던
제왕(帝王)이었습니다.
*닫힌 문 너머 정면 앞산이 진시황릉*
저승에서 그를 호휘하고 지켜줄 병마용(兵馬俑)들은 아직도 끊임없이
발견되고 있으며,
지하에 묻힌 병마용(兵馬俑)이 확인은 되었지만
발굴을 못한 양이 엄청나게 많다고 합니다.
그것들을 다 발굴을 할지... 아니면 남겨 둘지...
현 정부는 아직 결정을 못했다고 합니다.
나는 그의 무덤인 커다란 산을 바라봅니다...
"저 속에 잠든 시황제(始皇帝)는 생각인들 했을까요~?."
후손들이 자신의 묘(墓)를
야금야금 파헤치며 들여다 보며 돈벌이에 이용되는 것을 말입니다...
사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난날 위대했다고 칭송받는 황제(皇帝)도...
잔인한 폭군(暴君)이라고 욕을 먹는 제왕(帝王)도...
유구한 세월 앞에는 한낱
티끌 같은 존재(存在)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저 앞산이 천하(天下)를 호령하던 진시황(秦始皇)이 영원히 잠든 무덤이랍니다.
현재의 과학기술로는
온전한 형태로 발굴할 수 없기에
후대(後代)에 유물(遺物)로 남긴다고 합니다.
그는 죽어서도 수천 대까지 후손들을 먹여 살리는 소중한 자산(資産)으로 남았습니다.
자그마치 2,200년 전
강력한 카리스마(charisma)를 가진 한 황제(皇帝)의
발자취를 더듬으려고
전 세계에서 수많은 관광객들이 이곳 시안(西安)으로 몰려듭니다.
"그는 지금쯤 깨달았을까요~?."
인생(人生)은 결국 뜬구름 같은 덧 없는 존재(存在)란 것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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