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唐) 현종(玄宗)과 양귀비(楊貴妃)의 로멘스로 뜨거웠던
"화청궁(華淸宮)"
아침부더 늦가을 비가 추적추적 내립니다...
점심을 샤브샤브 즉 중국식 회전 훠궈(火鍋)로 든든히 먹고
화청궁(華淸宮)을 찾아갑니다.
그 옛날 당(唐)나라 현종(玄宗)과 양귀비(楊貴妃)의
로맨스(romance) 현장이 궁금했습니다.
*회전식 훠궈(火鍋)식당*
화청궁(華淸宮)은
샨시성(陝西省) 시안시(西安市)에서 동쪽으로 35km 가량 떨어진
여산(驪山) 아래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北)으로는 고대 주(周)나라 강태공(姜太公)이,
천하(天下)에 야망(野望)을 펼칠 시기를 기다리며
빈 낚싯대를 드리웠다는
위수(渭水)가 도도히 흘러가고 있습니다.
이곳 장안(長安) 즉 시안(西安)은 온천이 드문 지역입니다.
화청지 온천은 지금으로부터 기원전(紀元前) 주(周)나라 때까지
역사가 거슬러 올라갑니다.
주(周)나라 때 이곳에 지었다는 여궁(驪宮)을 시작으로
진(秦)나라를 거쳐
한(漢)나라를 지나 당(唐)나라 때까지,
자그마치 3,000년 간 제왕(帝王)들이 드나들던 유서깊은 온천입니다.
그중 당(唐) 현종(玄宗)이
후궁(後宮) 양귀비(楊貴妃)에게 지어준 "해당탕(海棠湯)"이 유명하며
이때 전성기를 맞았고 "화청지(華淸池)"에서
별궁(別宮)인 "화청궁(華淸宮)"으로 승격이 됩니다.
그러나 현종(玄宗) 말기,
"안사의 난(安史之亂)"이 온 나라를 뒤흔들며 피로 물들이자
호화롭던 화청궁(華淸宮)도 대부분 불타버렸습니다.
훗날 청(淸)나라와 현 중국 정부에서
당시 규모의 30%만 복원했다는 데도
그 규모가 서울의 경복궁(景福宮) 두 배가 넘는 듯 엄청나게 큽니다.
화청궁(華淸宮) 로멘스의 당사자인 "현종(玄宗)"은 누구일까요~?.
그는 본명이 이융기(李隆基)이며
당(唐)나라 제 6대 황제(皇帝)입니다.
2대 황제(皇帝)인 태종(太宗 ) 이세민(李世民) 이후,
당나라의 번영을 이끌었으나,
동시에 쇠퇴기를 맞이한 황제(皇帝)이기도 합니다.
현종(玄宗)은 27세 때 제위에 오른 뒤부터
연호(年號)를 "개원(開元)"으로 정하고
백성들을 위한 위민(爲民) 정치에 본격적으로 몰입합니다.
*화청궁 매표소*
현종을 섬기던 관리 중에는 유능한 재상들이 많았으며,
"짐이 마르더라도 천하와 백성들이 살찌면 아무 여한이 없다."라고
대신들에게 설파하며
백성들을 세세히 살펴 민생(民生) 위주(爲主)의 정치에
전력을 기울입니다.
어느 해 나라에 큰 가뭄이 들자,
황궁의 쌀을 배고픈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는 등,
어진 정치를 행하였고,
환관(宦官)과 인척(姻戚)들을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하여
정치가 문란해질 위험을 미리 막기도 했습니다.
또한 현종은 놀고 먹는 사찰과 승려의 수를 대폭 줄이고,
권력가들을 제압하는 한편,
조정(朝廷)을 정비하고 상벌(賞罰)을 엄정히 집행하여 중종(中宗) 이후 혼란스러웠던
조정(朝廷)을 안정시킵니다.
현종의 훌륭한 정치 덕분에 당나라의 국력은 강성해졌으며,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이 이룩한
태평성세(太平聖歲)에 버금가는 치세(治世)를 이루어
사람들은 현종의 연호(年號)인,
개원(開元)을 따서
"개원의 치(開元之治)"라고 칭송하며 황제(皇帝)를 존경하였습니다.
몇년 간 이러한 태평의 치세(治世)가 계속되자
현종(玄宗)은 느슨하고 거만해져,
자신을 위해 직언(直言)을 하는 올 곧은 대신(大臣)들을
한 명 한 명 내치더니...
결국 자신에게 아첨을 일삼고 순종하는 신하들을 하나 둘 중용하게 됩니다.
또 향락에 물들어
"이원(梨園)"을 세우고 광대들을 키워내기도 합니다.
급기야는 유능한 승상(丞相)
"장구령(張九齡)"을 해임하고 "이임보(李林甫)"를 중용했는데,
이임보(李林甫)는 무능한 자이지만
아첨(阿諂)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 해 현종의 총애(寵愛) 속에 승상(丞相)이 됩니다.
승상에 오른 그는
황제(皇帝)에게 오는 모든 정보를 차단하고 19년간이나
국정(國政)을 전횡(專橫)합니다.
*화청궁 입구 우측벽에 야외 대형 가무극 장한가를 알리는 TV 광고판*
아~! 장한가(長恨歌)~!.
사실 화정궁(華淸宮)을 이야기하려면
반듯이 짚고 가야 할 시(詩)가 한 편 있는데,
바로 당(唐)나라 시인(詩人) "백거이(白居易)"가 쓴
명작 "장한가(長恨歌)"입니다.
장한가(長恨歌)는
위에서 언급한 당(唐)나라 6대 황제 현종(玄宗)과
양귀비(楊貴妃)의 사랑을 소재로 한
120행 840자로 된 장시(長詩)로,
로멘틱하고도 비극적인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을 바탕으로 읊은
백거이(白居易)의 대표적인 서사시(敍事詩)입니다.
백거이는 본 시(詩)에서
한(漢)나라를 빌어 와 당(唐)나라을 읊었는데,
이는 자신이 당나라의 녹봉(祿俸)을 먹는 관리로서,
차마 자신의 조국(祖國)을 대놓고
작품으로 쓸 수가 없었기에 한(漢)나라를 빌어다가 끼워넣었습니다.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의 명시 장한가(長恨歌)*
이와같은 기법(技法)은 당(唐)나라 시(詩)들에 가끔 등장하며
일반적인 관행(慣行)이기도 했습니다.
본 블로그에
지난날 백거이(白居易)의 "장한가(長恨歌)"와
서정시(抒情詩)의 백미(白眉)로 손꼽히는 "비파행(琵琶行)"을 소개하며
밝힌 적도 있습니다.
장한가(長恨歌)는
"긴 탄식의 노래"란 시제(詩題)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애틋하면서도 슬프고 슬프면서도 안타까운 시(詩)이기에,
그동안 여러 편의 가무극(歌舞劇)으로 제작되어
수백년 동안 많은 관객들의 심금(心琴)을 울리며 감동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종(玄宗)과 양귀비(楊貴妃)의 끈끈힌 로멘스는
당나라 국운(國運)이 휘청일 정도로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으며,
백성들에겐 씻을 수 없는
골육상쟁(骨肉相爭)의 아픈 역사이기도 합니다.
이곳 시안(西安)은
역대(歷代) 13왕조(王朝)의 도읍지로 정해졌을 만큼
유서깊은 도시이며,
문화(文化)와 문학(文學)이
크게 융성한 당(唐)나라의 수도(首都)였기에,
나는 한 번은 꼭 와보고 싶었습니다.
진시황(秦始皇)의 유물인
"병마용갱(兵馬俑坑)"과 5악(五岳) 중 한곳인 "화산(華山)"도 올라보고 싶었지만
가장 기대가 컷던 것은,
바로 백거이(白居易) 시(詩)의 배경이 되었던
현종과 양귀비의 로멘스를 그린
대형 노천 가무극 "장한가(長恨歌)"를 꼭 보고싶었기 때문입니다.
*화청궁 못에 설치된 야외 가무극 "장한가(長恨歌)" 특설 무대*
그런데...
여름이 지나고 단풍 든 가을로 접어들자...
야밤에 펼처지는 가무극(歌舞劇)은 중지 된지 이미 오래이고...
가을비 내리는 화청지(華淸池)는
빈 무대설비만 못 속에 잠겨 있네요.
아~~~~!.
*화청궁의 중심 전각인 장생전(長生殿)과 부용호(芙蓉湖)*
화청지(華淸池) 온천의 역사는 매우 깊습니다.
일찌기 기원전(紀元前) 서주(西周) 때
주유왕(周幽王)이 이곳에 려궁(驪宮)을 처음 지었다고 전해지며,
후에 진시황(秦始皇)과
한무제(漢武帝)도 여기에 행궁(行宮)을 건립했다고 합니다.
특히 당(唐) 현종(玄宗)이 건설한 누각(樓閣)이 가장 화려한데,
이때 정식으로 "화청궁(華淸宮)"이라는 이름으로
승격(昇格)이 됩니다.
현재 화청궁에는
현종(玄宗)과 양귀비(楊貴妃)가 온천을 즐겼던
전용 목욕탕을 비롯하여
문물(文物) 진열실(展示室) 등을 일반에 공개하고 있습니다.
화청지(華淸池) 온천의 수질(水質)은 아직도 깨끗하며
현재까지도
수온(水溫)은 항상 섭씨 43℃를 유지한다네요.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은 대부분 양귀비(楊貴妃)를 보려고 옵니다.
원래 양귀비(楊貴妃)는
현종(玄宗)의 18번 째 아들
수왕(壽王)인 "이모(李瑁)"의 부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이모(李瑁)와 5년 동안
아무 탈없이 달콤한 신혼생활을 즐기며 행복하게 황궁에서 살았습니다.
서기 737년 현종(玄宗)은
자신이 가장 총애하던 "무혜비(武惠妃)"가 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뜨자,
시름에 방황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한 여자를 본 순간
첫눈에 반해버려 이때부터 만사(萬事)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고 합니다.
고심 끝에 환관(宦官) 고력사(高力士)를 시켜
은밀히 그녀를 데려오게 합니다.
그녀가 바로 수왕(壽王)의 비(妃) 양옥환(楊玉環)입니다.
양옥환(楊玉環)은 현종(玄宗)의 며느리였는데,
그녀의 미모에 반한 현종(玄宗)이
자신의 18번 째 아들인 이모(李瑁)에게서 가로챈 것이지요.
우리나라 고려시대(高麗時代)에도 이와 유사한 경우가 궁궐에서
있었습니다만,
당 고종(高宗)과 측천무후(測天武后)도
미모(美貌)에 빠진 경우로 이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후 현종(玄宗)의 나이 61세 때에
27세인 양옥환(楊玉環)을 "귀비(貴妃)"로 책봉합니다.
귀비(貴妃)는 황후(皇后) 다음 가는 자리였는데,
당시 황후(皇后)가 죽고 없던 터라
그녀는 황후의 역할을 대신하며 막강한 권한까지 거머쥐게 됩니다.
이 여인이 바로 이곳
화청궁(華淸宮)의 독(毒)을 품은 꽃 "양귀비(楊貴妃)"입니다.
양귀비(楊貴妃)는 자신의 뒷 배경을 튼튼히 하고자,
현종(玄宗)을 설득하여
그의 사촌 오빠인 "양소(楊釗)"를 궁궐로 불러들여 곁에 두었는데,
그는 양귀비의 비호(庇護) 속에
황제(皇帝) 가까이서 비위를 맟추며
권력(權力)을 야금야금 장악해 갑니다.
그리하여 현종으로부터 "국충(國忠)"이란 이름까지 하사 받으며
승승장구(乘勝長驅) 합니다.
국충(國忠)이라는 이름은
나라와 자신에게 충성하라고 황제가 손수 지어준 이름입니다.
양국충(楊國忠)은
양귀비(楊貴妃)가 현종(玄宗)의 엄청난 총애(寵愛)를 받음에 따라,
그의 후광(後光)으로
감찰어사(監察御史) 및 시어사(侍御史)라는 직책까지 오르며
황제(皇帝)를 가까이서 보필하는 영광과
막강한 권력(權力)을 거머쥡니다.
*단품으로 곱게 물든 석류나무*
그는 권력 가까이 있던 환관(宦官) 고역사(高力士)와 결탁하여
환관청치(宦官政治)를 강화하며
40여 개에 이르는 주요 관직(官職)을 겸직해,
그 권세(權勢)가 나라 안팎을 뒤흔들었다고
여러 역사서(歷史書)는 적고 있습니다.
한편 이무렵 양귀비(楊貴妃)는 현종(玄宗)을 설득해
이국적(異國的) 마스크를 가진
돌궐족(突厥族) 출신의 젊은 장수 "안록산(安祿山)"을
측근으로 기용합니다.
안록산(安祿山)은 매우 뚱뚱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아랫배가 무릎까지 처지고
몸 무게가 330근(약 200kg)에 달했다고 합니다.
처음 안록산을 본 황제는 그의 배를 가리키며 묻습니다.
“그대는 뱃속에 무엇이 들어 있기에
그리 뚱뚱한고~?.”
안녹산(安祿山)이 대답합니다.
예, 폐하~!,
오직 폐하에 대한 일편단심(一片丹心)인 충심(忠心)만
가득 들어있을 뿐이옵니다".
이에 현종은 큰 소리로 껄껄 웃으며
매우 기뻐합니다.
안록산(安祿山)은 더 나아가 곁에 앉은 양귀비(楊貴妃)를 보며
양아들이 되고싶다고 간절히 청합니다.
양귀비도 크게 기뻐하며
그를 양아들로 받아들여 총애하였다고 합니다.
일설에는
양귀비가 안록산을 양자(養子)로 맞아들여 아들로 삼았으나,
실재로는 양귀비(楊貴妃)와 은밀한 연인 사이란 소문이
궁궐 안팍에 파다하게 퍼지기도 했습니다.
어쨋거나 양귀비(楊貴妃)의
든든한 후광(後光)을 등에 업은 안록산(安祿山)은
곧바로 평로(平盧)와 범양(范陽) 절도사(節度使)를 겸직하는
무관(武官)에 임명 됩니다.
천하(天下)에 두려울 게 없는
권세(權勢)와 호사(豪奢)를 누리며
20만 명의 병사(兵士)들을 이끄는 병권(兵權)까지
거머쥐게 됐다 이말입니다.
내치(內治)는 양국충(楊國忠)이 전담하고,
외치(外治)는 안록산(安祿山)에게 맡기다시피한 현종은
대신들의 충언(忠言)에 귀를 닫아버리고 향락(享樂)에 취해
세월이 가는 줄도 모르고 지냅니다.
*양귀비(楊貴妃) 석상*
이러한 날들이 계속되자,
나라 안팍에서 크고 작은 변란(變亂)과 반란(反亂)이 일어나고,
나라를 걱정하는 선비들의 상소문(上疏文)이 빗발치며
백성들의 원성(怨聲)이 하늘을 찌릅니다.
안록산(安祿山)은 드디어 기회가 왔슴을 직감합니다.
그러잖아도 황제(皇帝) 곁에서 아부만 일삼는 양국충(楊國忠)이
항상 눈에 가시였고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었는데,
하늘이 내린 둘도 없는 이런 기회를 절대로 놓칠 수 없었습니다.
양국충(楊國忠)을 제거할
절호의 호기(好機)로 본 안록산은,
호족(豪族)이며 그의 측근인 "사사명(史思明)"과 모의하여
"간신(奸臣)들을 제거하고 어지러운 천하(天下)를 바로 잡는다"는
명분(名分)을 내세우며,
자신을 총애하던 양귀비(楊貴妃)와 현종(玄宗)을 배반하고
반란(反亂)을 일으킵니다.
이것이 "안록산(安祿山)의 난(亂)" 이른바 "안사의 난(安史之亂)" 입니다.
서기 755년 12월에 일어난 안사의 난(安史之亂)은
그야말로 당(唐)나라의 국운(國運)이 휘청이는 엄청난 혼난(混亂)이었습니다.
안록산(安綠山)은 한 달도 안 돼 낙양(洛陽)을 점령하고,
이듬해 정월에는 파죽지세(破竹之勢)로 장안(長安)을 향해
황궁(皇宮)으로 밀고 들어옵니다.
그는 용상(龍床)에 앉아 황제(皇帝)를 자처하고
수많은 백성들과 고관대작(高官大爵)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며
무서운 기세(氣勢)을 떨쳐,
황궁(皇宮)은 순식간에 쑥대밭이 됩니다.
*정면의 전각 중 오른쪽이 현종 황제 전용 목욕탕이고
왼쪽이 양귀비 전용 목욕탕으로
당 현종이 양귀비에게 지어준 목욕탕*
겁에 질린 현종(玄宗)은
양귀비(楊貴妃)를 앞세우고 양국충(楊國忠), 고역사(高力士)와 함께
그녀의 고향인 사천(四川) 즉
옛 촉(蜀) 땅으로 황급히 도망을 칩니다.
*이곳은 역대 제왕들이 목욕했던 곳으로
당 태종 이세민을 비롯하여
전대(前代)의 황제와 제왕들이 이용했던 탕이며 역사가 제일 깊다*
샨시성(陝西省) 마외(馬嵬)에 이르렀을 무렵,
전란(戰亂)의 원흉(元兇)으로 지목된 양국충(楊國忠)을 증오하던
근위대장(近衛大将) 진현례(陳玄禮)와 병사들은,
황제를 호휘하며 가던 길을 멈추고
황제(皇帝)에게 다가와 길을 막고서는
"도적(盜賊)의 근본인 양귀비(楊貴妃)와 양국충(楊國忠)을 죽이라"고 요구합니다.
*오른쪽 하단 4각형 틀이 온천물 저장고*
황제(皇帝)가 말하길...
“양귀비(楊貴妃)는 심궁(深宮)에 있던 몸이고,
양국충(楊國忠)은 모반(謀反)과 무관하다” 라고 옹호했지만,
병사들은
양국충(楊國忠)과 그의 부인들을 마차에서 끌어내어 처형해버립니다.
*당 현종 전용 목욕탕*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떨고 있던 현종(玄宗)은,
환관(宦官) 고력사(高力士)의
진언(眞言)에 따라
양귀비(楊貴妃)에게 어쩔 수 없이 자살(自殺)을 명합니다.
*가로로 6개 구명 뚫힌 것은 발 뒷금치를 넣고 비벼
각질을 제거하던 곳*
고력사(高力士)의 도움으로 양귀비(楊貴妃)는
길가 나무에 목을 맵니다.
*역대 황제들의 전용 탕으로 벽돌 바닥 밑에 또 한겹이 있다.
이것은 지난 기원전 제왕들이 만들었던 탕의 흔적*
이 사건을 두고,
고역사가 양귀비를 몰래 빼돌려 일본(日本)으로 보내고
대신 궁녀(宮女)을 죽였다고 기록한 책도 있습니다만,
이는 매우 궁색한 낭설(浪說)에 불과하며
당시의 정황으로 볼 때 절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7년의 세월이 흘러
안사의 난이 가까스로 진압되고 나서,
황궁으로 돌아온 현종은 이미 황제(皇帝) 자리를 큰아들 숙종(肅宗)에게
이양한 뒤라
먼 산만 바라보며 세월만 보내게 됩니다.
그는 다른 여자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양귀비(楊貴妃)를 눈물로 그리며
6년을 더 살다가 77세로 세상을 떠납니다.
역사서(歷史書)는
서기 755년 12월 16일부터 763년 2월 17일까지
7년 2개월 동안 당(唐)나라를 휩쓴
"안사의 난(安史之亂)" 때에
35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고 적고 있으니...
백성들의 고통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태자들은 노천탕을 이용함*
자~!,
이제부터 양귀비(楊貴妃)가 어떤 여인인지
잠시 알아보고자 합니다.
그녀는 옛 촉주(蜀州)
사천성(四川城) 두장옌(都江堰) 즉 도강언 출신으로
본명(本名)은 "양옥환(楊玉環)"입니다.
*이것이 양귀비 전용 목욕탕이다.
현종이 목욕하고 난 물을 흐려보낸 물로 목욕을 했다고 함*
그녀의 고조부(高祖父) 양왕(楊汪)은
수 양제(隋 煬帝) 양광(楊廣)이 통치하던 시대에 중신(重臣)이었으며
아버지 양현염(楊玄琰)은
촉주(蜀州)에서 호구(戶口)를 조사하는 관리였다고 합니다.
*황제들은 기(氣)가 빠진다고 여겨
절대로 비(妃)와 함께 목욕을 하지 않음*
그의 슬하에는 아들이 없이 딸만 셋을 두었는데,
양옥환(楊玉環)이 막내였고 2명은 언니였으며
셋 모두 미색(美色)이 뛰어났다고 전합니다.
*이곳은 승상을 비롯한 공신들의 목욕탕.
나라에 공을 세운 공적의 비중에 따라 순서에 입각하여 입장할 수 있었으며,
아직도 온천물이 고여 있음*
그런던 차에 아버지가 병으로 일찍 세상을 뜨자,
어린 자매들은 낙양(洛陽)에서 하급관리였던
작은아버지 양현교(楊玄璬) 슬하에서 자라게 됩니다.
*황제 전용 목욕탕*
숙부(叔父)는 가정교육에 엄격하여
조카들에게 사서삼경(四書三經)을 가르치고
많은 시문(詩文)을 외우게 했는데,
총명했던 양옥환(楊玉環)은
숙부 집에 있던 기생 출신 하녀에게서 호선무(胡旋舞)를 몰래 배웠다고 합니다.
그녀는 당시 감찰어사(監察御史)로 있던 친척 양신명(楊愼名)이
여는 연회(宴會)에 가끔 불려다녔는데,
이 자리에 참석했던 현종(玄宗)의 18번째 황자(皇子)인 "이모(李瑁)"의 눈에 뛰어
그의 비(妃)가 됩니다.
그녀는 수왕(壽王) 이모(李瑁)와 5년 동안 아무 탈 없이
달콤한 신혼생활을 즐기며 살았습니다.
*양귀비 전용 탕에 늘 관광객들로 북적임*
그런데 현종(玄宗)이 총애하던 "무혜비(武惠妃)"가 갑자기 병으로 죽는 일이 발생하자
현종(玄宗)은 허전한 마음을 달래려고
맘에 드는 미녀(美女)를 찾다가
그만 아들의 비(妃)인 양옥환(楊玉環)의 자태를 우연히 보고서는
첫눈에 반해버립니다.
그 날 이후로 현종은
무혜비(武惠妃)를 닮은 미모(美貌) 뿐만 아니라 시(詩)와 가무(歌舞)까지 능하다는
양옥환(楊玉環)에게 관심이 쏠리자,
환관(宦官) 고력사(高力士)를 불러 은밀히 상의합니다.
*온천물이 모이는 첫 탕*
고력사(高力士)는 양옥환(楊玉環)을 만나
황제의 의중을 암시했고,
현종은 양옥환을 화산(華山)의 도사(道士)로 출가시켜 아들인 이모(美貌)에게서 떼어놓고,
궁내(宮內)에 도교 사원인 태진궁(太眞宮)을 급히 짓습니다.
그리고는 양옥환(楊玉環)을
이곳을 관리하는 여관(女冠)으로 다시 불러들이게 됩니다.
이때 양옥환(楊玉環)은 22세였고
현종(玄宗)은 57세였습니다.
*첫탕 내부 모습*
5년 후 양옥환(楊玉環)이 27세 되던 해
현종은 그녀를 자신의 비(妃)로 맞아들여 "귀비(貴妃)"가 되면서
두 사람은 질펀한 사랑의 늪으로 점점 빠져듭니다.
*수천 년이 흘렀지만 온천물이 아직도 솟음*
그리고 나서 얼마 후
현종은 양귀비(楊貴妃)의 두 언니까지 자신의 비(妃) 맞아들여
3자매 모두를 자신의 비(妃)로 만들어버립니다.
여기서 "귀비(貴妃)"란...
황제(皇帝)의 삼천 명에 달했다는 많은 비(妃) 중
한 명이지만,
황후(皇后) 다음가는
넘버 2의 위치로
엄청난 위세(威勢)를 떨치는 막강한 자리에 해당 됩니다.
*온천물이 땅속에서 솟는 원 샘*
때 마침 황후(皇后)가 죽고 없자,
양귀비(楊貴妃)는 자연스럽게 황후의 자리를 대신하며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그녀는 어린시절부터 총명하고 비파(琵琶)를 비롯한
악기와 가무(歌舞)에도 능하며
애교(愛嬌)와 교태(嬌態)를 타고났고,
살결은 백옥(白玉) 같이 희었다고 문헌은 침이 마르도록
추켜세웁니다.
*목욕을 하고난 양귀비가 머릿결을 말렸다는
그녀의 전용 정자*
그런데 옥(玉)에 티라고 할까~?.
아니면 또 다른 매력이라고나 할까~?.
그녀는 겨드랑이에서 야릇한 냄새가 풍겼다고 하는데...
그래서 현종(玄宗)이 더더욱 총애를 했는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양귀비는
다른 여러 비(妃)들보다 유달리 목욕을 좋아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온천물이 솟는 원샘 입구*
양귀비(楊貴妃)는
요즘으로 치자면 부잣집 맏며느리감으로 불리는
볼륨께나 있는 약간 뚱뚱하고 풍만한 글래머형의 체형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 역사서(歷史書)를 종합하여 그녀의 체형을 유추해 보면
키는 155cm 정도 이고,
체중은 65kg 가량 나가는 건강한 체형임에
양귀비(楊貴妃)를 연구한 학자들은 대체적으로 수긍하고 있습니다.
여러 글에서도 양귀비(楊貴妃)를
"자질풍염(資質豊艶): 풍만하고 요염하다" 라고 표현한 걸 보면,
그녀의 자태(姿態)를 대략 짐작할 수 있으며
당시의 미인(美人) 기준으로 볼 때 감히 따라 올 자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온천물 저장고, 김이 모락모락 올라옴.*
양귀비(楊貴妃)에 관해선 후대로 내려오며
여러 문헌(文獻)에 등장하는데
아마도 많은 부분이 사실보다 부풀려지고 과장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아무튼 이런 경우를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 했던가요~?.
얼마나 미모가 뛰어나길레 황제의 정신마저 홀려버려
나라를 기울게 했단말입니까~!.
*양귀비는 글레머형의 풍만한 여인*
역대(歷代) 나라가 기울 정도로 뛰어난 미색(美色)이 출중한 미인이
중국에는 여려 명 있었는데,
그 중 4명만 꼽아보면...
첫째, "서시(西施)"로...
그녀는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월(越)나라의 미녀로,
오(吳)나라 왕 부차(夫差)에게 선물로 보내진 여인입니다.
오나라가 월나라에 패망(敗亡)하게 하는데 크게 일조했다고 합니다만,
그녀의 말로(末路)는 여러 설들이 분분하여
정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
둘때로, "왕소군(王昭君)"...
전한(前漢)의 9대 황제인 선제(宣帝) 때 궁녀였는데,
훈족의 군주(君主)인 호한야 선우(呼韓耶 單于)에게
평화의 선물로 보내진 여인이며
선제(宣帝)도 그녀의 미모에 반해 매우 아까워 했다고 합니다.
*앞 4각형 탕이 태자들 탕이고
뒤의 자측은 현종 전용 탕 그리고 오른쪽은 양귀비 전용 탕*
셋째로, "초선(貂嬋)"...
삼국시대(三國時代) 동탁(董卓)을 제거하기 위해 왕윤(王允)이 자신의
의붓 딸이었던 초선(貂蟬)을
"연환계(連環計)"로 이용한 불운의 여인입니다.
결국 동탁(董卓)을 제거하는데 성공했고, 동탁을 죽인 여포(呂布)의 부인으로 살았으며
조조(曹魏)가 매우 탐을 냈던 여인이도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위에 소개한 양귀비(楊貴妃)를 꼽습니다.
화청궁(華淸宮)에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립니다...
때 마침 노오랗게 물들은 석류나무 고목(古木)이 빗속에 고혹적(蠱惑的)인 빛을 발합니다.
석류는 지난날 양귀비가(楊貴妃) 즐겨 먹었다는 과일입니다.
양귀비(楊貴妃)는 오래전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없는데...
나는 그녀의 간드러진 교성(嬌聲)의 환청(幻聽)에 사로잡혀,
차가운 빗속에서
지난 영화(榮華)의 흔적들을 더듬으며
매혹적인 석상 주변을 서성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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