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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성황각(城隍閣)에서 보는 항저우(杭州)

오산(吳山) 성황각(城隍閣)에 올라

남송(南宋)을 생각하.


저장성(浙江省)의 성도(省都) 항저우(杭州) 시내에 있는

오산(吳山)은,

우리가 삼국지(三國志)로 잘 알려진 오(吳)나라 손권(孫權)이
이곳에 진(陣)을 쳤던 곳으로 알려지면서

"오산(吳山)"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 일대가 모두 오(吳)나라 영토였다.

 

당시 오(吳)나라는 건업(建業) 즉

오늘날의 난징(南京)에 도읍(都邑)을 두고 있었으며,
양자강(長江)을 중심으로 북으로는 쑤저우(蘇州)와

남으로는
항저우(杭州) 및 샤오싱(紹興) 일대가 전부 오(吳)나라 땅이었다.

 

"오산대관(吳山大觀)"이라...!
글자대로 풀어보면

"여기는 오(吳)나라 산이니 눈을 크게 뜨고 보라" 이런 말이고,
글자에 담긴 진짜 속 뜻은,
"여기는 오(吳)나라 땅이니 까불면 혼난다" 이런 내용이 숨어있다.
천하(天下)의 패권(覇權)을 놓고 다투던

촉한(蜀漢)의 유비(劉備)나,
위(魏)의 조조(曹魏)가 봤더라면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궁금하다,

 

오산(吳山)은 전체가 유적지 겸 공원이다.

 

천천히 걸어도

10분이면 오산(吳山) 정상에 도착한다.

 

성황각(城隍閣)으로 오르는 길에는

오래된 녹나무 거목들이 많아

풍치(風致)가 매우 아름답다.

 

오산천풍(吳山天風) 비각.

오산(吳山)의 시원한 바람은

하늘에서 내리는 바람이라 하여 지금도 최고로 여긴다.

 

성황각(城隍閣) 옆에는

명(明)나라 때 관리였던 주신(周新)을 모신 사당(祠堂)

"성황묘(城隍廟)"가 있다.

 

"주신(周新)"
명(明)나라 3대 황제(黃帝)인 성조(成祖) 때 사람으로,
절강(浙江) 지역의 안찰사(按察使)를 지냈으며

매우 청렴(淸廉)한 관리(官理)였다고 전한다.

 

"냉면한철(冷面寒鐵)"

"낯빛이 싸늘하기가 차가운 쇠붙이 같다"라는 뜻으로 쓰이는

이 말은, "청렴하고 강직하여

사욕(私慾)을 채우거나 권세(權勢)에 굴복하지 않는사람"을 일컷는 말이다.
이 고사(故事)의 주인공이 바로
청백리(淸白吏)로 이름 높은

중국(中國) 명(明)나라 때 관리(官理)였던 "주신(周新)"이다.

 

그는 감찰어사(監察御史:왕명에 의해 벼슬아치들을 감찰하는 관리)로 있을 때,
황제(皇帝)의 친인척이라 할지라도

봐주는 일 없이 공평한 잣대를 들이대며

직언(直言)과 탄핵(彈劾)을 서슴지 않았던

대쪽 같은 사람이었다.
따라서 "냉면한철(冷面寒鐵)"이라는 고사(故事)는

그로 인해서 생겨 난 말이다.

 

어느 해 주신(周新)이

저장성(浙江省)에 안찰사(按察使)로

파견 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억울한 옥살이를 하던 백성들이
“냉면한철공(冷面寒鐵公)이 오시니 우리는 이제 살았다"

만세를 부르며 좋아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주신(周新)은

백성들의 시시비비(是是非非)를 세세히 가려

이들의 억울함을 즉시 해결함과 동시에
백성들을 탄압한 관리(官理)를 엄벌에 처했다.


이때부터 저장성(浙江省) 백성들이 그를 더욱 신망(信望)하며

존경심(尊敬心)을 키우자,

이를 시기하던 황제(皇帝) 성조(成祖)는

뇌물(賂物)을 착복했다는 누명을 씌워

주신(周新)을 처형 한다.


이런 사실을 뒤늦게 안 이곳 백성들이

나라를 뒤엎을 기세로 들고 일어났다.

 

이에 겁을 먹은 성조(成祖)는
백성들의 원성(怨聲)을 잠재우기 위해,

부랴부랴 "성황(城隍)"이라는 시호(諡號)를

주신(周新)에게 내렸다.


그리고는 항저우(杭州)가 내려다보이는

이곳 오산(吳山)의 명당(明堂)에
주신(周新)의 사당(祠堂)과
휘황찬란한 누각(樓閣)까지 지어 성황각(
城隍閣)이라 이름하고

해마다 그의 넋을 기리는

제사까지 지내주었다고 한다.

 

이 성황각(城隍閣)은

그렇게 해서 지어진 건물이다.

남송(南宋)과 원대(元代)의 건축 양식을 본떠 만든

7층짜리 누각(樓閣)으로,
높이가 약 40m 이며 외부는 7층이지만 내부는 4층이다.

 

우한(武漢)의 "황학루(黃鶴樓)",

난창(南昌)의 "등왕각(滕王閣)",

웨이양(岳陽)의 "악양루(岳陽樓)"와 함께,
강남(江南) 4대 누각(樓閣)으로 손꼽히는 

그야말로 콧대 높은 건물이다.

 

이 성황각(城隍閣)은 오랜 세월 풍상(風霜)을 겪으며

비바람과 낙뢰(落雷)로 쓰러지고 무너지기를 반복했는데,
근대(近代)에 이르러 외곽은
옛 모습대로 복원하고
내부는 현대식으로 개조하였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를 설치하여

꼭대기 층까지 쉽게 오르내릴 수 있도록 했다.

 

누각(樓閣) 내부에는
"남송항성풍정도(南宋杭城風情圖)"라 하여
남송(南宋)의 도읍이었던 당시 항저우(杭州) 시내의 모습을 재현한
초대형 조각 작품이 벽면을 따라 전시 되어 있는데...
마치 실물을 보는 듯한 정교하고 방대한 크기에 
놀라움과 감탄을 자아낸다.

 

지난날 항저우시(杭州市)

공예연구소 직원을 비롯한 대학생 등 연인원 1만여 명이 투입되어
2년 동안 3억 원의 제작비를 들여 만든 작품으로,


길이가 30m가 조금 넘고 높이는 3.6m 규모로
1,000여 채의 가옥과 3,000여 명이 넘는 인물들
표정까지 세밀하게 조각하여

남송(南宋)의 생활 풍속과 서호(西湖)의 전설을 표현한

대작(大作)이 전시되어 있다.

 

송성풍정도(宋城風情圖) 일부를 사진으로 담아 보았다.


항저우(杭州)는

저장성(浙江省)의 성도(省都)이며

인구는 약 900만 명이 살아가는 대도시이다.
상하이(上海)에서 남쪽으로 약 200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도시의 역사(歷史)는 아주 길다.
대략 2,200년 전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진(秦)나라 때에

이미 도시 형태를 갖추었다고 하며

중국이 자랑하는 7대 고도(古都) 중 한곳로 불린다.

 

항저우(杭州)가 비약적인 발전을 겁듭할 수 있었던

토대(土臺)를 쌓은 건

수(隋)나라 때로,
수양제(隋煬帝)가 건설한 "경항대운하(京杭大運河)"

완성된 직후부터 이다.


강남(江南)의 풍부한 물산(物産)을

베이징(北京)까지 실어 날으기 위해 건설된 운하(運河)는
많은 물동량의 이동과 함께

인적(人的) 자원(資源)이 더해지면서
대도시로 급속한 성장을 하게 된다.

 

항저우(杭州)와 쑤저우(蘇州)를 일컬어

"상유천당 하유소항(上有天堂 下有蘇杭)"이라 하여
"하늘에는 천당(天堂)이 있고,

땅에는 쑤저우(蘇州)와 항저우(杭州)가 있다"는 말이
이곳을 대표하는 말이 될 정도로...
중국인들이 가장 살고싶어 하는 도시가 바로

항주(杭州)와 소주(蘇州)라고 한다.

 

특히 강남(江南)의 실크 산업(silk 産業) 발달은

서역(西域)에서 중국(中國)으로 이어진
육상 교역로인 실크로드(Silk Road)의 개통과 함께

무역을 통한 부(富)의 축척으로 이어지며
큰 부자들이 생겨났다.


따라서 부자들이 남긴 차원 높은 문화유산(文化遺産)은

오늘날 항저우(杭州)가 관광지로 거듭 나는데

큰 밑거름이 되었다.

 

또한 온유한 기후화 양질의 풍토(風土)는

세계적으로 이름 난
녹차(綠茶)의 산지(産地)로 알맞아

녹차(綠茶) 중 최고의 품질로 인정 받는 "용정차(龍井茶)"

산지로도 유명하다.

 

그리고 항저우는(杭州) 미인들이 많기로 유명하여,
황실(皇室) 인력의 70%가

항저우(杭州)와 쑤저우(蘇州)에서 선발된 여인들로 채워졌다고 하니...
가히 지상(地上) 낙원(樂園)으로 불릴만 하다.

 

항저우(杭州)가 문화적(文化的)으로 가장 번성했던 시절은
뭐니뭐니 해도 남송(南宋) 때였다.
이때 인구가 100만 명을 이미 넘어섰다고 하며
지금도 남송(南宋)에 대한 향수(鄕愁)는 깊어

항저우 문화를 대표하는 정신적(精神的) 지주(支柱) 역활을 한다.

 

당(唐)나라가 국운(國運)이 다해가는 혼란기에
후주(後周)의 장수(將帥) 조광윤(趙匡胤)이

당나라를 평정하고 세운 나라가 송(宋)나라이다.


카이펑(開封)을 도읍로 정했으나

12세기 초반에 여진족(女眞族)이 세운 금(金)나라의 남침으로

수도가 함락되자 황족(皇族) 중 일부가

양쯔강(長江)을 건너와 당시 이곳 지명인 임안(臨安)에
송(宋)나라를 다시 세웠다.

 

이것을 두고 역사학자들은

카이펑(開封) 즉 개봉에 도읍(都邑)을 세운 송(宋)나라를

"북송(北宋)"이라 칭하고,


임안(臨安) 즉 오늘날의 항저우(杭州)에

수도를 정한 송(宋)나라를

"남송(南宋)"으로 나누에 부르게 된 것이다.


남송(南宋)은 결국

몽골족이 세운 원(元)나라의 침입으로 역사(歷史)에서 사라진다.

 

그 후 실크로드를 통한 무역의 발달은

바다를 통한 무역으로 이어지며

급속하게 서양인들을 불러들였다.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의 작가로 잘 알려진

이탈리아 베니스 출신의 "마로코 폴로(Marco Polo)"

때 온 상인(商人)이었다.

 

그의 중국 여행기인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이 출판되면서

엄청난 센세이션(sensation)을 일으켰는데,
신비(神祕)의 땅으로만 여겨지던

중국 특히 항저우(杭州)가

유럽에 본격적으로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부터 유럽인들이 앞다투어 중국으로 몰려들었으며
비단(緋緞)과 도자기(陶磁器)에 반해버린 그들은

엄청난 금과 은을 들고와

신비한 물건들을 닥치는 데로 실어갔다.

 

남송(南宋)의 정치적(政治的) 사상(思想)으로는
"불교사상(佛敎思想)"을 이념(理念)으로 택했던
당(唐)나라와는 달리,
공자(孔子)의 "유가사상(儒家思想)"

정치적(政治的) 이념(理念)으로 삼았다.

 

유가사상(儒家思想)

남송(南宋)의 대표적 유학자(儒學者)인

주희(朱熹) "주자(朱子)"에 의해 폭 넓게 재 편성되어,

"성리학(性理學)"으로 발전하여
학문(學文)과 문화(文化)가 비약적(飛躍的)인 발전을 거듭하는

장을 열어 주었다.

 

그 후 태평천국의 난(太平天國之亂)으로
문화유산(文化遺産)이

대부분 파괴 되는 아품도 겪었지만,
폭 넓은 문학(文學)과 다양한 문화(文化)의 발달은

수많은 철학자(哲學者)와 정치인(政治人)

그리고 문인(文人)들을 키워내는 토양이 되었다.


이와 같은 밑거름은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로 이름 높은
소식(蘇軾) 즉 소동파(蘇東坡) 같은 대문호(大文豪)를 배출하기도 했다.

 

명(明)나라 초기에 살았던 소설가(小說家) 시내암(施耐庵)이 쓴 작품(作品)

"수호전(水滸傳)"과,
소소생(笑笑生)의 작품으로 알려진 "금병매(金甁梅)"
송(宋)나라를 배경으로 쓴 기서(奇書)로,
당시 흥청이던 사화상(社會相)이 잘 반영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깊은 역사 만큼이나
수준 높은 문화(文化)를 자랑하는 항저우(杭州)는
화려한 강남 (江南) 문화(文化)의 중심지로 명성(名聲)을 날리며
사시사철 국내외 관광객들로 넘쳐난다.

 

성황각(城隍閣)에서 바라보는

서호(西湖)의 모습은 언제나 아름답다.

 

항저우(杭州) 시내를 조망하려면

오산(吳山)의 성황각(城隍閣) 만큼 탁 트인 곳은 없다.

산이라고 해봐야 걸어서 10분이면 정상에 오를 수 있고

화려한 누각(樓閣)에 올라 바라보는 풍광은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다.

 

밤마다 서호(西湖)는 아름다운 불빛으로 가득하다.

고전(古典)과 현대(現代)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항저우(杭州)는

자타가 인정하는

화려한 강남문화(江南文化)의 본 고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