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蘇軾) 즉 소동파(蘇東坡)
지난날 "적벽부(赤壁賦)"를 소개하면서 그의 생을 짧게 소개한 적이 있다.
아버지 소순(蘇洵), 동생 소철(蘇轍)과 함께 "삼소(三蘇)"라 불리며
화려하게 정치무대에 등장한 그는 총망받는 관리(管理)였다.
그러나 당쟁(黨爭)에 휘말리면서 중년(中年)부터 말년(末年)에 이르기까지는
귀양살이로 얼룩져 고단하게 살다 갔지만,
그가 남긴 문집(文集)과 백성을 향한 애민(愛民)의 발자취는 참으로 위대했다.
그는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을
가장 강력하게 비판하고 저항했던 관리(管理) 중 한명으로도 유명하다.
그 중 재상(宰相) 구양수(鷗陽修)와 더불어
재정(財政)에 관한 법(法) 중에 특히 "청묘법(靑苗法)"에 대해서 강한 반대를 했다.
소동파(蘇東坡)는 왕안석(王安石) 일파와 대립하다 결국 조정(朝廷)에서 밀려나
지방관(地方官)으로 좌천(左遷)을 거듭했다,
나중에는 배트남 근처의 하이난도(海南島)로 귀양(歸鄕)을 가 7년을 살다가,
신종(神宗) 황제(皇帝)가 세상을 뜨고 목종(穆宗)과 철종(哲宗)을 거쳐
신법(新法)을 강력 반대한 휘종(徽宗)이 등극하면서,
유배(流配)에서 풀려나 조정(朝廷)으로 돌아오는 도중 노쇄한 몸에 병이 들어 객사하고 만다.
본 시(詩)는 아마도 지방관(地方官)을 지낼무렵
항주통판(杭州通判)으로 재직시 지은 시(詩)로 보여진다.
신법(新法)의 시행(施行)으로 오히려 더 괴로워하는 백성들의 절규를
한 농촌 아낙의 고단한 삶을 통해서
모순점(矛盾點)을 통렬하게 비판한 유명한 시(詩)로,
소동파(蘇東坡)의 시(詩) 중에
정치사회(政治社會)를 풍자한 풍자시(諷刺詩)의 백미(白眉)라고 할 수 있다.
본 시(詩)는 다소 과장된 점이 있으나 사실 농촌에서의 삶은
1천년 전 송(宋)나라 농촌(農村)이나
지금 우리 시대(時代)의 농촌(農村)이나 그 고단함은 달라진 게 없다.
吳中田婦歎(오중전부탄): 강남땅 농촌 아낙의 탄식
今年粳稻熟苦遲(금년갱도숙고지): 금년에는 메벼가 유난히 늦게 익어
庶見風霜來幾時(서견풍상내기시): 서릿바람 불기만을 가절히 기다리네.
霜風來時雨如瀉(상풍내시우여사): 서릿바람 불 땐 또 큰비가 쏟아지니
杷頭出菌鐮生衣(파두출균렴생의): 쇠스랑과 낫자루에 곰팡이가 피네.
眼枯淚盡雨不盡(안고누진우부진): 눈물이 다 마르도록 비는 그치지 않아
忍見黃穗臥靑泥(인견황수와청니): 이삭 진흙에 잠김을 차마 못 보겠구나.
茅苫一月隴上宿(모점일월롱상숙): 한 달이나 띠풀 덮고 논둑에서 잠을 자다
天晴穫稻隨車歸(천청확도수거귀): 비 개이자 수레에 벼 싣고 돌아온다.
汗流肩赬載入市(한류견정재입시): 지친 어께 땀 흘리며 장으로 싣고가자
價賤乞與如糠粞(가천걸여여강서): 가격이 낮아서 겨 껍질처럼 내어주네.
賣牛納梲拆屋炊(매우납탈탁옥취): 소 팔아 세금 내고 집 헐어 불 지피니
慮淺不及明年飢(여천부급명년기): 내년에 굶을 일 까진 생각지도 못 한다네.
官今要錢不要米(관금요전부요미): 관청에선 쌀 대신 현금만을 받으며
西北萬里招羌兒(서배만리초강아): 서북 만리서 강족 쌀장사를 불렀네.
龔黃滿朝人更苦(공황만조인경고): 만조백관 넘쳐나 민생 더욱 고달프니
不如却作河伯婦(부여각작하백부): 차라리 강물에 빠져 죽느니만 못 하구나.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이 어떤 법(法)인지 간략하게 나마 알아보고자 한다.
군사(軍事) 부분이나 교육(敎育) 부분은 제외하고 당시 크게 쟁점이 돼,
많은 관리(管理)들이 좌천(左遷) 되거나 귀양(歸鄕)을 가고
쫏겨나기도 했던 재정(財政)에 관한 부분을 중점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은 내용별로 나누면
부국(富國)을 위한 "재정(財政)", 강병(强兵을 위한 "군사(軍事)",
그리고 백성을 위한 "교육(敎育)" 등 세가지로 나눌 수 있다.
그중 재정(財政)에 관한 것은 크게 7개 항목으로 되어있다.
1)제치삼사조례사(制置三司條例司)를 두어 국가(國家)의 1년의 예산(豫算)을 설정하며,
정부(政府)의 불필요한 경비를 줄이고 재원(財源)을 발굴한다.
2)농전수리법(農田水利法): 수리(水利) 시설(施設)과 황무지(荒蕪地)를 개간(開墾)하여
농업(農業) 생산(生産)을 증가시킨다.
3)방전균세법(方田均稅法): 토지(土地)를 조사하여
지주(地主)가 은닉(隱匿)한 토지(土地)들을 찾아내어,
그 토지(土地)에 따라 세금(稅金)을 부과(賦課)하여 세(稅) 부담을 균등하게 한다.
4)청묘법(靑苗法): 농민에게 영농(營農) 자금(資金)을 낮은 금리(金利)로 대출(貸出) 해 준다.
왕안석(王安石)이 실시한 신법 가운데
가장 문제시 되고 반대에 부디첬던게 바로 이 "청묘법(靑苗法)"이다.
청묘법(靑苗法)이란
단경기(端境期):철이 바뀌어 묵은 곡식은 떨어지고 새 곡식이 나올 무렵)에
국가(國家)가 낮은 이자(利子)로 농민(農民)에게 곡식과 돈을 꾸어줘,
농민(農民)을 고리대금(高利貸金)의 착취로부터 구원(救援)하는
획기적(劃期的)인 구휼(救恤) 정책(政策)이다.
청묘법(靑苗法)의 실시로 그 이율(利率)은 2할 이하로 떨어져
농민(農民)에게 큰 혜택을 주었다.
지주(地主)들은 보통 6할에서 7할에 이르는 이자를 붙여 백성들의 원성(怨聲)이 높았다.
왕안석(王安石)이 주동(主動)이 되어 주장한 신법(新法)을
처음에는 지지하던 구양수(鷗陽修)나 소동파(蘇東坡)도 결국,
청묘법(靑苗法)에 대해서는 견해(見解)을 달리해
신법(新法) 반대파(反對派)로 돌아서게 된다.
5)시역법(市易法): 소상인(小商人)에게 저리(低利)의 자금을 빌려주어
갑부(甲富) 및 지주(地主)들의 횡포(橫暴)를 막고자 한다.
6)균수법(均輸法): 정부(政府)에서 직접 시장(市場)에 개입하여
물가 폭등(暴騰)을 막도록 조절한다.
7)균역법(均役法): 그동안 부역(賦役)을 면제(免除) 받던 관리(管理)들이나 부호(富豪)들도
부역(賦役)을 공평하게 부담한다.
단, 균역(均役)을 면제(免除) 받고싶으면 돈을 주고 일할 사람을 대신 구해야 한다.
- 이상 -
이 법(法)은 당시로서는 파격(破格)에 가까운 평등법률(平等法律)로
엄청난 반향(反響)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법(法)이라 할지라도
백성들의 폭넓은 지지를 얻지 못 하면 흔들리게 된다.
안착(安着)을 못하고 결국 실패하는데, 그 이유로는
당시의 뿌리 깊은 봉건적(封建的) 사회제도(社會制度)를 너무 만만하게 보았으며,
오랜세월 오(吳)나라 때부터 이어져온
지방의 말단(末端) 행정조직(行政組織)에 까지 뇌물에 대한 문란한 관행(慣行)과,
지위(地位) 고하(高下)를 막론하고 썩어빠진 탐관오리(貪官汚吏)의 횡포(橫暴)가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극심했던
당시의 사회(社會)를 너무 쉽게 생각했다.
이런 와중에 신법(新法)을 공포(空表)하자,
기존 기득권층(旣得權層)의 엄청난 저항(抵抗)에 직면한 건 불을 보듯 뻔한 사실이었다.
더욱이 신법(新法)을 강력하게 밀어주던
신종(神宗) 황제(皇帝)마저 일찍 죽고,
신법(新法)을 반대하는 목종(穆宗)이 뒤이어 등극(登極)하는 등
극도의 혼란한 상황이 거듭됐다.
오늘날에 적용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평등하고 획기적인 신법(新法)을
당시 송(宋)나라 백성들에게 뿌리 깊은 불평등(不平等)과
가난(艱難)을 극복하고자 야심차게 시행했지만,
기득권층(旣得權層)인 대지주(大地主), 대상인(大商人), 고리대금업자(高利貸金業者) 등의
강한 반발에 부딪히게 된다.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에 반대하는 세력들은
기존 법인 구법(舊法)을 강력하게 지지했는데,
그 파벌(派閥)를 이끌던 중심 인물이 바로 "사마광(司馬光)"이다.
사마광(司馬光)은
1019년 후난 성(湖南省) 샤현(夏縣)에서 태어났다.
대대로 중앙(中央) 정치(政治)에 진출했던 명망(名望) 높은
진사(進士) 가문(家門) 출신이었으며,
어릴적부터 신동(神童)으로 알려질 정도로 총명함이 남 달랐다.
따라서 유명한 그림 "소아격옹도(小兒擊甕圖)"의 주인공으로도
유명한 인물이 사마광(司馬光)이다.
소아격옹도(小兒擊甕圖): 어릴 때 뜰에서 친구들과 놀고 있을 때
그 중 한 아이가 물독에 빠졌다.
다른 아이들은 당황하여 어쩔줄 몰랐으나 사마광(司馬光)은 돌을 던져
물독에 구멍을 내어
물을 빼서 아이를 구했다는 이야기를 그림으로 나타낸 것.)
왕안석(王安石)과 사마광(司馬光)은 조정(朝廷)에서 서로 격렬하게 대립하였다.
그러나 사마광(司馬光)은 신종(神宗) 황제(皇帝)의 신임(信任)과
전폭적(全幅的) 지지를 얻은 왕안석(王安石)에게 밀려나고 만다.
벼슬을 내려놓고 낙양(洛陽)의 집으로 돌아간 사마광(司馬光)은
혼신(魂神)의 힘을 다한 필생(畢生)의 역저(力著)인
편년체(編年體):역사를 연대 순서대로 기록함을 이르는 말) 역사서(歷史書),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완성하여 불후(不朽)의 명작(名作)으로 후대(後代)에 남긴다.
그러나 왕안석(王安石)은 새로운 법(法) 즉 신법(新法)으로,
썩어빠진 혼탁한 세상을 뒤엎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
백성들을 골고루 편안 케 하고 만민에게 평등(平等)한 세상을 만들고자 총력(總力)을 쏟아부었지만,
결국 엄청난 국력 낭비와 사회적 갈등을 남기고 폐기된다.
후대(後代)에 들어 왕안석(王安石)에 대한 개혁적(改革的) 평가(評價)는 수도없이 많다.
왕안석(王安石)은 "11세기 중국(中國)의 위대한 개혁가(改革家)"
란 평가는 공통적(共通的)이며,이에 이의(異議)를 제기하는 학자(學者)는 없다.
하지만 당시의 사회구조(社會構造)와 통념(通念)을 너무 쉽게 생각한 점과,
지나치게 급진적(急進的)으로 시행하려 했기에
기존 기득권층(旣得權層)의 강력한 저항(抵抗)에 부딪쳐,
야심차게 시행하려던 신법(新法)은
결국 뿌리를 내리지 못 하고 엄청난 혼란과 인명 피해를 남기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 점은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실로 크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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