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취암(淨趣庵)
그러니까 그 때가...
지금으로부터 한 20여 년이 흘러간 세월 같은데...
대학 다니는 우리 딸아이가 아장아장 걸어다닐 때 였으니까 말이다.
그새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뀐 세월이 가버렸다.
잎새가 한창 우거진 어느 여름날로 기억 된다.
고향으로 가는 직행버스 안에서 어느 중년 여성 둘이 나란히 앉아 도란도란 주고 받는 대화를 귀동냥으로 우연히 들었는데...
한 아주머니 왈,
지리산 산청이란 곳엘 가면 경치 좋은 깊은 산속에 정취암이라고 하는 멋진 암자가 있는데...
"아 글쎄 그 빼어난 절경과 운치가 한국에서 최고"라며 열변을 토하고 있고,
다른 아주머니는 "어머~ 그래~? 세상에~!!"
연신 감탄을 하며 자기도 한 번은 꼭 가보겠다고 다짐을 하며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었다.
당시 서른살을 갓 넘긴 나는 삶의 갈피를 못 잡고 방황 속에 고뇌가 극심했던 그야말로 암울한 때였다.
집에 돌아와 어제 버스에서의 일을 문득 되세기며
산청 어느 산기슭에 있다는 아름다운 암자 "정취암"이 갑자기 가고 싶어졌다.
허름한 배낭에 대충 옷가지 두어 개를 챙겨 아침나절 차를 타기 위해 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시간표를 보니 직접 산청으로 가는 차는 없고
아마 진주까지 가서 다시 차를 갈아타고 산청으로 갔던 것으로 기억 되는데...
진주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산청에 도착하니 해가 이미 중천을 지나고 있었다.
터미널 근처의 허름한 여인숙에다 숙소를 정해 그날밤 새우잠을 자고 이튼날 아침에
인근 어느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는 부랴부랴 걸음을 재촉하며 정취암이란 산사를 찾아 떠났다.
내 기억에 당시 산청 읍내는 아주 작은 시골 고을로 남아 있다.
읍내에서 한나절도 더 산속길으로 들어가 커다란 고개를 몇 개나 넘었는지,
지금 정확한 기억은 잊었지만
아무튼 내가 태어나서 그토록 다리가 퉁퉁 붓고 발바닥에 물집이 생기도록 걸어 봤던 기억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였던 것 같다.
고개를 어럽게 하나를 넘고 나면 더 큰 고개가 앞을 가로막고 있었고,
세상에 이런 산 속에 절간이 정말로 있기나 한 건지 의구심이 들정도로 끝도 없는 꾸불꾸불한 산길로 기억 된다.
당시 나는 불교를 비롯한 종교에 애착이 있거나 심취한 것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산행이 좋아서 떠난 여행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냥 하늘과 땅이 달라붙을 것 같은 답답함과
종잡을 수 없이 어수선한 마음을 어찌할 수가 없어서 무작정 집을 나섰던 길이었다.
산길을 걸어가며 지나고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묻고 또 묻기를 얼마나 했을라나~?
고개를 수도없이 넘고 드문드문 산 언덕에 들어앉은 산촌마을을 몇 개를 지나고 나서야...
송림 우거진 산길에 닿았다.
거의 탈진할 듯 숨이 턱에 붙고 긴 여름 해가 서산으로 기울어 갈 무렵에서야
어느 비탈진 바위 밑에 자리한 아담한 암자에 다다랐다.
세상에~!
커다란 바위가 산허리를 감싸고 도는 산 중턱을 한참이나 더 올라가서야 정취암이란 암자가 정말로 있었다.
다리도 아프고 무엇보다 배가 고파서리 견딜 수가 없어 절마당을 서성이니...
내 행색이 측은해 보였던지 절간에서 일하시는 어느 아주머니인 듯한 분이,
공양간에서 손짓으로 부르시더니...
조그마한 소반에 저녁 먹고 남은 밥이라며 내어주셨는데...
그때 먹었던 그 산사의 저녁밥은 내 평생 잊을 수 없는 최고의 맛난 성찬으로 뇌리에 남아있다.
갯바람에 게눈 감추 듯 순식간에 고봉 밥사발을 해치운 나는
얼마나 미안하고 부끄럽던지...
고맙다는 인사를 몇번이나 굽신거리며 하고는
슬금슬금 도망치 듯 절 뒷산을 올라갔다.
커다랗고 멋진 소나무가 늘어진 넓은 바위에 올라서니...
저녁 햇살이 노오랗게 퍼지는 산촌의 들녁 풍경이 시원스레 펼쳐진다.
그렇게 두어 시간을 멍하니 들녁 풍경에 젖다보니...
문득 속절없이 가슴을 밀고 올라오는 암담한 현실의 좌절과 꼬여가는 삶의 한스러움에...
눈물이 쏟아졌다.
외진 산 위라 듣고 볼 사람도 없을진데... 그 무슨 체면 따위가 필요하랴~!
사내도 때론 이렇게 목청을 높여 서럽게 울 줄도 안다는 걸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서럽게... 서럽게 울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던지...
누군가의 인기척에 눈물을 훔치고 돌아보니... 저녁밥을 선듯 내어주시던 암자의 조금 전 아주머니가 서 계셨다.
하도 서럽게 우는 소리가 들려 그치 길 기다렸으나 멈추질 않아 올라왔다면서...
아주머니는 저녁을 먹었던 공양간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는
세수를 하라며 놋대야에 가득 물을 부어주셨던 걸로 기억 된다.
그때 나는 마지막 남아있는 눈물이 모두 나올 때까지 소리없이 그렇게 또 울었다.
두고 두고 기억에 남는 참으로 고마운 분이셨다.
지금 생각해도 궁금한 것은...
그 때 그 아주머니께서는, "무슨일이 있었길레 여길 왔으며... 또 왜 그리 서럽게 울었냐고...?"
한마디도 묻지를 않으셨다는 것이다.
분명 묻고도 남을 궁굼한 일일진데 말이다.
가만가만 생각해보니 아마 아주머니는 말을 안 해도 내 초라한 행색과
서럽게 쏟아내던 눈물 속에 내 속내를 이미 휜히 꽤뚫어 보고 계셨던 듯 싶다.
자고 내일 아침에 가라며 스님께 말씀드려 요사채의 작은 방이라도 알아봐 주겠다는 걸
급구 마다하곤
또다시 부억 바닥에 넙죽 엎드려 큰절로 고맙다는 인사를 대신하고는 도망치 듯 어둠속에 산비탈을 내려갔다.
어느새 커다랗게 살이 오른 달은 앞산 능성이를 타고 떠오르고 있었고,
목이 터져라 세차게 울어재끼는 풀벌레 합창은 귀가 먹먹할 정도로 숲속을 울리고 있었는데,
일단 간다고 나선 길이었지만 렌턴도 없이 밤길을 걸어서 돌아갈 길이 정말로 막막 했었다.
소나무 그늘 밑의 침침한 어둠을 더듬더듬 내려오며 왔던 길을 되짚어 가는데...
정말이지 살얼음 위를 걷는 발자욱도 이 보단 덜 조심스러우리라...
얼마나 그렇게 조심조심 돌밭길을 걸어서 내려왔을라나...?
어둑 어둑한 산그림자 사이로 산동네의 희미한 불빛이 듬성등성 빛나기 시작하는 신작로까지 내려온 나는
그제서야 식은땀이 나며 맥이 풀려 이제는 살았구나 싶었다.
지금 생각해도 당시의 밤길은 등골이 오싹한 아찔한 기억으로 남았다.
하지만 어둠속에서 뿜어내는 짙은 송진 내음은
후덥지근한 여름밤의 코끝을 시원하게 뚫어주는 잊을 수 없는 청량제이기도 했었다.
그리고 나서 신작로길을 얼마나 또 걸었을까~
어느 산모퉁이를 돌아서자 인기척이 있길래 발길을 재촉하니
나처럼 밤길을 걸어가는 한 사내을 만났다.
그는 어디 어디서 오는 길이라고 했는데...
아무튼 그는 오늘밤 산청에서 자고 내일 일찍 전주로 간다고 했던 것 같다.
외진 밤길에서 우연히 만나 동행하는 그가 얼마나 든든하고 반갑던지...
서로 안심이 된 그와 난 길동무 되어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밤길을 걸었다.
안개처럼 자욱한 은하수가 머리 위로 쏟아질 듯한 산촌길을 걸으며 산청 읍내로 내려갔다.
늦은밤에 산청에 도착한 우리는 어제밤에 내가 묵었던 허름한 여인숙에 여장을 풀자마자 곧 바로 골아 떨어졌고
이튼날 아침도 거른 그와 나는 인연이 되면 또 만나자는 짧은 말로 인사를 대신하곤,
그는 전주로 나는 대전을 향해 첫차로 그렇게 헤어졌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그때 이름 석자라도 알아 두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그토록 고생하며 무작정 찾아갔던 정취암도 망각이란 세월속에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오늘 무슨 생각 중이었는지는 몰라도 갑자기 정취암이 문득 떠올랐지 뭔가~??
참으로 이상한 일도 다 있다.
지난날의 아련한 정취암의 추억을 그려보니... 그때 그날처럼 갑자기 또 정취암이 그립다.
이것 저것 생각할 것 없이 부랴부랴 대충 배낭을 꾸린 나는
설레는 마음을 억누루며 대전통영간 고속도로에 올라 산청 정취암으로 차를 몰았다.
근 두어 시간을 달렸을라나~
산청 IC를 나와 읍내로 들어서니 지난날과 완전 달라진 풍경이 오히려 낯설다.
새로 지은 건물들하며 잘 정돈 된 도로...
그리고 산촌도시의 특성인 약초의 고장답게 약초 재배 시설들이 군데군데 지어져 있다.
지난날 걸어서 갔던 도로는 완전 몰라보게 변해
정말 이 도로가 맞는지 의심이 들었다.
꾸불꾸불하던 산길은 시원스런 포장도로로 바뀌었고, 총총히 들어선 연두빛 벗나무 가로수가 싱싱하다.
산길을 오르며 주변을 보니
군데군데 이쁘장한 전원주택들이 산비탈에 들어앉아 잘 그린 풍경화처럼 아름다운 모습이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 정취암 갈림길에 다다르자.
세상에나~! 정취암으로 들어서는 길은...
깔끔한 아스팔트로 확장 포장을 하여 몰라보게 변했으며 네비게이션에서는
"여기는 아름다운길 정취암 가는 길입니다" 라는 멘트가 두어 번이나 나오는 게 아닌가~??!
지난날 내가 왔을 때는 여긴 분명 송림 우거진 비탈길였고
어찌나 꾸불거리던지 산모퉁이를 돌아서면 또 다시 나타는 산모퉁이가 끝도없이 이어지던 으스스한 산길이었는데...
그 꾸불거리던 산길을 지금 난 차를 몰며 여유롭게 오르고 있으니...
20년이란 세월은 이토록
강산을 두어 번 뒤집어 놓기에 충분한 세월이었나 보다...!
산꼭대기까지 잘 닦아 놓은 넓직한 포장도로는 한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그리고 산 꼭대기 넓은 산정에는 운치어린 주차장도 만드는
마무리공사도 한창이었는데, 아마도 공원을 만들지 않나 싶다.
정상에서 우측으로 갈라지며 정취암으로 향하는 잘 닦여진 길은 군데군데 크고 작은 주차장도 만들어 놓았으며,
암자까지 차가 들어갈 수 있도록 길을 넖여 놓았다.
정말이지 예전엔 상상도 못했던 것이 현실이 되어 이렇게 눈 앞에 펼쳐지다니...
정취암에 올라 이곳 저곳을 둘러보니 암자의 모습은 예전 그대로였고 변한게 없다.
적멸보궁도 여전하고 오른쪽으로 들어앉은 요사채와 공양간하며
왠쪽의 종무소도 지난날과 변함이 없는 듯 하다.
절간은 예전처럼 조용한데 주지스님인 듯한 스님 한 분이 분주하게 절마당을 돌아다니셨는데,
몇 일 있으면 다가 올 부처님오신날 손님 맞을 준비를 서두르는 듯 했다.
그런데... 그 시절 그 아주머니가 보이질 않는다.
아!~ 하기사 흘러간 세월이 얼마인데...
대신 커다란 흰둥이 진돗개 한마리가 아주머니 대신 꼬리를 흔들며 반긴다.
근데 이녀석 어찌나 영리한지...
절마당을 나오며 암자 위 바위산으로 향하자,
내 앞을 앞서가며 길을 안내하는 것이 아닌가~??
한 두번 해본 일이 아닌 듯 나와 걸음 보조를 맞춰가며 앞서 걷는 걸음걸이가 아주 익숙하다.
여기가 경치가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넓은 들녁을 내려다보는 풍경이 아름다운 곳이다.
지난날 나는 이곳에 털썩 주저앉아 어께를 들썩이며 뭐가 그리 서럽던지...
서럽게~ 서럽게~ 펑펑 울었던 장소였다.
괜시리 눈시울이 또 뜨거워 진다.
그런데 그 시절 장승처럼 버티고 서서 산객을 맞이하던 멋진 소나무가 죽어 있다.
아~! 안타까워라~~!
천년 만년 청청할 것만 같던 멋진 이 소나무도 세월속에 생을 다하고 이렇게 말라가고 있으니...
세상에서 영원한 것은 도데체 무엇이란 말인가~?!
지금에 와서 다시금 생각해보니...
지난날 무슨 맘으로 여기 산청하고도 오지 중 오지인 정취암까지 왔었는지... 도무지 그때의 나를 이해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 용기,
송림우거진 밤길을 죽기살기로 거침없이 걸어갔던 그 무대뽀 용기...
아마도 청춘이기 때문이란 말 밖에...
청춘은...
인생에서 가장 혈기 왕성하고 고민도 가장 많으며 시련과 가능성도 가장 큰 시절이 아니던가~!
그래서 청춘시절을 인생의 꽃이라고들 했는지 모른다.
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에는 철쭉이 한창 만개했다.
이토록 오월의 빛깔은 세상에서 가장 싱그럽고 아름답다.
수많은 꽃들이 피고 지며...
온 산촌을 파릇파릇한 신록으로 넘치는 생명의 계절이다.
한참을 머물다 산길을 내려오면서 도로변에 잠시 차를 세우고
산 허리에 걸린 정취암을 다시 바라보았다.
참으로 아름다운 암자임이다.
지난날 귀동냥으로 몇 마디 듣고는 무작정 찾아서 왔던 저곳...!
그로부터 20년이란 세월이 요동치듯 흘러갔다...
그리고 내가 지난날 추억을 더듬으며 오늘 이렇게 다시 이곳에 서있다.
예전과 변함 없는 건,
저기 저 산비탈에 매달린 아담한 정취암 하나 뿐이고...
나머진 모두가 변해버렸다.
송진 내음이 진동하던 그 오솔길도... 혈기 왕성한 청춘이던 내 모습도...
그리고 청청하던 저 바위 위의 소나무도...
세월은 그렇게 모두를 변해 놓고 저 혼자 20년이나 훌쩍 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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