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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중국(中國) 구이저우(貴州) 여행(旅行)... "서하객(徐霞客)"의 발차취를 따라서

명대(明代)의 여행가(旅行家)
"서하객(徐霞客)"의 발차취를 찾아서 떠난

구이저우(貴州) 여행(旅行).

 

해발 700m 고지에 자리한 구이양(貴陽)은
조선시대 "유배(流配)"와 같은 뜻으로 사용되던 "귀양"의 어원(語源)이 되는 고을이다.

 


"귀양간다"는 말이 바로 이곳에 근무지 발령 받음을 일컷는 말로,
구이저우(貴州) 지역은 오지 중 상오지에 속하는 곳이기에
옛부터 관리(官理)가 귀양(貴陽)으로 발령이 나면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따라서 산악지대가 대부분인 구이저우성(貴州省)의 성도(省都) 구이양(貴陽)은

유배지(流配地)의 대명사로 명성을 날릴 만큼 오지이다.
그러나 구이양(貴陽)은 현재 인구 430만 명이 모여 사는 대도시가 됐다.

 


몇년 전에는 신공항과 고속도로가 동서로 가로지르며
수많은 터널과 비탈 벼랑에 놓인 까마득한 다리 위를 아슬아슬 내달린다.

 

 

"서하객(徐霞客)"
그는 한창 젊은 나이인 22세에 장쑤성(江蘇省) 타이후(太湖)에 머물다가
여행길에 올라 주로 북, 서쪽의
태호(太湖), 동정산(洞庭山), 천대산(天臺山), 안탕산(雁蕩山),

태산(泰山), 무이산(武夷山)과 북방의 오대산(五台山), 항산(恒山) 등...
명산들을 돌아보고 왔다.
그 뒤로도 쉴새없이 중국 각지를 돌아다녔다.

 


30~40대의 중년기 때에도 중국 각지를 돌며 여행으로 보냈는데

안타깝게도 이 무렵의 기록들은 분실되고 흩어져 전하질 않는다.

 


세월이 흐른 51세 되던 서기 1636년 가을에는 긴 여행을 계획하고,
저장(浙江), 장시(江西), 후난(湖南), 광시(廣西), 구이저우(貴州), 윈난(雲南)에 이르는
양쯔강(長江) 이남의 강남(江南) 지방을
4년여에 걸쳐 답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역작(力作) 서하객유기(徐霞客遊記) 제1권은 초기의 여행 일기이고,
제2권부터 20권까지는 만년(晩年)에 갔던 여행의 기록으로 되어 있다.

 

서하객(徐霞客)의
이름은 굉조(宏祖)이고 호(號)가 하객(霞客)이다.
호(號)에도 노을이란 뜻이 담긴 것으로 보아

나그네 품성을 타고난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그는 어려서부터 역사(歷史)와 지리(地理)에 관한 책을 주로 읽었으며
젊은 시절부터 33년이 넘는 평생을

여행으로 중국 대륙을 누비고 다녔다.

 

 

장쑤성(江蘇省) 쑤저우(蘇州)의 타이후(太湖)에서 시작된 그의 여행은
북으로 올라가 허베이(河北)이를 돌아
서쪽의 산시(山西), 그리고 남으로 내려와 구이저우(貴州)는 물론이고 윈난(雲南)에서
병으로 생을 마감하면서 그의 여행도 끝을 맺는다.

 


그의 여행길에는 가솔(家率) 한 명과
정문(貞文)이라는 젊은 스님이 동행을 했는데,
오늘날 후난성(湖南省) 창사시(長沙市)를

가로질러 둥팅후(洞庭湖)로 흘러가는 샹장(湘江) 나루에서
배를 타던 중 강도를 만나 스님이 큰 상처를 입었다.

 


그 후유증으로 스님은 도중에서 숨을 거두었고,
서하객(徐霞客)을 따라다니던 가솔(家率)도 남은 돈을 챙겨 도망을 친다.

 


하지만 서하객은 명산대천(名山大川)에 대한 여행을 홀로 계속 했는데,
그때부터의 경비(經費)는 그의 조부(祖父) 때부터 친분이 깊었던 정치적(政治的)으로 뭉친

어느 문파(門派)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파벌(派閥) 정치(政治)가 심한 것도 중국(中國) 정치(政治)의 두두러진 특징으로,
한 번 인연을 맺으면

평생을 지나 대를 이어 인연(因緣)을 맺어가는 것이 그들의 특징이며
그 전통은 아직도 이어오고 있다.

 


그가 죽은 후 계회명(季會明)의 손을 거쳐 서하객유기(徐霞客遊記) 20권이 정리 되었다.
그는 곳곳의 지형과 동굴의 분포상황을 포함하여

중국 서남지역의 석회암 지형의 특징 및
종류석의 생성 원인까지 상세히 해설하고 있는 점이 놀랍고도 빛나는 부분이다.

 

따라서 그의 일기는 단순한 여행기(旅行記)가 아닌
체계적(體系的)이며 과학적(科學的)으로 기록한 소중한 자료(資料)이기도 하다.

 

 

서하객(徐霞客)은

서기 1586년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1641년 55세로 병사할 때까지 오로지 여행만 다녔다.
그가 천하(天下)를 배회할 때는 명(明)나라 말기(末期)로
매우 혼란한 시기였으며,

 


당시의 시대 상황이 여행하기에 아주 여려운 여건임에도 불구하고 16개 성(省)을 돌며
상세한 기록으로 남겼다는 것은 경이적(驚異的)인 것으로,
일반 사람들의 의지로는 감히 엄두도 낼 수 없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따라서 그 시절에 서하객처럼 천하(天下)를 두루 섭렵한 사람은

그가 유일무이(唯一無二)하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세세한 기록은 그가 여행가(旅行家)이면서 지리학자(地理學者)요,
탐험가(探險家) 겸 동,식물학자(動, 植物學者)이면서
등산가(登山家) 뿐만 아니라 저술가(著述家)였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서하객(徐霞客)은 여행가로서 명성이 큰 만큼 그가 다녔던 유명한 산들을

대충 꼽아보면,
후난성(湖南省) 동정산(洞庭山), 산둥성(山東省) 태산(泰山), 저장성(浙江省) 천태산(天台山),
안후이성(安徽省) 황산(黃山), 장시성(江西省) 여산(廬山), 허난성(河南省) 숭산(嵩山),
산시성(山西省) 오대산(五台山), 허베이성(河北省) 항산(恒山), 등등...
명산(名山)이란 산들은 상당부분 그의 발걸음이 닿았다.

 

 

그는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기에 젊은 나이에 이렇게 여행에 전념할 수 있었는데
집안의 대부분 재산(財産)이 그의 여행 경비에 쓰여졌다.

 


여행중에 그는 매일 매일 일기를 썼다.
그의 일기는 그날의 세밀한 기록이기도 했다.
그 기록들을 정리한 것이

중국 최초의 방대한 지리적 여행기인 "서하객유기(徐霞客遊記)"이다.

 

 

서하객(徐霞客)이 병을 얻어 여행중에 죽고
명(明)나라도 멸망하면서 정치적(政治的), 사회적(社會的)으로 엄청난 혼란기에
그의 가족들도 대부분 죽게 되었고,
그 와중에 그의 방대한 일기도 상당부분 흩어져 없어져버렸다.

 

 

그런 차에 서하객(徐霞客)이

말년(末年)에 얻은 첩(妾)에게서 낳은 아들 이기(李奇)가 있었는데,
그 아들이 아버지의 여행기 가치(價値)를 알아보고
필사적으로 흩어진 일기들를 찾아 모았다.

 


그 덕분에 완전히 흩어져 없어질 뻔했던 그의 기록 가운데

6분의 1정도가 오늘날에 전해 온 것이다.
남아있는 분량만도 이토록 방대하니...
서하객(徐霞客)과 그의 아들 이기(李奇)의 노력에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

 


그는 당대(當代)에는 단순한 여행가였을 뿐이었지 위대한 평가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가 주목받으며 위대해진 것은

후대(後代)에 이르러 학자들이 그의 여행기(旅行記)를 평가하면서 부터였다.

 


서하객(徐霞客)이 여행하면서 이런 기록들을 남길 수 있었던 배경에는
3사람의 공을 빼놓을 수 없다.

 


첫째는
그에게 많은 재산(財産)을 물려준 그의 할아버지(祖父)와 아버지(父親)이다.
그의 조부(祖父)는 과거시험에 관한 문제에 연루되는 바람에 출세(出世)의 길을 포기하고 살았다.
그것이 권력(權力)과 거리를 두는 가풍(家風)을 만든 것이 아닌가 한다.

 


아울러 그의 집 안에는 만권루(萬券樓)라는 개인 도서관(圖書館)이 있었는데,
어린시절부터
이곳에서 역사(歷史)와 지리(地理)에 관한 책을 읽으며

기록으로 남기는 습관을 기른 듯하다.

 


두 번째로 공이 큰 사람은 그의 어머니(母親)이다.
서하객(徐霞客)이 22세에 결혼을 하자
모친(母親)은 여행중에 쓰는 모자를 손수 만들어 주며 여행을 권했다고 한다.

 


서하객의 부인 입장에서 보면 억장이 무너지는 일이었지만
당시 사회적인 관습(慣習)에서 보면,
출세나 큰 인물이 되기 위해서는 훌륭한 스승을 찾아가거나 큰 도시에서 견문(見聞)을 넓히고
오는 것이 명문가(名門家)나 부자집에서는 일상적인 다반사(茶飯事)였다.
이때부터 서하객은 평생을 여행가(旅行家)로 살았다.

 


서하객(徐霞客)이 19살 되던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부친(父親)이 남긴 많은 유산(遺産)을

정리해서 아들의 여행 경비로 챙겨준 것도 그의 어머니 왕씨(王氏)였다.

 


그리고 셋째는
말년에 첩에게서 얻은 아들 이기(李奇)이다.
그는 아버지 서하객이 지리학자(地理學者)로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하게 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다.

 

 

아버지가 남긴 일기(日記)의 가치를 알아보고 흩어진 일기들을 필사적으로 사서 모아
책으로 엮어내는데 지대한 공을 세웠다.

 


여기서 궁금증이 생길 수도 있는데...
아버지는 서씨(徐氏)인데 그의 아들의 성(性)은 어찌하여 이씨(李氏)일까~?.
그것은 당시의 법이 첩(妾)의 지식은 아버지의 성(性)을 따를 수 없어
어머니의 성(性)을 이어받았기에 그러하다.

 


서하객(徐霞客)의 생은 이쯤에서 간략하게 마무리 짓고...
그가 여행을 다녔던 16개 성(省) 중에
나는 이번에

오지(奧地)인 구이저우성(貴州省)에서 조금이나마

그의 발자취를 더듬어보고 싶었다.

 


구이저우성(貴州省)은

중국 남쪽에 위치한 지역이지만 해발 고도가 700m~2,000m 정도로 높기에
여름에도 타 도시에 비해 그리 덮지 않고 선선한 편이다.
하지만 1년 중 260일 이상이 비가 내리며

늘 구름이 산을 가리고 안개가 끼어 우중충한 날이 많다.

 


그리고 온 지역이 지각운동으로 융기한 카르스트(karst)

즉 석회암(石灰巖) 지형(地形)의 특성으로 인해
울퉁불퉁하여 산수(山水) 경치(景致)는 수려하지만,
먹고 살 농지(農地)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지역이다.

 


또한 물은 많으나 금새 땅이 말라버리며

석회질(石灰質)이 녹아있어 생수(生水)로 마시기에 적합치 않다.
이와 같은 특징은 중국에서도 환경이 열악하기로 손꼽히는 오지(奧地)에 속한다.

 

따라서 이곳을 일컬어
"3일 간 맑은 날이 없고(天無三日晴),
3리 가는 평평한 땅도 없으며(地無三里平),
사람들은 3푼의 돈도 없다(人無三分銀)"란 말이 옛부터

이곳을 대표하는 말이 되었다.
하늘(天)과 땅(地) 그리고 사람(人)이 모두 가난한 곳이 구이저우(貴州)이다.

 


구이저우성(貴州省)은
한족(漢族)에 밀려난 소수민족(少數民族)들이 대대로 옥수수를 주식(主食)으로

살아가는 척박한 땅이다.
차를 타고 가다 보면 손바닥 만큼 작은 옥수수밭들을 수도없이 만나게 되는데,
도저히 사람이 올라갈 수 없는 벼랑에도 옥수수대가 서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의 삶이 어떠한지를 한 눈에 느낄 수 있는 현실에
감탄(感歎)과 측은(惻隱)함이 뒤섞여 금세 숙연(肅然)해진다.

 


하늘은 이 고단한 사람들에게 수려(秀麗)한 자연경관(自然景觀)을 선물로 주었지만...
그 혜택은 모두 중앙정부(中央政府)에 빼앗기고,
오늘도 비탈길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대나무마디처럼 거칠어진 손가락을 비틀며
옥수수 톨을 따느라 산촌(山村)의 초가을 하루가 짧기만 하다.

 

2017년 9월 23일.

구이저우성(貴州省) 싱이(興義)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