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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휘주문화박물관(徽州文化博物館)... 안후이 성(安徽省)

안후이 성(安徽省) 여행(旅行)

 

휘주(徽州)의 역사(歷史)와 문화(文化)를 한눈에...

"안휘중국휘주문화박물관(安徽中國徽州文化博物館)"

 

어느 나라 든

왠만큼 역사(歷史)가 있다는 도시에 가면 빠짐없이 있는 것이 박물관(博物館)이다.
그래서 여행 중에는 자주 들리곤 한다.
중국(中國)은 도시 역사가 좀 됐다 하면 5,000 년이 기본이고,
보통은2,000~3,000년의 역사(歷史)를 자랑하는 도시들이 많다.
그런데 휘주(徽州)는 역사가 그리 깊지 못하다.
그것은 아마 커다란 황산(黃山)이 가로막아 농토(農土)가 적은 지리적 특성 때문이라 생각 된다.
박물관에 진열된 유물(遺物)들도
청동기(靑銅器) 몇 가지와 벼루, 먹 등 필기구(筆記具)가 좀 있고
나머지는 명(明) 청대(淸代)의 생활상을 재현 해 놓은 풍물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박물관(博物館) 이름이 "문화박물관(文化博物館)"으로 간판을 달고 있었다.

 

휘주(徽州)를 중심으로  중국 각지의 위치를 바닥에 세겨놓은 지도로

발로 밟으면 불이 들어오며 거리가 계산된다.

 

벽에는 황산(黃山) 올랐던 중국 최고 지도자들의 당시 모습을

사진으로 전시하고 있었다.

 

현대(現代) 중국 발전의 초석(礎石)을 놓은

개혁(改革), 개방(開放) 선봉장(先鋒將)

덩사오핑(鄧小平) 부주석(副主席)이다.

그는 부주석(副主席) 시절인 1979년 7월 15일 한창 무더운 여름날 황산(黃山)에 올랐는데,

"이렇게 수려한 황산(黃山)을 모든 인민들이 쉽게 올라와 볼 수 있도록

길을 더 만들고 케이블카를 놓으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그 후로 튼튼한 잔도(棧道)를 본격적으로 만들고 4만 여 개의 계단을 더 만들어

오늘날의 길이 생겼다고 한다.

 

장쩌민(江澤民) 국가(國家) 주석(主席)도 황산(黃山)에 올랐다.

그는 덩샤오핑(鄧小平)의 전폭적인 지지와 후광(後光)으로 주석직(主席職)에 올랐으며,

덩샤오핑(鄧小平)의 개혁(改革), 개방(開放) 정책(政策)을

선두(先頭)에서 진두지휘(陣頭指揮)한 인물이다.

명필(名筆)로도 유명하여 중국 각지에 그가 남긴 글이 많다.

 

시진핑(習近平) 현(現) 중국(中國) 국가(國家) 주석(主席)이다.

그도 2005년 5월 황산(黃山)에 올랐다고 적혀 있다.

 

황산(黃山)에서 북쪽으로 60km 정도 떨어져 있는

도교(道敎) 명산(名山)으로 유명한 제운산(濟雲山) 모습.

사진에서 보는바와 같이 운무(雲霧)가 아름답기로 유명하여 요즘 한창 뜨는 산이다.

 

박물관(博物館)에 전시된 몇 개의 청동기(靑銅器) 유물(遺物) 중 하나이다.

 

우아한 청동주병(靑銅酒甁)

 

섬세한 무늬가 일품인 청동 그릇

이들 모두는 국보급(國寶級) 문화재(文化財)들이다.

 

옥(玉)으로 만든 벼개

 

청(淸)나라 때 차(茶)를 팔던 가게의 모습.

 

휘주(徽州) 출신의 청(淸)나라 관리(管理)도 있고...

 

전족(纏足)이다.

"전족(纏足)"
주로 한족(漢族)들이 행했던 풍습(風習)이며
소수민족(少數民族)은 전족(纏足)을 하지 않았다.
보통 3~4세 여자아이의 발을 면(棉)으로 된 천으로 감아 발의 성장을 저지시켜 그 형태를 부자연스럽게 만드는데,
발의 크기는 약 10~13㎝에 머무르게 되고,
5~6세가 되면 기본적 형태가 완성된다고 한다.
이후 전족포(纏足布)를 벗기고 위에 전시 된 전족용(纏足用) 신발을 평생 신는다.
전족(纏足)의 역사(歷史)는 송(宋)나라 이후라고 한다.

 

발을 크지 못하게 전족(纏足)을 하면

몸의 뼈가 가늘게 되어
여성의 몸 전체가 섬세하게 되는 미적(美的)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전족(纏足)을 하면 오리가 걷는 것처럼 뒤뚱거리며 걷게 되는데,
이 거름걸이는 여성의 성적(性的) 기관(器官)의 특수한 발달을 촉진시킨다는 설(說)이 있다.
또다른 목적은 많이 걷지 못하기에

여인의 정절(貞節)을 지키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고 한다.
이 고문(拷問)에 가까운 요상한 풍습(風習)은
청(淸)나라 때에 와서 법(法)으로 금지시켰으나 잘 지켜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청대(淸代) 말기(末期)에 일어난

태평천국(太平天國) 종교난(宗敎亂)을 고비로 민간(民間)에서 폐지 운동이 일어나 완전히 사라진다.

 

객지(客地)로 남편을 떠나보낸 휘주(徽州) 아낙네의 모습이다.

자수(刺繡)를 놓고 있는 모습이 처연하게 느껴진다.

 

죽고나서야 소식만 돌아오는 남편을 그리며 살아야 하는 여인네들은,

한숨과 눈물로 평생을 보냈다고 하는데...

이건 희생(犧牲)을 너머 고문(拷問)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科擧)에 급제(及第)하여 중앙(中央) 정치(政治)의 관리(管理)가 되면

부(富)와 명예(名譽)가 엄청나게 따라온다.

그러나 그 뒤에는 눈물어린 정성으로 평생을 희생한

어머니와 아내가 있었다...

 

대부분의 대소사(大小事)는 자유로운 토론(討論)을 통한

합의에 의해 결정됐다고 한다.

 

박물관에는 어진(御眞)을 비롯한 영정(影幀)이 여러 개 걸려 있었다.

 

이들은 모두 이름을 드날린 휘주(徽州) 출신 명사(名士)들.

 

동덕인(同德仁)은

휘주(徽州)에서 오래된 약방(藥房)이다.

덕(德)을 배푸는 어진(仁) 한가지(同) 마음으로 의술(醫術)을 배푼 약방이기에

그 명성(名聲)이 아직도 여전하며 대를 이은 약국도 성업중이다.

 

오래된 먹(墨)

 

당시 먹(墨)을 만드는 모습을 재연했다.

휘주(徽州)는 좋은 먹(墨)을 생산하던 유명한 산지(産地)이다.

 

송(宋)나라 때 먹(墨)이 전시되어 있었다.

자그마치 1,000년 전 먹(墨)이다.

 

벼루

 

오래된 벼루들...

먹(墨)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 벼루아니겠는가~

 

집을 장식했던 목조각 장식품들...

 

옛 휘주(徽州) 태수(太守)가

업무(業務)를 보던 집무실(執務室) 모습.

 

고급 주택을 장식했던 섬세한 조각품(彫刻品)들...

옛날에는 장식품(裝飾品)과 조각품(彫刻品)은 부(富)와 권위(權威)의 상징이었다고 한다.

 

지난날 휘주(徽州) 시가지 사진과 모형도를 합성한 모습.

 

휘주(徽州) 시가지 모습을 재현한 모형도(模型圖).

 

서하객(徐霞客)
명(明)나라 말기(末期)에 살았던

여행가(旅行家)겸 지리학자(地理學者)로,
그는 22세에 여행(旅行)을 시작하여 30여 년 간 중국 전역을 두루 여행(旅行)을 하였다.

북쪽의 허베이(河北), 산시(山西)를 돌아,
남쪽으로 내려가

윈난(雲南), 구이저우 성(貴州省)까지 모두 16개 성(省)을 두루 돌아다니며 여행(旅行)을 했던 인물이다.
그는 여행을 하면서 각 지역의 산맥(山脈)과 강(江), 동식물(動植物) 등을

상세히 살펴 일기 형식으로 기록했다.
그 기록들은 그가 죽은 후

"서하객유기(徐霞客遊記)"라는 이름으로 20권의 책으로 편찬되어

오늘날까지도 널리 읽히는 명(名) 저서(著書)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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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아침에 호텔에서 일어나

신안강변(新安江邊)를 따라 노가(老街) 입구까지

두어 시간을 산책하며

찍은 사진들이다.

 

 

 

 

 

 

 

 

 

 

 

 

 

 

 

 

 

냇가에서 빨래하는 모습들이 종종 보였다.

 

 

 

 

 

산책 나온 여인...

인형 같은 강아지를 데리고 나와서 자랑이 대단했다.

 

 

 

 

사진 좌측이 노가(老街) 입구이고

우측은 리양 라오지에(黎阳老街)이다.

 

무신경 탓인지...

인도교(人道橋) 난간 틈에 나무들이 많이 자라났다.

그 중 감나무가 크게 자라고 있었으며 십여 개의 감도 달려 있다.

이거참~!

생명의 강인함에 놀라워 신기하기도 하고...

관리가 전혀 안 돼 노쇄하여 곧 무너질 것 같은 다리의 모습에

걱정도 되어 묘한 감정이 교차한다.

 

이곳 황산(黃山)도 아직 여름을 벗어나지는 못헀다.

어느 식당 화단에 어여쁜 배롱나무꽃이 곱게 피었다.

내일이면 황산을 올라간다...

드디어 황산(黃山)을 올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