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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그리고 이야기

고향(故鄕)... 정지용(鄭芝溶)

 

정지용(鄭芝溶)


고향(故鄕)은 충북 옥천(沃川)이며

생가(生家)에는 그의 문학(文學)을 기리는 "정지용문확관(鄭芝溶文學館)"이 있다.
아버지가 한의사(韓醫師)였으며

비교적 부유한 집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조혼(早婚) 풍습(風習)에 따라

열 두 살의 어린 나이에 부모의 강요로 결혼(結婚)을 했으며,
옥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면서

당시 학생이던 박종화(朴鐘和), 홍사용(洪思容) 등과 사귀게 된다.


그리고 박팔양(朴八陽) 등과

동인지(同人誌) "요람(搖籃)"을 펴내기도 했던

문학(文學)에 열성적이던 학생이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선근(李瑄根)과 함께 "학교를 잘 만드는 운동"으로

반일(半日) 수업제(授業制)를 요구하는 학생대회를 열기도 했다.
이로 인해 학교에서 무기정학(無期停學) 처분을 받았다가,

 박종화(朴鐘和), 홍사용(洪思容) 등의 구명운동(救命運動)으로

겨우 풀려나기도 했었다.


1923년 4월 일본(日本) 도쿄(東京)에 있는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英文科)에 입학하며 유학을 했다.


1929년 졸업과 함께 귀국하여 이후 8·15해방 때까지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영어교사로 재직했고,
이무렵 시조시인(時調詩人) 이병기(李秉岐)등과 친분을 쌓았다.


1930년에는 김영랑(金永郞)과 박용철(朴龍喆)이 창간(創刊)한

"시문학(詩文學)"의 동인(同人)으로 참가 했으며,
3년 후에는 "가톨릭 청년" 편집고문(編輯顧問)으로 있으면서,

이상(李箱)의 시(詩)를 세상에 알렸던 장본인(張本人)이 정지용(鄭芝溶)이다.


같은 해 모더니즘(modernism) 운동의 산실이었던 "구인회(九人會)"에 가담하면서,
문학(文學)에 대한 공개강좌(公開講座)를 열었고,

기관지(機關誌) "시(詩)와 소설(小說)" 간행(刊行)에도 열성적으로 참여 했다.
1939년에는 "문장(文章)"의 시(詩) 추천위원으로 있으면서

박목월(朴木月), 조지훈(趙芝薰), 박두진(朴斗鎭) 등,
훗날 "청록파(靑鹿派)"로 불리는 시인(詩人)을 발굴하여 등단(登壇)시키기도 했다.

 

1945년 해방(解放)이 되자

이화여자대학으로 옮겨 교수 및 문과(文科) 과장이 되었으며,
1946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의 중앙집행위원 및 가톨릭계 신문인

"경향신문(京鄕新聞)" 주간(主幹)이 되어,
"여적(餘適)과 사설(社說)"이란 고정란을 맡아본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혼란기에는

조선문학가동맹(朝鮮文學家同盟)에 가입했던 전력으로,
보도연맹(保導聯盟)에 가입하여 전향강연(轉向講演)에 참여하기도 하며

사회주의(社會主義) 사상(思想)에 빠지기도 했었다.

 

바로 이런 전력으로 3공화국부터 해금 직전의 5공화국까지

철처하게 어둠에 묻혀있던 시인(詩人)이었다.
1950년 6·25전쟁 이후의 행적(行跡)에는 여러 설(說)이 있으나,

북한으로 끌려갔다가

UN군의 평양 포격 때 숨진 것으로 문학계(文學界)에서는 보고 있다.

 

고향(故鄕)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메 끝에 홀로 오르니
한 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 쓰다.


고향에 돌아와도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그의 시(詩) 고향(故鄕)은...
그리움 묻어나는 토속적(土俗的) 시어(詩語)와

정감(情感) 넘치는 음률적(音律的) 표현(表現)은,
아련한 고향(故鄕)의 들녁으로 몰아가는 마력(魔力)이 있다.
이 고독한 서정(抒情)은 정지용(鄭芝溶) 시(詩)의 보석같은 매력이다.


깊은 밤 홀로 누워 차근차근 되뇌어 암송(暗誦)하다 보면

어느새 마음은 고향(故鄕) 동산으로 달려가고,
아리하게 콧등이 저려오며

가만가만 베게잇 적시는 애틋한 그리움이 가슴 깊이 스며들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