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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 등산

13), 청간정(淸澗亭)... 고성(高城)


13), 고성(高城)...  청간정(淸澗亭)

 

고성군(高城郡) 토성면(土城面)에 있는 해변의 정자(亭子)로,

"청간(淸澗)"이란 "맑은 계곡물"이란 뜻을 담고 있다.
강원유형문화재(江原有形文化財) 제3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관동8경(關東八景) 중 한곳이다.
설악산(雪嶽山)에서 흘러내리는 청간천(淸澗川)과 바다가 만나는 지점의 작은 구릉 위에 앉은 아담한 정자(亭子)가 청간정(淸澗亭)이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동해안(東海岸) 풍경(風景) 또한 일품(一品)이다.
특히 아침의 해돋이와 해질녁의 낙조(落照)의 정취(情趣)는 예로부터 많은 시인(詩人),
묵객(墨客)의 심금(心琴)을 울렸다고 전해진다.


정자(亭子)의 창건연대(創建年代)와 건립자(建立者)는 미상(未詳)이나,
서기 1520년(중종 15년)에 간성군수(杆城郡守) 최청(崔淸)이 중수(重修)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갑신정변(甲申政變) 때 불타 없어진 정자(亭子)를 40여 년 후인 1930년경에 지방민(地方民)들이 재건(再建)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그후 1955년 이승만(李承晩) 대통령(大統領)이 화진포(花津浦) 별장(別莊)으로 가던중 이곳을 방문하곤 보수를 명(命)했으며,
현재 걸려있는 현판(懸板)도 그때 이승만(李承晩)이 쓴 친필(親筆)이다.
1981년 4월 최규하(崔圭夏) 대통령(大統領)의 지시로 해체(解體)및 복원(復元)하여 오늘에 이른다고 한다.

 

 

 

 


정철(鄭澈)은 관동별곡(關東別曲) 중 청간정(淸澗亭)에 관해서 별도로 찬미(讚美)하지는 않았다.
다만 삼일포(三日浦)와 선유담(仙遊潭), 영랑호(永郎湖), 만경대(萬景臺)등과 함께

청간정(淸澗亭)을 묶어서 네 명의 신선(神仙)들을 추모(追慕)한 글이기에,

이를 소개코저 한다.

 

 

정철(鄭澈)의 관동별곡(關東別曲) 중

삼일포(三日浦)에서 사선(四仙)을 추모(追慕)하다

(내 임의로 괄호를 달았다 읽기 편하고저)

 

高(고)城(셩)을란 뎌만 두고 三(삼)日(일)浦(포)로 차자가니,
丹(단)書(셔)는 宛(완)然(연)하되 四(사)仙(션)은 어데 가니,
예 사흘 머믄 後(후)의 어데 가 또 머믈고.
仙(션)遊(유)潭(담) 永(영)郎(냥)湖(호) 거긔나 가 잇는가.
淸(쳥)澗(간)亭(뎡) 萬(만)景(경)臺(대) 몃 고데 안돗던고.

 

고성(高城)을 저 만큼 두고 삼일포(三日浦)를 찾아가니,
남쪽 봉우리 바위에 "영랑도남석행(永郞徒南石行)"이라고 쓴 붉은 글씨는 뚜렷이 남았는데,
이 글을 쓴 사선(四仙)들은 어디로 갔나?
여기서 사흘 동안 머무른 뒤에 어디 가서 또 머물렀던고?
선유담(仙遊潭), 영랑호(永郎湖) 거기에나 가 있는가?
청간정(淸澗亭), 만경대(萬景臺)를 비롯한 몇 군데서 앉아 노는 것일까~?.

 


삼일포(三日浦)와 사선(四仙)이란
신라(新羅) 효소왕(孝昭王) 때 "술랑(述朗), 남랑(南郞), 영랑(永郞), 안상(安詳)"

네 명의 신선(神仙)이 호숫가 바위에서 노닐며

삼일간(三日間)이나 돌아가지 않았다 하여 "삼일포(三日浦)"라 이름지었다 한다.
이 네 명의 신선(神仙)들은

금강산(金剛山) 일대의 경관(景觀)을 유람(遊覽)하며 심신(心身)을 수련(修鍊)하고 도의(道義)를 닦은 것으로 전해지는데,
금강산(金剛山) 각처에 그들이 남긴 유적(遺跡)이 아직도 남아있다 한다.
따라서 정철(鄭澈)의 관동별곡(關東別曲)에서 신선(
神仙)들의 이야기를 언급하며

그들을 그리워한 내용이다.

 

 

정철(鄭澈)은 관동별곡(關東別曲)에서 삼일포(三日浦) 바위에 쓰여 있다는 "단서(丹書)"

영랑도남석행(永郞徒南石行)의

붉은 글씨는

그 때 와서 놀던 사선(四仙) 일행이 쓴 것이라 했다.
영랑(永郞) 신라(新羅) 때 사선(四仙) 중 한 명을 가리키는 것이며,

도(徒)는 무리 즉 일행을 이르고
남석(南石)은 이 글이 쓰여진 바위를 일컷는다.
그리고 행(行)이란 말 그대로 간다는 뜻이다.

따라서

"영랑 일행이 돌 위에서 놀다 간다" 라고 옛 문인(文人)들도

"영랑도남석행(永郞徒南石行)"을 해석(解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