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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전 명시 감상

선(蟬): 매미... 이상은(李商隱)

이상은(李商隱) 812~858

혼탁한 당나라 말기(末期)에 살았던 시인(詩人)이다.
자는 의산(義山)으로

회주(懷州) 하내(河內) 지금의 허난성(河南省) 친양현(沁陽縣) 사람이다.
스스로 자신을 옥계생(玉谿生)이라고도 불렀는데,

이것은 고향 가까이에 옥계(玉谿)라는 계곡이 있었고,
어렸을 때 거기에 있는 도교사원에서 학문을 닦은 것과

관계가 있다고 보여진다.


어린시절 말단 관리였던 아버지를 여의고,
서기 829년 18세 무렵 당시의 천평군절도사(天平軍節度使)로 있던

영호초(令狐楚)에게 문학적 재능을 인정받
그의 막료 즉 비서로 들어간다.

 

그때까지만해도

한유(韓愈), 유종원(柳宗元)의 학문을 신봉하던 이상은(李商隱)은
영호초(令狐楚)가 당시 변려문(騈儷文)의 대가였던 까닭에,

곧 그의 작문법(作文法)을 배우게 되며
나중에 온정균(溫庭筠), 단성식(段成式)과 함께

변려문(騈儷文)으로 이름을 날린다.

 

그 무렵 당나라의 조정(朝廷)은

2개의 당파(黨派)으로 나뉘어져 격렬한 정쟁(政爭)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른바 "우(牛), 이(李)"의 당쟁(黨爭)으로,
귀족(貴族) 출신자로 이루어진 이덕유(李德裕) 일파
과거(科擧)를 통해 조정에 진출한

진사(進士) 출신의 우승유(牛僧孺), 이종민(李宗閔) 일파의 파벌 투쟁이었다.


영호초(令狐楚)는 우승유파(牛僧孺派)에 속해 있었다.
당시의 정치인들은 고급관료를 지향하는 한,

그 당쟁(黨爭)에 좋든 싫든 개입되게 되어 있었으며,
이상은(李商隱)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상은(李商隱)이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한 것은

서기 837년으로 26세의 나이였다.


그때까지 여러 번 과거에 응시하러 장안(長安)을 왕래 했으나

번번히 낙제하고 말았는데,

어렵게 합격을 한다.


그 뒤 영호초(令狐楚)의 아들 영호도(令狐綯)의 도움으로

예부시랑(禮部侍郞)으로 있던 고개(高鍇)의 수하가 된다.
그러나 얼마지나지 않아 그의 큰 그늘인

영호초(令狐楚)가 병사하자,
강력한 후원자를 잃은 이상은(李商隱)은

이듬해 경원절도사(涇原節度使)로 있던 반대파인 왕무원(王茂元)의 부름을 받고

그의 수하로 들어간다.


평소 이상은(李商隱)의 재능을 아까워 했던 왕무원(王茂元)은

그를 자신의 막하(幕下)로 불러들인 것도 모자라
딸을 시집보내 자신의 사위로 삼을 정도로 이상은(李商隱)의 재능을 아꼈다.

 

그런데 이 일이 이상은(李商隱)에게는

오히려 일생의 아픔이자 불행의 씨앗이 될 줄은 몰랐으니...

어찌됐거나 그는 장인이 된 왕무원(王茂元)의 추천으로

비서성(秘書省)에서 교서랑(校書郞)이 되었으며,
나아가 홍농위(弘農尉)란 벼슬자리까지 오르며 승승장구하게 된다.

 

그런데 장인 왕무원(王茂元)은

반대파인 이덕유파(李德裕派)에 속해 있었기에,
이상은(李商隱)은 전에 몸 담았던 우승유(牛僧孺)의 일파였던

영호초파(令狐楚派)로부터
지조를 잃은 배신자라는 맹 비난을 한 몸에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당나라의 역사서인 "신당서(新唐書)"에는

이상은(李商隱)을 이렇게 혹평했다.


"우(牛), 이(李)파의 당인(唐人)들은

이상은(李商隱)을 비웃고 비난했으며,
궤변이 많고 경박하며 도덕관(道德觀)이 결여된 자(者)로서

두 파(派)로부터 배척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어찌됐든 간에 욕은 실컷 얻어 먹었으나

모처럼만에 관직다운 관직을 얻어 뜻을 펼치고자 하는 찰라,
자신을 비호하고 뒤를 돌봐줬던

강력한 후원자며 장인이었던 왕무원(王茂元)이
서기 843년에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는 날벼락 같은 일이 벌어진다.


이덕유(李德裕)일파에서 막강한 힘을 과시하던

왕무원(王茂元)이 죽자,
이상은(李商隱)도

그의 그늘이 벗어지며 관직에서 쫏겨나는 지경에 이른다.


이러다보니 이상은(李商隱)의 삶은 말이 아니었다.
돌보는 자가 없어지자,

생활은 곤궁해지고 지조마저 저버린 배신자란 꼬리표가 늘 따라다녔다.


이런 와중에도 그는 살기위해
우(牛), 이(李) 두 당(黨) 사이를 오가며

등걸이 생활을 어렵게 이어나간다.
이덕유파(李德裕派)의 한 사람인 정아(鄭亞) 아래서

장서기(掌書記)의 직책을 겨우 얻었으나

곧 주변의 질시로 그마저 견디지 못하고 쫏겨난다.

 

그야말로 처자식과 먹고 살길이 막마했던 그는
어린시절 소꿉친구인 반대당의 영호초(令狐楚)의 아들 영호도(令狐綯)를 다시 찾아가

애원하며 매달리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은혜를 잊은 놈이니... 배알머리도 없는 놈이니...
온갓 욕설을 다 퍼부우면서도...

한 때는 절친했던 똑똑한 옛 친구의 딱한 처지가

너무도 측은하고 안타까웠는지...
태학박사(太學博士)란 말단직을 어렵게 천거해 준다.

미우나 고우나 그래도 도와주는 건 역시 옛 친구 뿐이었다.

 

이상은(李商隱)은 친구 영호도(令狐綯)의 도움으로

겨우 목구멍에 풀칠하며

질긴 목숨을 근근히 이어가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지난날에는 촉명하고 명석하여

촉망받던 인재(人才)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었는데...

당파에 휘말리며 어찌 이리도 인생이 꼬이게 됐는지...
그 자신도 답답하여 미칠 지경이었다.

 

정치에 몸담으면

출세와 살아남기 위해서 어느 파(派)엔가 줄을 서게 되고,
그때부터 좋든 싫든 적(敵)과 동지(同志)가 생기게 되며

반대파(反對派)와 세 대결을 펼치면서

서로 물고 뜯는 게 당파(黨派) 싸움이다.

 

이는 크게는 죽음을 부르는 싸움으로 번질 수도 있으며,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는 길이기도 했다.

 

당리당략(黨利黨略)에 따라 벌어지는 고질적인 당파 싸움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수없이 봐 왔다.
하필이면 이상은(李商隱)이,

이 소용돌이에 휘말릴 줄은 본인인들 알았겠는가...!.

그야말로 당쟁(黨爭)의 소용돌이를

온몸으로 겪으며

불우한 생을 살다가 46세의 일기로 새상을 떠나고 만다.

 

옛날이나 요즘이나

정치(政治)란 사실 이렇게 더럽고도 치사한 이합집산(離合集散)의 반복적인 연속은

변치않는 고질병이 되었다.


살아남기 위해 어떨결에 줄을 서다 보면

자신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정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며 인생을 망치는 것도 모자라
배신자로... 변절자로... 역사에 오점을 남기며 손가락질을 받는 경우를
역사에서는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조선시대에도 소론(少論)이니... 노론(老論)이니... 하며

서로 편을 갈라 물고 뜯는 당쟁(黨爭)의 풍파 속에서
얼마나 많은 국력을 낭비했으며 또 그 피해가 얼마나 컷었던가...!.

 

먼 역사를 헤아려 볼 것도 없이

현재 돌아가는 정치판을 봐도
저 자는 누구 사람이니...

또 저 사람은 누구 파니... 하는 파벌을 형성하여,
세력을 키우고 그 힘을 바탕으로

이권에 개입하여 영향력을 행사하는 모습을 종종 보는 게

요즘도 변치않는 정치판의 현실이다.

 

이상은(李商隱)...
그는 이 더럽게 꼬인 인생(人生)을

그의 시(詩)에 쏟아부으며 서러움을 달래곤 했었다.

지금 소개하는 그의 시(詩)

"선(蟬)" 즉 매미는

시인(詩人) 자신의 감정을 매미에 몰입시켜

몰아일체((沒我一體)의 경지를 만들어낸
영물시(詠物詩)의 대표작으로

자신의 우울한 처지를 표현한 시(詩)로 유명하다.

 

높은 나무에 살며 맑은 이슬을 마시지만 항상 배불리 먹지 못 하고,

목이 쉬도록 울어대는 매미의 형상을 통해
시인의 의지와 품행은 고결하나

이리저리 시달린 정파의 소용돌이 속에서
지치고 한빈(寒貧)한 생활을 면할 길이 없는 한스러움을 나타낸

명시(名詩)이다.


슬픈 음률을 새벽까지 토해내는 매미의 울음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나무의 무정함을 통해,

시인의 가슴에 쌓인 불만이 가득하나,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비애(悲哀)를 이 시(詩)에서 드러내고 있다.


또한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자유로이 옴겨다니는 매미의 모습에서
현재의 서글픈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며
홍수에 이리저리 떠다니는 나무 인형을 연상케 된다.

 

결국은 낮은 관직만을 어렵게 떠돌며

오랜 세월을 보내는 자신의 서글픈 모습을

이 시(詩)에서 짙게 토해내고 있다.


이무도 자신을 알아주기는 커녕

손가락질과 욕을 해대는 현실에서
고독과 슬품에 사로잡힌 시인(詩人)의 마음을

매미가 위로해 주는 듯 하지만,
이내 돌아갈곳이 없는 신세임을 직시하고

더욱 슬퍼하는 처량한 심정을 시(詩)에서 고백하고 있다.

 

蟬(선): 매미

 

本以高難飽(본이고나포): 본디 높은 곳에선 배부르게 마시지 못하는 것을,
徒勞恨費聲(도노한비성): 부질없이 애써 소리 내어 우는 것이 한스럽구나.
五更疏欲斷(오경소욕단): 해 뜰 무렵 우는 소리 점점 끊어질 듯 하여도,
一樹碧無情(일수벽무정): 한 그루 나무는 푸르기만 하니 무정하기도 하여라.
薄宦梗猶汎(박환경유범): 낮은 벼슬살이는 나무 인형이 물 위를 떠도는 듯 한데,
故園蕪已平(고원무이평): 고향 전원엔 잡초만 무성해 평평히 길을 덮었네.
煩君最相警(번군최상경): 수고스런 그대가 가장 먼저 나를 일깨우지만,
我亦擧家淸(아역거가청): 내 역시 집안이 청빈하여 돌아갈 수가 없구나.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