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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전 명시 감상

춘효(春曉): 어느 봄날 아침에... 맹호연(孟浩然)

맹호연(孟浩然) 689~740

 

중국(中國) 당(唐)나라 때 시인(詩人)이다.
자(字)는 호연(浩然)이며 호(號)는 녹문거사(鹿門處士)라고 쓰고
후베이 성(湖北省) 즉 호북성 양양(襄陽) 사람이다.


어린시절은 고향에 묻혀 지내다가 나중에 장안(長安)으로 와 진사과(進士科)에 응시했으나
급제하지 못했으며

그 후로 평생을 벼슬길에 나가지 못했다.

 

그러나 어린시절부터 시문(詩文)에서는

고향 호북성(湖北省)에서 일찍부터 명성(名聲)이 자자했던터라,
이미 시인(詩人)으로써 어느정도 이름을 얻고 있었다.


그는 비교적 집안이 넉넉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젊은 시절부터 산수경치(山水景致)가 뛰어나고 명사(名士)들이 많이 살던

강남지방(江南地方)인
강소성(江蘇省)과 절강성(浙江省) 등지를 자유로이 유람(遊覽)을 했다.


이때 유람 차 강남(江南)에 와 있던

자신보다 12살이나 아래인

당시 27세이던 시인(詩人) 이백(李白)을 만나 사귀게 된다.


맹호연(孟浩然)은 이백(李白)과

강남(江南)의 유명한 절경(絶景)들을 주로 유람(遊覽) 했는데,
강남(江南) 3대 누각(樓閣) 중 으뜸으로 이름 난 호북성(湖北省) 무창(武昌)의

"황학루(黃鶴樓)" 유람을 끝으로
이백(李白)과 헤어져 각자의 유랑길로 떠난다.


이 내용은 이백(李白)의 시(詩)에

맹호연(孟浩然)을 떠나보내는 애틋한 심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맹호연(孟浩然)을 두고

절개(節介)와 의리(義理)를 매우 존중했던 시인(詩人)으로 불리는데,
아마도 같은 문인들과의 교분에 있어서

정(情)이 많고 의리(義理)가 깊었던 것 같다.

 

맹호연(孟浩然)은

 한때 녹문산(鹿門山)에 은둔해 살면서

시(詩) 짓는 일에 몰두한 적이 있다.


그후 당시로서는 비교적 늦은 나이 였던 40세가 되서야

장안(長安)으로 진출하여 시(詩)로써 이름을 날린다.


이때 왕유(王維)를 비롯 장구령(張九齡)

문인(文人)들을 만나 교분(交分)을 나누게 된다.

왕유(王維)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시인(詩人)이 바로
맹호연(孟浩然)이다.

 

따라서 왕유(王維)의 시(詩)는

맹호연(孟浩然)의 시풍(詩風)과 매우 비슷하며,
왕유(王維)를 논(論)할 때

맹호연(孟浩然)을 빼면 그야말로 앙꼬 없는 찐빵과 마찬가지로
그 둘은 서로가 닮은 점과 연관성(聯關性)이 많은 인물이다.


나이 차도 맹호연(孟浩然)이 왕유(王維)보다

열살이 연상인 관계로 왕유(王維)는 그를 형님으로 모시고,
맹호연(孟浩然)에게서 시(詩)와 문학(文學)에 대한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교분이 두터웠다고 볼 수 있다.


그만큼 왕유(王維)에게는

맹호연(孟浩然)이 사상(思想)과 시풍(詩風)

그리고 삶에 있어서도 절대적(絶對的)인 영향을 준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맹호연(孟浩然)은

동진시대(東晉時代)의 전원시인(田園詩人)인 "도연명(陶淵明)"

영향을 많이 받았다.


따라서 도연명(陶淵明)이 주로 읊은

자연(自然)을 소재로한 시풍(詩風)과 유사한
산수(山水)의 아름다움을 주제로 시(詩)들을 지어
왕유(王維)와 함께 "산수(山水) 시인(詩人)의 대표자"로 불리는 인물이

바로 맹호연(孟浩然)이기도 하다.

 

그는 말년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잠시나마 직업을 얻은 적이 있었는데,
바로 문학친구 였던 장구령(張九齡)의 막객(幕客) 생활이 그것이다.


장구령(張九齡)이란 인물은
과거시험(科擧試驗)을 통해 출사(出仕)한 실력파이다.


따라서 그는 과거시험(科擧試驗)으로 벼슬길에 오른

여러 관료들의 지위(地位) 옹호(擁護)를 위해,
귀족(貴族) 출신으로 조정(朝廷)을 장악하고 있던

예부상서(禮部尙書) 이임보(李林甫)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그들의 파워에 밀려


형주대도독부장사(荊州大都督府長史)란 지방관직으로 좌천(左遷)되어
무한(武汉) 지방에 쫏겨와 있었는데
그때 문학친구 맹호연(孟浩然)을 다시 만났고,
장구령(張九齡)의 간곡한 권유로

그의 "막객(幕客)":지방관서나 軍에서 관직 없이 업무를 보좌하던 고문) 노릇을
잠시 지내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못가 맹호연(孟浩然)은

병을 얻어 52세의 일기로 급히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후세의 문학가(文學家)들은

맹호연(孟浩然)과 왕유(王維)를 묶어

"왕맹시파(王孟詩派)"로 불렀다.
저서(著書)로는 그의 시집(詩集) "맹호연집(孟浩然集)" 4권이 전해오고 있다.

 

지금 소개하는 그의 대표 시(詩) "춘효(春曉)"

봄이 오면 가끔 생각나는 시(詩)로,
어느 봄날 늦잠을 자고 일어난 시인(詩人)이 문 밖 상황을 궁굼해 하지만
이불속에서 게으름을 피우는 느긋한 모습을 표현한 시(詩)이다.

 

중국문학(中國文學)에서 특히 시문학(詩文學)에서의

낮잠이니 봄잠이니 하는 잠이란 표현은
은둔(隱遁)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림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옛 동양화(東洋畵)들을 보면

잠자는 은사(隱士)들의 모습이

종종 그림에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세상과 담을 쌓고 은둔(隱遁)의 삶을 사는 현자(賢者)의 모습을

주로 표현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낮잠은 비범한 사람들이 현실을 초월한

하나의 상징성(象徵性)으로 그려지고 있는 특징이
중국의 문학과 그림에 주로 표현되고 있다.

 

작가는  춘효(春曉)에서

어느 봄날 날이 샌 줄도 모르고 곤히 자다,

 

여기 저기서 지저귀는 새들의 울음소리에 잠에서 깨어난다.
문득 밤새 들렸던 새찬 바람소리 빗소리를 상기하곤
그 비바람에 아까운 꽃이 얼마나 졌을까~? 하며

안타까워 하고 궁굼해 하는 심정을 노래했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문을 열어보지 않고
덜 깬 잠의 달콤함에 취해 게으름을 피우는 여운이 남는다.


이 시(詩) 만큼  봄날의 정취를 잘 묘사한 시(詩)가 또 있을까~?.
시심(詩心)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이 점이 맹호연(孟浩然) 시(詩)의 묘미와 멋과 매력이다.

 

춘효(春曉): 어느 봄날 새벽에


春眠不覺曉(춘면불각효): 봄잠에 날 새는 줄 몰랐더니
處處聞啼鳥(처처문제조): 곳곳에 새 울음소리 들린다.
夜來風雨聲(야래풍우성): 밤새 바람소리 빗소리 들렸는데
花落知多少(화락지다소): 꽃은 얼마나 졌을까~?.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