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유(王維) 699~759
중국 당(唐)나라 때 산서성(山西省) 시현(祁縣)에서 태어났다.
그는 시인(詩人)이면서 화가(畵家)였으며 음악가로,
자는 마힐(摩詰)이다.
모친 최씨(崔氏)는 독실한 불교신자로서,
왕유(王維)도 어머니의 영향으로 입신(入信)하여,
"유마힐(維摩詰)" 즉 대승불교(大乘佛敎)의 경전(經典) 중 하나인
유마경(維摩經)의 주인공을 닮고자
자를 마힐(摩詰)이라고 지었다.
그가 태어날 당시 당(唐)나라 수도 장안(長安)은 이미
부(富)와 번영(繁榮)을 누리는 국제적(國際的) 대도시(大都市)로 성장한 때였다.
왕유(王維)
왕유(王維)는 비교적 이른 나이인 21세 때
진사(進士) 시험에 급제했다.
아홉살 때부터 이미 문학적(文學的) 재능(才能)을 보였다곤 하지만,
진사(進士) 급제(及第)는
특히 거문고(琴)을 잘 타
음악적 재능(才能)이 뛰어났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어려서부터 수재(秀才) 소리를 들어가며
주변에서 칭찬이 높았었고 재능이 뛰어나서,
황제(皇帝) 현종(玄宗)을 비롯한 귀족들의 모임에서
예술가(藝術家)로서의 명성(名聲)을 널리 떨쳤었다.
젊은 시절 고급(高級) 관리(官理) 채용 시험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여
타의 부러움을 샀으나,
겸손치 못하고 우쭐한 기분으로
그 재능(才能)을 과시하며 자랑하고 다니다 조정(朝廷)의 눈총을 받아
젊은 나이에 어렵게 얻은
고위관직(高位官職)에서 쫏겨나기도 했다.
그 후 장안(長安)에서 먼 변방(邊方)인
산동성(山東省)의 말단직(末端職)에 임용되었다가,
능력을 인정받아 서기 734년에 다시 장안(長安)로 소환되어
상서우승(尙書右丞)이란 고위 벼슬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켜
756년에 수도 장안(長安)이 반란군(叛亂軍)에 점령당하자
왕유(王維)는 반란군에 붙잡혀 그들의 본거지였던 낙양(洛陽)으로 끌려간다.
이름이 이미 알려진 왕유(王維)는 이곳에서
강제로 억지 벼슬을 받았다.
2년 후 758년이 되서야
관군(官軍)이 장안(長安)과 낙양(洛陽)을 탈환하자 풀려났는데,
왕유(王維)는 반란군(叛亂軍)에게 붙잡혀 있을 때
황제(皇帝)인 숙종(肅宗)에 대한 충성(忠誠)을 표현한 시(詩)를
몰래 써서 보낸 적이 있었던 점을 참작하고,
때마침 고위직(高位職) 관리(官理)에 있던 친형이 힘을 써준 덕분에
겨우 화를 모면할 수 있었다.
말년(晩年)에 접어들면서
그는 속세(俗世)에 대한 환멸(幻滅)을 점점 더 강하게 느끼게 된다.
아내와 어머니의 죽음으로 슬픔에 빠진 그는
장안(長安)에서 가까운
종남산(終南山) 자락의 망천(輞川)이란 냇가 옆의 대숲에
당시 궁중(宮中) 시인(詩人)이었던
송지문(宋之問) 소유의 별장(別莊)을 구입해
"망천장(輞川莊)"이란 이름으로 바꾸고는
별장(別莊) 안에 틀어박혀
시(詩)와 그림을 그리며 불교(佛敎) 연구(硏究)에 몰두한다.
당시의 별장(別莊)이라 함은
요즘처럼 경치 좋은곳에 집 한 채 달랑 있는 외딴집이 아닌,
드넓은 토지와 여러 채의 별채 및 정자(亭子)와 누각(樓閣)들을 비롯해
기암괴석(奇巖怪石)과 화초(花草)가 어우러진
요즘으로 치자면 경치 좋은 고급 휴양소(休養所) 같은 곳이었다.
그리하여 부(富)와 세(勢)의 상징(象徵)으로 여겼었다.
따라서 각계 각층의 명사(名士)들을 초정해 수시로 만찬을 열고
시(詩)와 풍류(風流)를 즐기면서 친분을 쌓고,
부(富)와 명예(名譽)를 과시하던
"사교(社交)의 장(場)" 역활을 했던 곳이 당시의 별장(別莊) 문화(文化)였다.
그러나 왕유(王維)는 오로지 망천장(輞川莊)에 틀어박혀
세상사(世上事)와 문을 닫아버렸다.
인생살이에서 몇 번의 좌절과 쓴맛을 경험한 왕유(王維)는
명예(名譽)니 벼슬이니 하는
인간세상(人間世上)의 권세(權勢)가 다 허황된 꿈이며
뜬 구름 같은 존재임을 깨닫고,
속세(俗世)를 떠나 산수(山水)와 자연(自然)을 주제로 시(詩)를 짓고 그림을 그리며
불교(佛敎)에 심취하며 지낸다.
그의 시(詩)는 친교(親交)가 있던
맹호연(孟浩然)의 시(詩)를 닮은 데가 많았으나,
맹호연(孟浩然)의 시(詩)보다는 날카로운 면이 더 많다.
또한 그는 불교(佛敎) 신자(信者)로서
관념적(觀念的)인 "공(空)의 세계(世界)"를 동경한 작품을 이무렵 많이 지었다.
특히 자신의 별장(別莊) 이름을 따서 지은 시(詩)로
오언절구(五言絶句)로 된
"죽리관(竹里館)"이나 "녹시(鹿柴)"등은 그의 대표작들로 불린다.
왕유(王維)가 지은 시(詩) 가운데 훌륭한 작품으로 꼽히는 시(詩)들은,
대부분 망천(輞川)의 산수(山水)에서
영감(靈感)을 얻은 것들이 대부분을 차지 한다.
왕유(王維)는 화가(畵家)로서도 매우 뛰어나서,
남종화(南宗畵)의 시조(始祖)로서 추앙받는 인물이 바로 그다.
명(明)나라 때 화가(畵家)이자 문인(文人)이며 정치가(政治家)였던
동기창(董基昌)은
그의 화론서(畵論書)에서
왕유(王維)를 "남종화(南宗畵)의 시조(始祖)"로 규정했다.
남종화(南宗畵)란
북종화(北宗畵)와 대비 되는 말로
주로 문인(文人)들이 비직업적(非職業的)으로 그린
담묵과 엷은 담채색의 그림들로,
인간의 내면을 나타낸
추상적(抽象的)인 관념(觀念)을 표현한 그림들을 말한다.
따라서 남종화(南宗畵)를 일컬어
"문인화(文人畵)"라고도 하며,
우리나라에서는 허련(許鍊), 허형(許瀅), 허건(許楗)으로 이어지는
3대 화가 가문이 대표적이다.
구도상으로 보면
여백(餘白)을 중시하고 측면을 부각시킨 그림이 특징이다.
왕유(王維)의 예술(藝術)은...
당시의 일부 기록들과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극히 일부의 모사본(模寫本)을 바탕으로 하여
이론적(理論的)으로나마 복원할 수 밖에 없다.
그는 동양(東洋) 산수화(山水畵)를 발달시킨
초창기의 화가(畵家) 중 한명로 불리며,
이 또한 널리 존경을 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생존시에 "설경산수화(雪景山水畵)"로 특히 유명했다고 하는데,
그의 그림으로는 별장인 망천장(輞川莊)의 빼어난 12풍경를 그린
"망천도(輞川圖)"라는 화첩(畵帖)이 있었다고 전한다.
이 화첩은 이미 없어진지 오래되었으나,
후에 제작 된 많은 모사품(模寫品)들로 하여
대강의 구도를 상상할 뿐이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기록에 보면 그의 작품에서 "발묵기법(潑墨技法)"
즉 "먹물을 화선지(畵宣紙)에 뿌리듯이 그리는 기법"을
최초로 사용했다고 전해온다.
그의 그림들은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전통기법과
새로운 기법들을 창안하여 함께 그림에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왕유(王維)의 설경산수화(雪景山水畵)로 모사본(模寫本)이다.
왕유(王維)는 후대(後代)로 내려오면서 점점 유명해져
성인(聖人)에 버금가는 지위에까지 올라간 것은
그가 동양(東洋) 산수화단(山水畵壇)에서
남종화(南宗畵)를 최초로 확립한 시조(始祖)이며,
동시에 위대한 시인(詩人)이었기 때문이다.
망천장(輞川莊)에서 지은
오언절구(五言絶句)로 된 20수의 시(詩)를 별도로 묶어
"망천집(輞川集)"이라 이름하고
서문(序文)까지 써서 애장을 했는데,
지금까지 내려오는 왕유(王維)의 시집(詩集) 중 가장 유명하다.
중국(中國)의 명시(名詩)들을 소개할 때 마다
왕유(王維)의 시(詩)는 거의 빠지지 않고 거론 될 정도로,
그는 당대(唐代)의 유명 시인(詩人)이며 중추적 시인 중 한명이다.
시(詩)와 그림(畵) 그리고 음악(樂)에서도
두각(頭角)을 나타냈던 왕유(王維)는
뛰어났던 천재(天才)임이 분명한 듯 하다.
어지럽던 당시의 당(唐)나라 정치(政治) 상황은
그를 속세(俗世)를 떠난 은둔자(隱遁者)로 만들었지만,
그 은둔의 세월은
그를 위대한 시인(詩人)이며 화가(畵家)의 반열(班列)에 올려놓았다.
후대(後代)로 내려오며
거의 신화적(神話的)인 존재로까지 추앙받았기 때문에
진정한 왕유(王維)의 모습을 탐지해내기는 어려우나,
그는 이백(李白)과 두보(杜甫) 등
당대(唐代)의 대시인(大詩人)들과 함께
서정시(敍情詩)의 형식(形式)을 완성(完成)한 시인(詩人)으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지금 소개하는 시(詩) "죽리관(竹里館)"은
왕유(王維)가 별장인 망천장(輞川莊) 안의
별당(別堂)인 "죽리관(竹里館)"에서 지은 시(詩) 임을 알 수 있는데,
본 시(詩)는 짧은 오언절구(五言絶句)의 시(詩)로
왕유(王維)의 시심(詩深)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명작(名作)이다.
아울러 왕유(王維)의 시(詩)들은
오언절구(五言絶句)의 시(詩)가 대분분을 차지 한다.
"오언절구(五言絶句)"란
다섯 글자로 된 넷 구의 시(詩), 즉 네줄로 된 시(詩)를 말한다.
짧은 시(詩)지만 함축된 의미는 매우 깊다.
그의 시(詩)는 세속(世俗)을 떠난 별장(別莊)에서의 삶처럼
지극히 맑고 고요하며,
찻잔을 앞에 놓듯 은은한 향(香)마져 풍겨난다.
본 시(詩)를 비롯해 왕유(王維)의 시(詩)들을 찬찬히 읽다보면,
시(詩) 속에 대숲의 고요한 밤풍경이 그려지며
새상사(世上事) 모두 잊고서 학(鶴)처럼 고고하게 앉아
달밤에 금(琴)을 타는 달관(達觀)한 시인(詩人)의 모습이
잔잔하게 떠오르는 한 폭의 그림이 된다.
이리하여...
북송시대(北宋時代)의 시인(詩人)이며 정치가(政治家)였던 "소동파(蘇東坡)"는
왕유(王維)를 일러
"시중유화 화중유시(詩中有畵 畵中有詩)"라 하여,
"시(詩)에 그림(畵)이 있고
그림(畵)에 시(詩)가 있다”고 평(評)했던,
당(唐)나라의 뛰어난 예술가(藝術家) 중 한명이 바로
왕유(王維)란 시인(詩人)이다.
竹里館(죽리관): 대숲의 별장.
獨坐幽篁裏(독좌유황리): 홀로 그윽한 대숲에 앉아
彈琴復長嘯(탄금부장소): 거문고 타며 휘파람 길게 부노라.
深林人不知(심림인부지): 깊은 숲인지라 사람들이 알리 없고
明月來相照(명월래상조): 밝은 달만이 찾아와 비출뿐이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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