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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 등산

2), 명재(明齋) 윤증(尹拯) 고택(古宅)... "회니시비(懷尼是非)"

 

2), 명재(明齋) 윤증(尹拯) 고택(古宅)...

"회니시비(懷尼是非)"

 

 

그 후 윤증(尹拯)은 이른바 "신유의서(辛酉疑書)"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에게 보내,

포문(砲門)을 열고 맹열히 반격을 가한다.
송시열(宋時烈)의 그릇된 정치적(政治的) 편견(偏見)으로 남인(南人)들이 억울한 죽임을 당하게 하였으며,
우암(尤庵)은 지나치게 독선적(獨善的)이고

주자(朱子)를 맹목적(盲目的)으로 받아들이는 인물 평가해버린다.
이로써 사제지간(師弟之間)이었던 두 사람은 돌이킬 수 없는 정적(政適)으로 맞서게 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서인(西人)은 급격하게 분파(分派)되기 시작하는데,
송시열(宋時烈)을 따르는 세력은 "노론(老論)"으로,
윤증(尹拯)을 중심으로 모인 세력은 "소론(少論)"으로 갈라서게 된다.
이것이 "회니시비(懷尼是非)"의 주된 골자(骨子)이다.

 

 

이와 덧붙여 윤증(尹拯)과 송시열(宋時烈) 사이의 개인적(個人的) 서운한 감정도

한 원인으로 볼 수 있다.
1680년 숙종(肅宗) 때 김수항(金壽恒), 민정중(閔鼎重) 등이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윤증(尹拯)을 출사토록 강력하게 권유했으나...

 

 

윤증(尹拯)은 당시 조정(朝廷)을 좌지우지(左之右之)하며 위세(威勢)를 떨치던
송시열(宋時烈), 김석주(金錫胄), 김만기(金萬基), 민정중(閔鼎重)의 세도(勢道)가 바뀌여야 하고,
크게 대립하며 목슴까지 걸고 권력다툼을 벌이는

서인(西人)과 남인(南人)의 원한이 풀어져야만 출사(出仕)할 수 있다며 거절한다.

 

 

또 숙종(肅宗) 초기에 송시열(宋時烈) 일파(一派)가 남인(南人)들에게 화(禍)를 입었을 때,
윤증(尹拯)은 남인(南人)과의 인연(因緣)관계으로 화(禍)를 면하자

송시열(宋時烈)의 의심을 받기도 했었다.

 

 

그 일이 있고 몇년 후
윤증(尹拯)의 부친(父親) 윤선거(尹宣擧)가 사망하자,

남인계(南人系) 인사들도 여럿 조문(弔問)을 왔었는데,
조문객(弔問客) 중에 남인계(南人系) 인사(人士)인 석학(碩學) "윤휴(尹鑴)"가 있었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송시열(宋時烈)은 매우 불쾌히 여겼다고 한다.

 

 

이런 냉냉한 상황에서

윤증(尹拯)은 스승인 송시열(宋時烈)을 찾아가

아버지의 묘지에 세울 비석의 내용인 묘갈명(墓碣銘)을 부탁했으니,
곱게 들어줄리 있었겠는가...
이때부터 사제지간(師弟之間)의 의리(義理)와 정(情)은 끊어지고,
둘 사이는 정적(政敵)으로 변해 사사건건(事事件件) 대립한다.

 

 

여기서 잠시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의 탄생(誕生) 배경을 들여다 보면...
경신환국(庚申換局) 후 정적(政敵)인 남인(南人)들을 제거한 서인(西人)들이

남인(南人)들 처분을 놓고 서로 의견이 대립하면서,
강경파(强勁派)와 온건파(穩健派)로 분열되기 시작한다.
강경(强勁)하면서 주로 나이가 많은 측은 우암(
尤庵)쪽으로 모이다 보니

수장(首長)은

날아가는 기러기도 헛기침소리로 떨어뜨린다는 세도(勢道) 당당한 우암(尤庵)이었고,

 

온건(穩健)하며 비교적 젊은 관리들은 명재(明齋)를 중심으로 모여들자 

윤증(尹拯)를 영수(領袖)로 추대한다.
이때부터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은 물고 뜯는 파별(派閥)의 정쟁(政爭)에 본격 휘말리며,
많은 인명 피해와 국력(國力)이 소모되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역사(歷史)에 남겼다.

 

 

그러면 남인(南人)은 뭐고 서인(西人)은 또 무엇인가~?.
1575년 선조(宣祖) 시절부터 동(東)과 서(西)의 분당(分黨)을 기점으로 나눠어지게 되나 그 뿌리는
윗 대의 훈구파(勳舊派)와 사림(士林)으로까지 이어지는
복잡하고 미묘한 파벌(派閥)의 갈래중 하나이다.

조선(朝鮮)의 역사(歷史)에서 가장 무능한 임금이 선조(宣祖)로,

병자호란(丙子胡亂)과 임진왜란(壬辰倭亂)도 선조(宣祖) 때 일어났다.

당파(黨派) 싸움도 선조(宣祖) 때 가장 심했으며 세자(世子)가 독살당하는 사건도 이때였다.

요즘말로 전방위(全方位) 부실덩어리 정부(政府)였다.

따라서 백성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苦痛)은 그야말로 극에 달한 시절이었다.

 

 

이토록 임금이 부실하다 보니

세도(勢道)께나 부리는 관리(管理)들은 파벌(派閥)을 형성하여

무능한 임금에게 압력(壓力)을 가하기에 이른다.

신진세력(新進勢力)이었던 김효원(金孝元)과 외척세력(外戚勢力)이었던 심의겸(沈義謙)이,
각각 붕당(朋黨)을 형성하며 조정(朝廷)에서 알력다툼을 일삼았다.
그런데 심의겸(沈義謙)의 집이 서울의 "서쪽"인 정릉방(貞陵坊:정릉)에 있었고,
김효원(金孝元)의 집은 "동쪽"인 건천동(乾川洞:인현동)에 있었으므로

각각의 지지자들을 모아 파벌(派閥)을 형성하면서,
"서인(西人)" "동인(東人)"으로 자연스럽게 나누어진데서 그 이름이 유래한다.

 

 

이중 "동인(東人)"에서 다시 갈라져 나온 파벌(派閥)이 "남인(南人) 북인(北人)"다.
당시 정권(政權)을 잡은 동인(東人) 내부에서
서인(西人)이었던 정철(鄭澈)의 세자(世子) 책봉(冊封)에 관한 문제로 생겨난

강경파(强勁派)와 온건파(穩健派)의 대립에서 기인하였다.
온건파(穩健派)의 남인(南人) 계열은 이황(李滉)과 유성룡(柳成龍)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고,
강경파(强勁派)였던 북인(北人)은 이산해(李山海)와 이발(李潑)을 중심으로 뭉치게 된다.
그러나 얼마후 다시 서인(西人)이 득세(得勢)하여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갈라져 정쟁(政爭)을 벌이자
이들의 파벌(派閥)들도 자연스레 소멸되고 만다.

 

 

동인(東人)과 서인(西人) 그리고 남인(南人)과 북인(北人)...
이 복잡한 파벌(派閥)의 실타래를 풀려면,
조선(朝鮮) 중기부터 형성된 문제로 매우 복잡하고 미묘하다.
그들이 서로 파벌(派閥)을 형성하여 대립하게된 연유는

그 뿌리가 깊기에 일일이 열거하기가 방대하다.
따라서 지금은 윤증(尹拯)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중이라 남인(南人)이니 서인(西人)이니 하는

파벌(派閥)의 뿌리깊은
정쟁(政爭)은 나중에 기회가 있을 때 다시 논(論)하기로 한다.

 

 

이쯤에서 다시 원론(原論)으로 돌아와 두 파벌(派閥)을 이끌었던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의,
당시 유교적(儒敎的) 사상(思想)을 배경으로 한
대외적(對外的) 견해차(見解差)를 잠시 짚어보고자 한다.

 

 

16세기 이래로 변화해온 당시 사회(社會)를 보는 시각차(視角差)에서도

우암(尤庵)과 명재(明齋)는 크게 달랐다.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 야기된 국제질서(國際秩序)의 변화에 따라

멸망(滅亡)한 명(明)나라를 끝까지 섬기겠다며
의리(義理)을 중히 여기고,
조선(朝鮮)은 명(明)나라의 정신적(精神的) 사상(思想)을 이어받은 나라라면서,
명(明)나라에 뿌리를 둔 "숭명의리파(崇明義理派)" 즉 송시열(宋時烈)이 이끄는 노론(老論)과,
명(明)이 멸망하고 새로 들어선 청(淸)나라를 인정하며 실리적(實利的) 외교관계(外交關係)를 주장(主張)한,
"대청실리외교파(代淸實利外交派)" 즉 윤증(尹拯)이 이끌던 소론(少論)의 입장은
이처럼 완전히 달랐다.

 

 

조선(朝鮮)의 경제적(經濟的) 빈곤(貧困)은
주자학적(朱子學的) 의리론(義理論)과 명분론(名分論)만으로는

결코 해결할수 없다면서,
현실(現實)에 바탕을 둔 역사적(歷史的) 소명(召命)을 제기하며

반기(反旗)를 든 것이 소론(少論)이다.

 

 

그러나 노론(老論)은
이자성(李自成)이 이끄는 농민(農民) 반란군(叛亂軍)의 봉기(蜂起)로

쇄약해진 명(明)나라가 결국 멸망하자,
송시열(宋時烈)을 비롯한 노론(老論)들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명(明)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고 통곡(痛哭)을 한다.
정신적(精神的) 종주국(宗主國)이 망했는데,
무슨 관직(官職)이 소용있느냐며 사직(辭職)하고 낙향(落鄕)하여 은둔(隱遁)하거나,

일부는 서당(書堂)이나 향교(鄕校)를 세우고 유생(儒生)들을 길러내며 성리학(性理學)을 전파하는데
전력투구(全力投球)하는 인사들이 많았었다.
그야말로 사대사상(事大思想)이 뼛속 깊이 자리잡은 그들이었다.

 

 

아무튼 명재(明齋)는 이곳 향리(鄕里)에서

머나먼 한양(漢陽)의 조정(朝廷)을 꽤뚫어보며 원격정치(遠隔政治)를 시행한,
무관(無官)의 실세(實勢)였다.
이는 그를 따르는 세력(勢力)과 당시 조정(朝廷)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며,
강력한 리더쉽(leader ship)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윤증(尹拯)은 1714년(숙종 40년) 1월 24일 86세의 긴 삶을 이곳 노성에서 마감했다.
그는 유언(遺言)으로...
"묘표(墓表)에는 재호(齋號), 선생(先生)이라는 표현 대신
"징사(徵士: 군왕(君王)이 벼슬을 내리려고 불러도 나가지 않은 선비)"라고만 간단히 쓰라 당부했다.
이는 평생 동안 징소(徵召)의 은혜(恩惠)를 입은 것을 잊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후손(後孫)들에게
지나친 이익(利益)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면서 당시 돈벌이가 좋았던 양잠(養蠶)을 금지시켰다.
그의 이런 검소한 태도는 고결한 선비 정신의 실천(實踐)으로

후대(後代)에도 높이 평가(評價)를 받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곳에 와서 느꼈지만 사대부가(士大夫家) 치고는 집 규모가 외소하리만치 자그마한 모습에 사뭇 놀랐다.

노성향교(魯城鄕校)와 담 하나를 두고 붙어있는 모습이 멀리서 보면 마치

향교(鄕校)의 별채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수많은 문객(文客)들로 늘 북적거렸을 사랑채도 그렇고...

이는 대대로 내려온 검소한 생활이 가풍(家風)을 형성했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이곳 황산벌은 전국에서 몇 손가락에 꼽는 드넓은 곡창지대(穀倉地帶)로 유명하다.

이런 풍요로운곳에 자리한 명재(明齋) 고택(古宅)이지만

전국의 사대부가(士大夫家) 중에서 가장 검소하고 소박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느껴지는 바가 실로 컸다.

아무튼 이런 연유하고는 상관 없겠지만,

그의 집안은 동학(東學)과 6.25 동란 때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명재(明齋) 윤증(尹拯)은 향리(鄕里)에 머물면서

평생을 학문(學文)에 몰두하며 후학(後學)을 양성하고 정치(政治)에 깊이 관여했지만,
벼슬은 한사코 사양했다.
그러나 막후정치(幕後政治)의 실세(實勢)로서 그의 위상(位相)과 영향력(影響力)은 실로 대단했다.
조정(朝廷)을 이끌어가는 쌍두마차의 한 축인 소론(少論)을 이끌며

스승인 우암(尤庵)과 당당히 맞섰던 그의 파워(power)는
조정(朝廷)을 좌지우지(左之右之)할 정도로 실로 크고 강했다.

 

 

윤증(尹拯)이 세상을 떠나자 숙종(肅宗)은 안타까워하며 스스로 존엄(尊嚴)을 낮추고,
다음과 같은 추모시(追慕詩)를 내렸다.

儒林尊道德(유림존도덕): 유림은 도덕을 숭상하고
    小子亦嘗欽(소자역상흠): 소자도 일찍이 흠앙했다오.
        平生不識面(평생불식면): 평생 한 번 만나보지 못했기에
           沒後恨彌深(몰후한미심): 사후에 한이 더욱 깊어지는구나.

 

 


"그를 흠모(欽慕)하고 존경(尊敬)하는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조문객(弔問客)이 자그마치 2300명이 넘었다" 라고

문헌(文獻)은 전하니...
글줄께나 읽는다는 당시 조선(朝鮮)의 선비들은

거의가 문상(問喪)을 다녀갔다 해도 큰 과언은 아닐 것이다.
당시 윤증(尹拯)이 차지하는 정치적(政治的) 위상이 얼마나 컸었는지 짐작이 가는 일이다.

 

 

이상으로...

명재(明齋)선생이 살았던 시대적(時代的) 상황을 살펴보기 위해 일부 문헌(文獻)을 참조하면서,
내가 알고있는 상식선(常識線)에서 생각해본 내용들을 나름 쉽게 서술(敍述)해 본다고 했다.
내 자신 역사학자(歷史學者)도 아니고

그렇다고 역사(歷史)을 심도있게 공부한 적도 없는지라,
더러는 중요한 부분이 누락(漏落)되었거나 사실(事實)과 다르게 잘 못 알고 있을수도 있다는 점

널리 양해(諒解)를 구하는 바이다.

 

그리고 중간 중간에 연견고리들을 생략한 부분이 많음을 밝혀둔다.
레포트(report) 형식(形式)이나 논술형(論述形)이 아닌

사진에 보충설명을 달아 기술(記述)하는 약식(略式)을 취하다 보니 부득이한 사정이었다.
어려운것을 쉽게 풀어놓는 것이 제대로 된 실력(實力)이라 했는데...
오히려 더욱 헛갈리게 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조선(朝鮮)의 중, 후기 역사(歷史)는 당파(黨派)싸움으로 얼룩져

국력(國力)을 대부분 소진하다보니,
청(淸)과 왜(倭) 등 외세(外勢)의 침략에 시달리며

굴욕(屈辱)을 겪어야 했던 암울한 시기(時期)로,
우리 민족(民族)의 역사(歷史)에서

가장 무기력(無氣力)하고 굴욕적(屈辱的)인 시대였슴을 부정할 수는 없다.

 

 

역사(歷史)는 우리에게 반듯이 크든 작든 지난일에 대한 교훈(敎訓)을 일깨우지만,
그 교훈(敎訓)을 금새 망각(忘却)하고 지난날의 그릇된 전철(前轍)을 다시 밟아가는 것이

역사(歷史)의 보편적(普遍的) 흐름이고 보면,
"역사(歷史)는 수래바퀴처럼 돌고 돈다"
영국의 사학자(史學者) 아놀드 조셉 토인비 (Arnold Joseph Toynbee)의 명언(名言)에

탄복(歎服)하지 않을 수 없다.

 

 

충남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
내가 사는 대전에서 그리 멀잫은 곳인데도 불구하고 이런 저런 이유들로 그간 찾질 못했었다.
온 세상이 겨울 한파로 얼어붙은 오늘

명제(明齋) 윤증(尹拯) 고택(古宅)을 찾았다.
백의정승(白衣政丞)으로 불리며 조선(朝鮮) 후기(後期) 파벌정치(派閥政治)의 극한 대립에서
소론(少論)의 관리(管理)들을 이끌며,
지난날 학문적(學文的)스승이었던 노론(老論)의 거목(巨木) 우암(尤庵)과 정면으로 맞서야 했던

아픈 가족사(家族史)를 짚어보며,
불굴(不屈)의 리더쉽(leader ship)에 대하여 다시한번 생각해보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