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명재(明齋) 윤증(尹拯) 고택(古宅)...
"백의정승(白衣政丞)"
추운 겨울날 대가집을 찾아가는 이유는...
사대부가(士大夫家)의 건물 형태(形態)와 보존(保存) 가치(價値), 그리고 입지조건(立地條件)을 보고싶어
가는 것이 아니다.
지체높은 양반들의 대가집은 전국 곳곳에 산재해 있다. 그리고 그간 많이 찾아보기도 했었다.
오늘 내가 논산의 고가(古家)를 찾아가는 목적은 이곳에서 평생을 살았던,
조선(朝鮮) 후기(後期)의 선비
명재(明齋) 윤증(尹拯) 선생의 행적(行跡)과 리더쉽(leader ship)을 돌아보기 위해서이다.
1709년에 건립되었다는
이 고택(古宅)의 옛 주인 명재(明齋) 윤증(尹拯)은 뛰어난 학행(學行)으로 유명한 선비였다.
그는 과거(科擧)에 급제(及第)하거나 시험을 본적도 없지만,
이조판서(吏曹判書)를 비롯한 우의정(右議政) 등 열 여덜 차례에 걸쳐 벼슬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평생 학문(學文)과 후학(後學) 양성(養成)에 전념하면서,
조정(朝廷)의 관리(管理)들을 이끌고 국정(國政)에 깊이 관여했던 막후(幕後) 실세(實勢)로
백의정승(白衣政丞)으로 불리는 무관(無官)의 관리(管理)였다.
명재(明齋)는 젊은시절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문하(門下)에서 수학(修學)한 제자(弟子)이기도 했으나,
서인(西人)이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갈라질 때 소론(少論)의 영수(領袖)로 추대되어,
노론(老論)의 수장(首長)인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과 정면 대립하며
조선(朝鮮) 후기(後期) 파벌(派閥) 정치사(政治史)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인물이다.
윤증(尹拯)은 자가 자인(子仁)이고 호는 명재(明齋)이며 죽은 후 제수받은 시호(諡號)는 문성(文成)이다.
명재(明齋)라는 호는 큰아버지 윤순거(尹舜擧)가 지어준 것이라 한다.
본관(本貫)은 파평(坡平)으로 고려시대(高麗時代)부터 유서(由緖) 깊은 명문가(名門家)였다.
윤증(尹拯)의 외형적(外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생환(生還)한 아버지 윤선거(尹宣擧)의 부끄러운 행동이,
윤증(尹拯)의 인생(人生) 전반에 커다란 멍에가 되어 삶의 무게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윤증(尹拯)의 부친(父親) 윤선거(尹宣擧)는 인조(仁祖) 때 생원시(生員試)에 급제하여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 수학할 정도로 향리(鄕里)에서는 수재(秀才)소릴 들었었다.
그런 그가 1636년 12월 청(淸) 태종(太宗)이 12만 명의 대군(大軍)를 이끌고 처들어오는 "병자호란(丙子胡亂)"이 터지자,
인조(仁祖)는 세자(世子)를 앞세우고 인근의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나머지 왕실(王室)은 강화도로 급히 피난(避亂)을 떠난다.
이때 윤선거(尹宣擧)도 왕실(王室)을 따라 강화도로 가게 되었고,
성문(城文)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는데
뒤따라 처들어온 청군(淸軍)의 위세(氣勢)에 눌려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점령당하고 만다.
청군(淸軍)은 성(城) 안으로 진입하여 닥치는대로 살육(殺戮)을 자행하자,
그의 아내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러나 윤선거(尹宣擧)는 관복(官服)을 벗어던지고 평민(平民)의 옷으로 갈아 입고 몰래 성(城)을 빠져나가 겨우 살아남게 된다.
이 치욕(恥辱)의 병자호란(丙子胡亂)은
강화도로 피난을 간 황실(皇室)이 청군(淸軍)에 점령당하고,
인조(仁祖)의 아들인 봉림(鳳林)과 인평(麟坪) 두 대군(大君)과 숙의(淑儀)와 빈궁(嬪宮)마저 붙잡혀
한양(漢陽)으로 압송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인조(仁祖)는 1달 남짓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버티다 결국 항복(降伏)하고는 성문(城門)을 열고 나온다.
그리고는 삼전도(三田渡) 즉 오늘날의 송파구 삼전동 부근으로 끌려가,
청(淸) 태종(太宗) 앞에서 무릅을 꿇고 언 땅에 이마를 아홉 번을 내리치며 용서(容恕)를 비는
모욕적(侮辱的)인 항복의식(降伏儀式)을 치뤄야 했다.
또한 강압(强壓)에 의한 청(淸)과 비굴한 강화조약(講和條約)을 맺어야 했으며,
수십 만 명에 달하는 조선(朝鮮)의 백성들이 청(淸)으로 끌려가는 엄청난 피해와 굴욕(屈辱)에 시달려야 했던 오욕(汚辱)의 사건이다.
이 뼈 아픈 사건(事件)은 "삼전도비(三田渡碑)" 즉 "삼전도청태종공덕비(三田渡淸太宗功德碑)"에 고스란히 세겨져,
그날의 치욕(恥辱)을 오늘날까지 생생히 전하고 있다.
그후 윤선거(尹宣擧)는 비겁하게 살아남은 자신을 후회하며 관직(官職)을 사직(辭職)하고 금산(錦山)으로 내려가,
김장생(金長生)의 아들인 김집(金集)의 문하(門下)에서 유학(儒學) 공부에만 전념한다.
스승 김집(金集)이 죽은 후에도 출사(出仕)를 하지 않고
평생을 학문(學文) 연구(硏究)에만 바쳐 성리학(性理學)의 대가(大家)로 이름을 떨치게 된다.
그 와중에도 여러 차례 조정(朝廷)의 부름을 받고 관직(官職)에 임명되었으나,
지난날 관리(官理)로서 비굴하게 살아남은 일과 자살한 아내에 대한 미안함을 자책(自責)하며 모두 거절하고,
오로지 자성(自省)과 학문(學文)에만 정진(精進)하다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들 윤증(尹拯)은 28세 때 큰 스승인 송시열(宋時烈)과 만나게 된다.
부친(父親)의 스승이기도한 김집(金集)의 추천과 권유로 회덕(懷德) 현재의 대전시 대덕구 읍내동으로 가서,
22세 연상의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을 만나
그의 문하생(門下生)이 되어 학문적(學文的) 가르침을 받으며 스승으로 섬긴다.
윤증(尹拯)은 자신의 가문(家門)이 고려시대(高麗時代)부터 명문가(名門家)으로 성장해온 자긍심(自矜心)과,
가문(家門)을 일으킨 선조(先祖)들에 대한 공경심(恭敬心)이 매우 컷다.
그런데 극도의 혼란중에 일어난 부친(父親)의 부적절한 행동은,
두고두고 삶의 무게로 작용한다.
따라서 윤증(尹拯)은 스스로 과거(科擧)와 벼슬길을 일지감치 포기했다.
하지만 학문(學問)에 대한 열정(熱情)은 부친(父親)처럼 오히려 더욱 강렬해져,
이미 30대 초반에 문하생(門下生) 중에서 학문적(學問的)으로 두각(頭角)을 나타내며 상당한 명망(名望)을 얻게 된다.
1658년 효종(孝宗)이 학문(學文)과 행실(行實)이 뛰어난 선비(鮮卑)를 천거(薦擧)하라는 어명(御命)을 내리자,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라는 직책과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 천거(薦擧)된다.
그러나 두 직책(職
"명재연보(明齋年譜)"에 따르면
“이때부터 윤증(尹拯)의 명망(名望)과 실덕(實德)이 조정(朝廷)에 알려지게 되며 점차 높아졌다" 라고 쓰고 있다.
그뒤 윤증(尹拯)의 일생은
"징소(徵召": 벼슬을 권유하면서 부름)와 "사직(辭職)"의 과정이 반복된 삶이었다고 볼 수 있다.
조정(朝廷)에서는 그의 학문적(學文的) 깊이와 인간적(人間的) 됨됨이가 실로 모범적(模範的)이라 하여,
크고 작은 수 많은 벼슬을 내렸지만 모두 거절한다.
첫머리에서 언급한데로 이조판서(吏曹判書)와 우의정(右議政)을 비롯해 모두 18차례에 걸친 벼슬을 제수 받았던 그였다.
그는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41세 때 스승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과
사제지간(師弟之間)의 인연(因緣)을 끊고 절교(絶交)하는 엄청난 일이 벌어진다.
그 발단은 1673년 11월, 윤증(尹拯)의 부친(父親) 윤선거(尹宣擧)가 죽자,
윤증(尹拯)은 부친(父親)의 비석에 세겨넣을 내용인 묘갈명(墓碣銘)을 스승인 우암(尤庵))에게 부탁하면서 일어난다.
이 사건을 일러 "회니시비(懷尼是非)"라 하는데,
명칭의 유래(由來)는 송시열(宋時烈)이 사는 곳이 대전의 회덕(懷德)이고,
윤증(尹拯)은 논산의 이성(尼城)이어서 그 첫 글자(字)를 따서 "회니시비(懷尼是非)"라고 역사(歷史)는 적고 있다.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 했는데,
스승과 제자가 공경(恭敬)과 사랑은 커녕 서로를 비판하고 정쟁(政爭)으로 대립하는 회니시비(懷尼是非)라니...
나는 동서고금(東西古今)을 통한 역사(歷史)에서
이처럼 가슴 아픈 사제지간(師弟之間)은 일찍이 본적이 없다.
그것도 인(仁)으로 효(孝)와 덕(德)과 충(忠)을 목슴처럼 강조하는 공자(孔子)의 가르침을 사이에 두고서 말이다.
이찌됐던 간에
사제지간(師弟之間)이 갈라진 이유를 들여다보면...
송시열(宋時烈)은 윤증(尹拯)이 부탁한 부친(父親) 윤선거(尹宣擧)의 묘갈명(墓碣銘)에서,
윤선거(尹宣擧)의 생몰년(生沒年)과 관력(官歷)을 간단히 적고나서,
“나는 공(公)에게 견주면 뽕나무벌레와 학(鶴) 이상으로 현격한 차이가 있는 사람이어서 그 내면의 깊은 부분을 엿보기에 부족하다.
더구나 덕(德)을 서술하는 글을 쓰려니 더욱 아득해 어떻게 말을 만들어야 할지 모르겠다”라고 비꼰 뒤,
박세채(朴世采)의 행장(行狀)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는“진실한 현석(玄石): 박세채의 호)이 참으로 잘 선양(煽揚)했기에
나는 따로 서술하지 않고 그대로 따라 이 묘갈명(墓碣銘)을 지었다".라고 썼으며,
윤선거(尹宣擧)의 생환(生還)을 못마땅히 여기고 다소 야유적(揶揄的) 표현을 사용해 적어주었다.
원문(原文)의 내용은 이렇다. "(允矣玄石, 極其揄揚, 我述不作, 揭此銘章)"
이에 윤증(尹拯)은 크게 당혹해 했고,
그 뒤 스승인 송시열(宋時烈)을 4~5년 간 거듭 찾아가 고쳐줄것을 부탁했지만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이로써 두 사람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돌이킬수 없는 사이로 갈라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두 사람이 서로를 비방하며 적대시하게 된 근본(根本) 원인(原因)은,
윤선거(尹宣擧)의 묘갈명(墓碣銘)에 관한 일보다 훨씬 이전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당시 성리학(性理學) 분야의 최고 석학(碩學)으로 불렸던 "윤휴(尹鑴)"에 대한 평가를 두고,
윤증(尹拯)의 아버지 윤선거(尹宣擧)와 송시열(宋時烈) 사이에 의견이 서로 다른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송시열(宋時烈)도 한때 윤휴(尹鑴)의 학문(學文)을 높이 평가하며 칭송했으나,
윤휴(尹鑴)가 "주자(朱子)의 서(書)"에 대하여
자신만의 새로운 해석(解釋)을 하여 주(註)를 달아 "독서기(讀書記)"라는 주석서(註
송시열(宋時烈)은 윤휴(尹鑴)를 "사문난적(斯文亂賊)" 즉 성리학(性理學)이나 유교(儒敎) 이념(理念)을 반대(反對)하는 사람으로 몰아부치며
강력하게 비판을 가한다.
반면 윤선거(尹宣擧)는 윤휴(尹鑴)의 견해(見解)를 긍정적(肯定的)으로 평가하며 받아들였다.
하지만 주자(朱子)를 절대적(絶對的)이고 완벽한 사상(思想)으로 평가(評價)하고,
이견(異見)이나 새로운 해석(解釋)이 필요하지 않는 대상(對象)으로 이해했던 송시열(宋時烈)과는 의견이 배치되기에 이른다.
윤선거(尹宣擧)는 이러한 윤휴(尹鑴)의 학문(學文)을 두고 송시열(宋時烈)과 논쟁(論爭)을 벌였다.
이에 송시열(宋時烈)이 격분하자,
윤선거(尹宣擧)는 윤휴(尹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더 이상 표면으로 드러내지 않았고 이로써 일단락 짓는다.
하지만 윤증(尹拯)이 송시열(宋時烈)에게 부친(父親) 윤선거(尹宣擧)의 묘갈명(墓碣銘)을 부탁하는 과정에서,
지난날 윤선거(尹宣擧)가
윤휴(尹鑴)의 학문(學文)을 높게 평가하며 윤휴(尹鑴)와 주고받은 편지의 내용들을
송시열(宋時烈)에게 소상히 알리면서 문제가 다시 불거진다.
송시열(宋時烈)은 약간의 이견(異見)이 있었으나
그간 윤선거(尹宣擧)가 윤휴(尹鑴)에 대하여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진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사후(死後)에 그가 남긴 편지를 보니,
자신의 생각과 다르게 윤휴(尹鑴)를 높이 평가한 것을 이때 알게 된 것이었다.
우암(尤庵)은 마지못해 윤선거(尹宣擧)의 묘갈명(墓碣銘)을 짓는데...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강화도에서 비겁하게 살아 돌아온 것을 들춰내 비꼬면서 폄하(貶下)해 지어준 것이다.
부친(父
스승은 그 아픔을 덜어주기는 커녕 오히려 영원한 짐으로 만들어 비석에 새겨 후대(後代)에 남기려 했으니...
이 일을 계기로 윤증(尹拯)은
학문적(學文的) 스승인 송시열(宋時烈)에게서 등을 돌리게 된다.
(2부에서 계속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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