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식(曹植)의 칠보시(七步詩)를 소개하면서...
"동작대(銅雀臺)"라는 누대(樓臺)를 짓게 된 배경이,
조조(曹操)가 땅을 파다
우연히 오래전 물건인 구리로 만든 참새를 발견했고,
그 자리에 세운 누대(樓臺)를 "구리(銅)로 만든 참새"라하여
"동작대(銅雀臺)"라 이름지었다고 짤막하게 소개한 적이 있다.
어떤 얼토당토 않은 글에서는
공작이라거나 심지어는 봉황이라고 쓴 글들이 많은데, 이는 틀린 말이다.
바로 "작(雀)"이란 공작이나 봉황이 아닌 "참새"를 말하는 것이다.
웅장한 동작대(銅雀臺)를 지었다는 곳이
업성(鄴城)의 북서쪽 장하(長河)라는 강에서 가까운 곳이라고 하는데,
동작대(銅雀臺), 옥룡대(玉龍臺), 금봉대(金鳳臺) 등 세 채의 건물이 이여진
몹시 크고 화려하게 치장한 누대(樓臺)였다고 전한다.
그 안에는 천하의 미녀들을 가려뽑아 가득 채웠다고 하는데...
조조(曹操)는 삼국에서도 소문난 호색한(好色漢)으로 여색(女色)을 매우 즐겼었다.
영웅호걸(英雄豪傑) 치고 미인(美人) 마다할 자(者) 누가 있겠는가만서도,
조조(曹操)는 좀 특이하고 나쁜 버릇이 있었다.
처녀들보다는 유독 유부녀(有夫女)들에게 눈독을 들이고 군침을 흘렸다.
그는 싸움에서 이기면 늘 그 성(城)의 성주(城主)나 장수(將帥)들의 아내나 첩(妾)들을
자신의 첩(妾)으로 맞이하는 요상한 버릇이 있었다.
한번은 장제(张悌)의 아내를 자신의 첩으로 만들었다가
장제(张悌)의 동생 장수(張繡)에게,
맏아들 조앙(曹昻)과 심복 부하장군 전위(典韋)를 비롯해 많은 병사들을 죽게 만들었다.
조조(曹操) 자신도 죽을 뻔했다가
큰 아들 조앙(曹昻)의 말을 대신 얻어 타고 도망쳐 겨우겨우 살아난 적이 있다.
그러나 쥐 버릇 개 못 주 듯,
두 번의 관도대전(官渡大戰)에서 막강한 원소(袁紹)를 이긴 그는
원소(袁紹)의 부인들과 첩들을 자신의 첩(妾)으로 거두어들였고
심지어는 여포(呂布)의 아내였던 초선(貂蟬)까지 탐을 냈었다.
초선(貂蟬)은
의붓 아버지 왕윤(王允)의 수양딸로 곱게 자랐다.
미색(美色)과 교태가 튀어나
동탁(董卓)을 잡는데 "연환계(連環計)"로 이용됐던 여인이다.
당시 삼국(三國)의 여러 여성들 중 가장 미색이 출중한 여인으로 손꼽힌다.
"연환계(連環計)"란 중국의 오랜 병법(兵法) 중 하나로,
쇠고리가 연이어 연결된 연환(連環)과 같이
계략(計略)을 연속적으로 이어가며 사용하는 물귀신 병법(兵法)을 말한다.
역대 중국을 대표하는 4대 미인이라 하여
"서시(西施), 왕소군(王昭君), 초선(貂蟬), 양귀비(楊貴妃)"를 꼽는데 여기에 초선(貂蟬)이 포함 된다.
한실(漢室)의 고위직 신하로 있던 왕윤(王允)이
포악한 공포 정치를 일삼는 동탁(董卓)의 전휭을 참다 못해 계략(計略)를 냈는데,
동탁(董卓)과 여포(呂布)사이를 오가며 이간질로 갈라 놓고,
여포(呂布)로 하여금 질투심을 일으켜
양아버지인 동탁(董卓)을 죽이도록 만드는데,
전략적으로 이용됐던 비운의 여인이 당시 열 일곱살의 초선(貂蟬)이었다.
동탁(董卓)은 양아들로 맞은 여포(呂布)를 앞세우고
무력으로 황궁을 접수하자마자 전휭을 휘둘러
당시 황제인 소제(少帝)를 강제로 폐위시키고
허수아비인 9살의 어린 헌제(獻帝)로 바꿔어버렸다.
그리고는 자신의 뜻에 따르지 않은 대신들은 그 자리에서 잔인하게 처형하여,
그 피를 술잔에 타서 나머지 대신들에게 강제로 나누어 마시게 하는 등
공포 정치를 자행했던 삼국(三國) 역사상(歷史上) 가장 포악한 인물로 꼽힌다.
아무튼... 계략(計略)이 성공하여 동탁(董卓)이 여포(呂布)의 창에 찔려 죽었다
얼마 후 여포마저 동탁의 부하 장수들에게 쫏겨나고
왕윤(王允)도 스스로 세운 계략에 걸려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자,
초선(貂蟬)은 거리낌없이 여포(呂布)를 따라 나섰으며 그의 곁을 늘 함께했다.
그녀는 여포(呂布)의 용맹과 순진함을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사랑했으며,
여포(呂布) 역시 초선(貂蟬)을 애지중지하며 죽는날까지 아끼고 사랑했다.
훗날 여포(呂布)가 조조(曹操)에게 잡혀 처형당하자,
그도 스스로 목슴을 끊고
여포를 기꺼이 따라갔던 지순한 여인이기도 하다.
조조는 여포를 처형하면서
"초선(貂蟬)은 절대로 죽이지 말라"고 신신 당부했으나,
초선(貂蟬)이 스스로 목슴을 끊고 지아비 곁으로 가자
한동안 매우 아쉬워했다고 문헌은 전한다.
그리고 두 여인이 있었는데...
바로 아래에 소개한 시(詩)를 제갈양(諸葛亮)이 교묘하게 바꿔서
동오(東吳)의 대도독(大都督) 주유(周瑜)를 격노시켰던 주인공의
아름다운 여인들이 바로 "대교(大喬)와 소교(小喬)"라고 불리는 두 자매였다.
강동(江東)의 명망 높은 가문인 교공(喬公)의 딸들로 큰 딸은 "대교(大喬)요,
작은 딸은 소교(小喬)"라고 불렸는데,
어찌나 아름다운지 물고기가 물에 숨 듯 기러기가 모랫벌에 내려앉 듯,
매혹적인 자태에 달이 빛을 잃고,
꽃이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는 등 천하미색(天下美色)을 지녔다고 한다.
당시 삼국(三國)의 형세(形勢)는
조조(曹操)가 황제인 헌제(獻帝)를 볼모로 잡고 세력을 뻗어가던지라
삼국 중 조조의 세력이 단연 우세하던 시기였다.
조조(曹操) 진영에는 순욱(荀彧)을 비롯한 곽가(郭嘉), 정욱(程昱) 등...
지략을 겸비한 많은 책사들과
허처(許褚)를 비롯해 조인(曹仁) 등 용맹한 장수들이
일천 명이 넘고 이백만 명에 가까운 막강한 군사력을 자랑라던 때였다.
유비(劉備)는 손권(孫權)의 그늘에서 벗어나
겨우겨우 독자적으로 세력을 모아 틀을 잡아가고 있었고,
손권(孫權)은 강동(江東)에서 명석한 판단력과 지략에서 뛰어난
대도독(大都督) 주유(周瑜)와 군사(軍師) 노숙(魯肅)을 비롯한 황개(黃蓋), 정보(程普) 등
지장(智將)들과 책사들이 많았지만,
군사력(軍事力)은 조조(曹操)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약 이십만 명이 좀 넘는 군사력(軍事力)을 확보한 상태였다.
또한 손견(孫堅)의 뒤를 이어 정권을 잡았던
큰 아들 손책(孫策)이 독화살을 맞고 죽는 날벼락 같은 일이 일어나자,
얼떨결에 동오(東吳)를 물려받고 등극한 바로 밑 동생 손권(孫權)이
스무살을 겨우 넘긴 터라 내외적(內外的)으로 매우 불안한 시기였다.
조조(曹操)에게 항복을 해
조공(朝貢)을 바치고 굽신거리며 명맥을 이어가느냐...
아니면, 대적해서 입지를 굳건히 다지고 천하을 평정하는 야심을 키우냐 등을 놓고
내부적으로 갈등이 심했었다.
사실 동오(東吳)에는 조조에게 조공을 바치며
조약을 맺고 후일을 도모하자는 문신(文臣)들의 간언이 빗발쳤고,
전쟁를 불사하자는 장수들의 간언(諫言)보다
문신들의 항복하자는 분위기가 우세했던 게 당시 동오(東吳)의 실정였었다,
왜냐하면 군사력이 턱없이 부족한 동오(東吳)는
이십만 대군으로 조조(曹操)의 백만 대군에 맞서서 싸울 능력이 없었다.
이러다 보니 한편으로는 유비(劉備)에게 손을 내밀어 도움을 청해
연합작전을 준비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조조(曹操)에게 항복해
굴욕을 당하더라도 안전을 확보하는 쪽을 택하느냐를 놓고 골치가 아펐다.
동오(東吳)의 주공인 손권(孫權)은 어린 나이에 대권을 이어받은지라
내실은 경륜 많은 장소(張昭)에게 자문을 구했고,
국방과 외교는 대도독(大都督) 주유(周瑜)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던 때였다.
이때 장소(張昭)는 강력하게 조조(曹操)에게 항복할 것을 간하던 터였다.
유비(劉備) 진영에서 보자면
조조(曹操)에게 항복한다는 것은 동오(東吳)와 촉(蜀)의 멸망을 의미했다.
조조(曹操)가 동오(東吳)를 치고나면
세력이 너무 커져 유비(劉備)가 대항한다 해도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이며,
손권(孫權) 다음으로 유비(劉備) 차례란 것은 뻔한 이치였다.
그런고로 유비(劉備)의 명분과 야망인
한(漢)을 재건하려던 꿈을 접는 일인지라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이며,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조조(曹操)와 대적하는 길만이 유일하다 보니
동오(東吳)와 연합을 형성하여 어떻하든 조조(曹操)와 맞서야 했다.
이 일을 성사기키고자 파견 된 책사(策士)가
천하의 지략가(智略家) 제갈량(諸葛亮)이었다.
판세를 놓고 이리저리 문무백관(文武百官)들의 간언(諫言)을 저울질하던
동오(東吳)의 대도독(大都督) 주유(周瑜)는,
유비(劉備)의 책사로 동오(東吳)에 파견 된,
말로만 듣던 지략의 천재 제갈량(諸葛亮)을 만나게 된다.
항복이냐 결전이냐를 놓고 결정을 못하고 고심하던 주유(周瑜)는
결국 제갈량(諸葛亮)의 계략에 말려들어
불 같이 화를 내며 전쟁을 택하게 되는데...
바로 이것이 삼국의 수도없이 많은 전투 중
가장 크고 치열했던 "적벽대전(赤壁大戰)"이며,
제갈량(諸葛亮)의 계략(計略)과 주유(周瑜)의 작전(作戰)이 만들어낸 완벽한 연합 승리로,
전쟁 역사에 길이 남을 백미(白眉)로 꼽히는 전투이다.
제갈량(諸葛亮),
주유(周瑜)의 속을 뒤집어 놓다... !.
제갈량(諸葛亮)이 주유(周瑜)를 대면하면서 격노시켰던 유명한 일화는,
"조조(曹操)는 늘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길 내 큰 바램은 두가지인데,
하나는 사해(四海)를 쓸어 제업(帝業)을 이루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강동(江東)의 교공(喬公)의 두 딸들을 얻어 동작대(銅雀臺)에 두고
만년을 즐기는 일이니...
이 둘만 이루어진다면 죽은 들 무슨 한이 있겠는가~"라고
주변사람들에게 늘 말하곤 했다.
"따라서 조조(曹操)가 적벽(赤壁)에서 백만 대군을 이끌고
강동(江東)으로 내려오는 것은 순전히 이교(二喬)를 얻기 위함이다." 라며
주유(周瑜)의 화를 돋구었고.
그 증거가 바로 조조의 아들 조식(曹植)이 쓴
"동작대(銅雀臺) 부(賦)"란 글이라면서,
동작대(銅雀臺) 부(賦)의 내용을 교묘하게 고쳐서 읊으며
주유(周瑜)의 자존심에 심각한 상처를 남긴다.
원래 조식(曹植)이 쓴동작대(銅雀臺) 부(賦)의 내용에는...
"連二橋於東西兮(연이교어동서혜)두 다리(二橋)를 동서로 놓아 잇고"를
"攬二喬於東南兮(람이교어동남혜)교씨(喬氏)집 두 딸을 동남에서 끌어와서"로
슬쩍 바꾼 것이다.
글자가 엇비슷하다 보니 언듯 보면 잘 모른다.
그리고 "樂朝夕之與共(낙조석지여공)아침 저녁으로 함께 즐길지니라"
이 구절은 없는 것인데,
주유(周瑜)의 속을 뒤집어 놓기 위해
제갈량(諸葛亮)이 급조하여 붙여넣은 구절이었다.
"동작대(銅雀臺) 부(賦)"는 조조의 아들 조식(曹植)이 지었지만,
그 내용에 아버지 조조(曹操)의 소원이 담겨 있는 것처럼
제갈공명(諸葛孔明)이 조작했던 것이다.
"대교(大喬)"와 "소교(小喬)"는
이미 결혼을 한 유부녀의 몸이었다.
대교(大喬)의 남편은
동오(東吳)의 주공(主公)이었던 손권(孫權)의 형 손책(孫策)의 부인이고,
소교(小喬)는 바로 대도독(大都督) 주유(周瑜)의 아내였으니...
주유(周瑜)가 불같이 화를 낸 건 당연한 일이었다.
손책(孫策)은 아버지 손견(孫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어린 나이에
동오(東吳)를 이끌어 왔다,
그는 한창 나이인 이십대 후반에 어느날 사냥을 나갔다가
자객(刺客) 허소(許昭)의 독화살을 맞고 죽는다.
손책(孫策)은
아버지 손견(孫堅) 때부터 주유(周瑜)와 호형호제(呼兄呼弟)하던 사이로,
수많은 전쟁터를 함께 누비며 용맹을 떨쳤던 인물이다.
두 여인을 만난 것도 틈만 나면 주유와 함께 즐기던 사냥길에,
우연히 금(琴) 타는 소리를 듣고 찾아들어간 곳이 그 여인들의 집으로
그녀들을 보는 순간 한 눈에 반해 버렸고,
얼마 후 나이가 조금 많은 형 손책(孫策)이 대교(大喬)를 부인으로 맞았으며
뒤이어 주유(周瑜)가 소교(小喬)를 아내로 맞아 들였다.
주유(周瑜)는 제갈량(諸葛亮)의 능력을 늘 경계했으며
대전(大戰)을 준비하는 내내 제갈량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능력의 출중함에 위기감을 느껴
틈만 나면 제갈량(諸葛亮)을 죽이고자 끊임없는 묘책을 내기도 했다.
그때마다 제갈량은 미리 알아차리고 늘 앞서가며 노련하게 피해갔다.
그만큼 자기보다 뛰어난 능력을 지닌 제갈량(諸葛亮)을
주유(周瑜)는 죽는 날까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적벽대전이 끝나고 조조에게서 빼았은 전략적 요충지 형주성(形州城)를 놓고
유비(劉備)와 머릿싸움을 버릴 때,
유비(劉備)가 근거지로 삼고 있는 형주성(形州城)를 차지하고자,
주유(周瑜)는 제갈량(諸葛亮)과 대적했다가 제갈량(諸葛亮)의 계책에 걸려
독화살을 맞은 몸에 화가 치밀어 목슴이 위태로웠다.
적벽대전 직 후 주유(周瑜)는
조조(曹操)의 사촌동생 조인(曺仁)이 지키던 남군성(南郡城) 공격에 나섰다가
독화살을 가슴에 맞았다.
따라서 쉬어야 하는 몸인지라 안정이 최선이었건만,
형주(形州) 문제를 해결하고자 유비(劉備)측에서 제갈량이 나섰다는 소식을 듣고는
"또 그놈이냐~!"며 버럭 고함을 친다.
주유(周瑜)는 그 충격으로 피를 토하며 죽어가는 순간에도 하늘을 향해,
"하늘은 어찌하여
이 주유(周瑜)를 낳고
또 제갈량(諸葛亮)을 낳았나이까~!."
라며 울부짖었으니...
명석한 두뇌와 세상의 판세를 읽어내는 안목과 지략이 뛰어난 제갈량(諸葛亮)을,
주유(周瑜)는 생애 최대의 난적(難敵)으로 여겼다.
적벽대전(赤壁大戰) 이후 유비(劉備), 손권(孫權), 조조(曹操)가 이끄는 삼국(三國)이
솥발처럼 천하(天下)를 떠받든 형국이 되어 힘의 균형을 이루는 계기가 된다.
-주(註)-
"부(賦)"를 한마디로 설명키는 어렵다.
왜냐면 파생 된 종류와 범위도 많고 넓거니와
한(漢)나라부터 이어져 당(唐)나라를 거처
명(明), 청(靑)까지도 시대의 변천에 맞게 변모하며 근근히 이어졌기 때문이다.
부(賦)란...
기원전 한(漢)나라의 굴원(屈原)과 그의 추종자들의 문학인 "초사(楚辭)"의 뒤를 이어
한(漢)나라 때 생겨나고 성행했던 문학이며,
당나라 말기에는 서서히 시들면서 겨우 명맥만 유지해가던 문학의 한 분류로,
형식을 보면 운문(韻文)이라기 보다는 산문(散文)에 가깝다.
내용은 개성이나 개인의 감정은 사라지고
일정한 대상이나 물건을 서술하는 글로,
다시 말하면 운문(韻文)과 산문(散文)의 중간쯤 되는 문체(文體)라고 볼 수 있다.
시(詩)와는 다른 주고 받는 댓구의 구절이 들어 있는 것이 특징이며,
아부에 가까운 내용을 주로 담고 있다보니
노랫말로도 많이 이용 되곤 했다.
위진시대(魏晉時代)에는 주로 업적이나 사물을 칭송하는 내용이 많았다.
따라서 부(賦)는 여려 변천을 거치며 내려온
중국문학(中國文學)의 한 분류라고 보면 되지않을까 한다.
본 블로그는
학문적인 깊이와 문학적(文學的)인 내용을 전문으로 다루는
학술(學術) 블로그가 아니며,
그냥 취미로 읽고 스치는 간이역 같는 쉼터인지라,
뜻 깊은 내용과 학문적(學文的)으로 꼭 필요한 검증이 필요없음을 알리고자 한다.
따라서 어지러운 중국 삼국시대에 막강한 권력 가문에서 태어나
짧은 삶을 고독하게 살다 간,
한 인간(人間)의 고뇌찬 시심(詩心)을 중심으로
두어 편 더듬어 보는 시간을 마련했다.
지금 글을 쓰면서...
소설로 된 삼국지를 통해서도 "동작대(銅雀臺) 부(賦)"는
워낙 널리 알려진 글이지만,
어디에 촛점을 맞추어야할지 조심스러웠다.
동작대(銅雀臺)를 완성하고 이를 기념하는 연회에서
조조(曹操)가 시문(詩文)에 뛰어난 두 아들 조비(曹丕)와 조식(曹植)을 불러
글을 지어보라고 하자,
그중 동생 조식(曹植)이 지은 지금 소개하고자 하는
이"부(賦)"가 가장 뛰어난 글이기에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다.
본 글 바로 전(前)에 소개한 "칠보시(七步詩)"에서는
조식(曹植)을 줌심으로
"인간(人間)의 애환(哀歡)"에 초점을 맞췄지만, 이번에는
동작대(銅雀臺) 부(賦)의 배경으로
유비(劉備)의 군사(軍師)인 제갈량(諸葛亮)이 본(本) 시(詩)를,
동오(東吳)의 대도독(大都督) 주유(周瑜)에게 전략적으로 이용했던 일화와 함께
원문(原文)을 소개했다.
아울러 부족하고 미천한 부분들이 많은 점 지도 편달을 부탁드리는 바이다.
동작대(銅雀臺) 부(賦)
從明后而嬉游兮(종명후이희유혜): 현명한 임금을 따라서 즐겁게 노닐고
登層臺以娛情(등층대이오정): 누대에 올라 즐거이 교분을 나누노라.
見太府之廣開兮(견태부지광개혜): 넓은 도성(都城)을 바라보니
觀聖德之所營(관성덕지소영): 어진 황제의 덕이 바라는 바를 알겠도다.
建高門之嵯峨兮(건고문지차아혜): 높은 문을 우뚝 세웠으니
浮雙闕乎太淸(부쌍궐호태청): 두 궁궐이 하늘에 뜬 듯이 솟았고.
立中天之華觀兮(입중천지화관혜): 중천(中天)에서 황홀하게 바라보니
連飛閣乎西城(연비각호서성): 서성(西城)부터 공중누각이 잇대었구나.
臨水之長流兮(임수지장류혜): 장수(長水)의 강물은 장구하게 흐르고
望園果之滋榮(망원과지자영): 멀리 동산의 과일 영그는 걸 바라본다.
立雙臺於左右兮(입쌍대어좌우혜): 두 대(臺)를 좌우에서 벌려 세우니
有玉龍與金鳳(유옥룡여금봉): 하나는 옥룡(玉龍)이요 하나는 금봉(金鳳)이로다.
連二橋於東西兮(연이교어동서혜): 동서로 다리를 이어놓으니
若長空之體棟(약장공지체동): 마치 하늘에 뜬 무지개인 듯 하구나.
俯皇都之宏麗兮(부황도지굉려혜): 굽어보노니 황도는 크고도 아름답도다.
瞰雲霞之浮動(감운하지부동): 구름은 떠 가고
欣群才之來萃兮(흔군재지래췌혜): 여러 영재(英才)들이 모여들어 기뻐 즐기니
協飛熊之吉夢(협비웅지길몽): 웅대한 옛 꿈을 도우려는 듯
仰春風之和穆兮(앙춘풍지화목혜): 봄바람 화목하게 불어오며
聽百鳥之悲鳴(청백조지비명): 온갖 새들의 슬픈 울음소리 들리는구나.
天雲垣其旣立兮(천운원기기립혜): 하늘엔 구름 겹겹이 덮여있고
家願得而獲逞(가원득이획령): 집안 소원 이루워져 즐거워지도다.
揚仁化於宇內兮(양인화어우내혜): 어진 교화를 천하에 드날리니
盡肅恭於上京(진숙공어상경): 모두다 황제를 삼가 존경하네.
惟桓文之爲盛兮(유환문지위성혜): 이 모두가 제(齊)환공(桓公)과 진(晋)문공(文公)의 위업일지니
豈足方乎聖明(기족방호성명): 어찌 존귀함에 어긋남이 있겠는가.
休矣美矣(휴의미의): 아름답도다.
惠澤遠揚(혜택원양): 훌륭하도다 멀리까지 은혜를 베풂이여
翼佐我皇家兮(익좌아황가혜): 우리 황실을 도와
寧彼四方(영피사방): 천하가 평안할 지니라.
同天地之規量兮(동천지지규량혜): 천지에 법이 골구루 미치고
齊日月之暉光(제일월지휘광): 해와 달을 가지런히 한 것처럼 빛나리라.
永貴尊而無極兮(영귀존이무극혜): 영원히 존귀하여 끝이 없을지니
等年壽於東皇(등년수어동황): 모두들 황제따라 장수를 누리리라.
御龍旅以游兮(어룡여이유혜): 황제께서 노닐고자
廻鸞駕而周章(회난가이주장): 어가를 돌려 두루 다니신다네.
思化及乎四海兮(사화급호사해혜): 온 세상에 성은이 골고루 미치니
嘉物阜而民康(가물부이민강): 좋은 일들은 커지고 백성은 평안하도다.
愿斯台之永固兮(원사태지영고혜): 바라건대 이 기쁨을 오랫동안 이어가며
樂終古而未央(낙종고이미앙): 끝없이 영원히 즐길지니라.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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