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초당(茶山草堂)... 전남 강진
다산초당(茶山草堂)에 서다.
정약용(丁若鏞)은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호는 다산(茶山)이며
경기도 양주 부근이 고향이다.
다산(茶山)은
진주목사(晋州牧使)를 역임했던
정재원(丁載遠)과 해남(海南) 윤씨(尹氏) 사이에서 4남 2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다.
형 약전(若銓)과 함께
관리였던 아버지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학문을 일찍 익힐 수 있었으며
이미 16세의 나이에
실학(實學)의 거두 이익(李瀷)의 학문(學文)을 접하게 된다.
당시 문학(文學)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치던
이가환(李家煥)과
학문(學文)의 정도(精到)가 상당하던
매부(妹夫) 이승훈(李承薰)이
모두 이익(李瀷)의 실학(實學) 학문(學文)을 계승한 문하생(門下生)임을
이때 알게 되었으며,
자신도 자연스럽게 이익(李瀷)의 유서(由緖)를 공부하게 된다.
이익(李瀷)은 근기학파(近畿學派) 즉 성호학파(星湖學派)의
중심이 되는 인물이다.
여기서 "실학(實學)"이란
어떤 학문(學文)일까~?.
주희(朱熹)에 의해
유학(儒學)을 폭 넓게 재 편성한 성리학(性理學)으로 대변되는
봉건제도(封建制度)를 부정하고
신분제도(身分制度)를 타파하며,
양반계층이 외면시 했던
상공업(商工業) 분야에 대한 새로운 인식(認識) 등...
서구(西歐) 사조(思潮)의
문화(文化)와 학문(學文)이 조선(朝鮮)에 스며든 계기가
실학(實學)의 태동이라고 본다.
조선(朝鮮)은 명(明)나라를 섬기는
사대사상(事大思想)이 주류로
고려(高麗)의 정신적(精神的) 사상이었던 불교(佛敎)를 배척하고,
명(明)의 이념인 성리학(性理學)을 받아들여
유교(儒敎)를
조선(朝鮮)의 국가적(國家的) 이념(理念)으로 삼고 있었다.
그러던 명(明)나라가
농민들의 봉기(蜂起) 즉 "이자성의 난(李自成之亂)"으로
멸망하면서
만주족(滿洲族)인 청(淸)나라가 중원(中原)의 정권을 잡자,
청(淸)의 선진(先進) 문명(文明)과
우수한 기술(技術)을 따르는 "북학(北學)"이
새로운 학문(學文) 사조(思潮)로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따라서 기존의 뿌리 깊은 유학(儒學)을 밀어내고
청(淸)을 따르는 북학(北學)과
서구 열강의 유입으로 인한
서양(西洋)의 실리적(實利的) 사상(思想)과 문물(文物)이 들어와 뒤섞이며
천문(天文), 지리(地理) 기하학(幾何學) 등,
실생활에 직접 도움이 되는 학문 즉
실학(實學)이 태동하게 되니
공자왈 맹자왈로 대변되는 정신적(精神的) 학문인 유학(儒學)과,
과학적(科學的) 학문인 실학(實學)과의 충돌은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시대적(時代的) 현상이었다.
다시한번 정리를 하자면
실생활에 도움을 주는 과학(科學)에 가까운 학문이
실학(實學)이라고 보면 이해가 빠르리라고 본다.
바로 이 혼란의 시기에
기득권(旣得權) 층이 사상적(思想的)으로 충돌하면서
많은 희생을 낳은 격동의 시대(時代)가
다산(茶山)이 할동하던
정조(正祖) 때였다.
정약용(丁若鏞)이 어린 시절부터
근기학파(近畿學派)의 개혁(改革) 이론(理論)을 접한 것은
청 장년기 그의 사상(思想)이 성숙되는 과정에서
의미가 깊다.
이는 다산(茶山)이 훗날
근기학파(近畿學派)의 실학적(實學的) 이론(理論)을 완성한 인물로
평가받게 된 단초(端初)가
바로 이 시기에 마련되었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1783년 그가 과거시험인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성균관(成均館)에서 수학하며
자신의 학문적(學文的) 깊이와 폭을 넓히게 되는데,
이때 대학(大學)과 중용(中庸) 등 유학(儒學) 경전(經典)도 집중적으로 연구한다.
그후 1801년에 발생한 "신유교난(辛酉敎難)"으로
체포되던 때까지가
다산(茶山)에게서는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轉換點)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科擧)에 급제한 이후 다산(茶山)은
정조(正祖)의 특별한 총애(寵愛)를 받으며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을 시작으로 형조참의(刑曹參議)까지,
13가지의 직책을 옴겨다니며 그야말로 승승장구(乘勝長驅)하며
두각(頭角)을 드러냈다.
과거에 급제한지 6년 만인 1789년에는
한강에 배다리 즉 "단교(舟橋)"를 준공시키고,
1793년에는 "수원화성(水原華城)"을 설계하는 등
기술적(技術的)으로 굵은 업적을 남겨
그의 천재성(天才性)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한편, 이 시기에 다산(茶山)은
이벽(李檗), 이승훈(李承薰) 등과의 접촉을 통해
서양(西洋)에서 청(淸)나라를 통해 들어온
"천주교(天主敎)"에 관심을 갖게 된다.
하지만 그가 천주교(天主敎) 신자(信者)였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정약용(丁若鏞)은 천주교(天主敎) 즉 카톨릭(Catholic)을 서학(西學)
즉 서양(西洋)의 학문(學文)으로 인식하고
학문적(學文的)인 관심을 가졌을 뿐,
그의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교회 내에서 뚜렷한 활동을 전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정약용(丁若鏞)의 천주교(天主敎)에 대한 태도는
자신의 정치적(政治的) 진로(進路)에
커다란 장애로 작용을 한다.
당시 천주교(天主敎) 신앙은
성리학적(性理學的) 가치체계(價値體系)에 대한
본격적(本格的)인 도전으로 인식되어
집권층으로부터 격렬한 비판을 받고 있었다.
그의 천주교(天主敎) 신앙(信仰) 여부가 공식적으로 문제시 된 것은
1791년 부터이며
이후 그는 천주교 신앙과 관련된 혐의로
여러 차례 시달림을 당해야 했고,
그때마다 자신이 천주교(天主敎)와 무관함을 강조하며
힘겨운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그는 1801년 천주교(天主敎) 교난(敎難) 때 결국
유배(流配)를 당함으로써
중앙의 정계(政界)와 영원히 결별하게 된다.
교난(敎難)이 발발한 직후
다산(茶山)은 경상도 포항 부근의 장기(長鬐)로,
형 약전(若銓)은 흑산도(黑山島)로 유배 된다.
그러나 그는 곧 이어 발생한
"황사영 백서사건(黃嗣永 帛書事件)"의 여파로
다시 문초(問招)를 받고
이곳 전라도 강진(康津)으로 유배지(流配地)를 옴겨 온다.
그는 이곳 강진(康津) 유배기간 동안
정치에 얼룩진 마음을 비우고
학문 연구에 매진하며
이를 자신의 실학적(實學的) 학문을 완성시킬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하였다.
따라서 강진에서의 10여 년 유배 기간에
왕성한 탐구와 집필욕은
"목민심서(牧民心書)" 등 주옥 같은 500여 권이 넘는
방대한 저서들을 쏟아내며
천재성(天才性)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다산(茶山)의 강진(康津) 유배기(流配期)는
관료(官僚)로서는 확실히 암흑기였지만,
학자(學子)로서는 매우 알찬 수확기였다고 볼 수 있다.
많은 문도(門徒)를 거느리고
강학(講學)과 저술(著述)에만 전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기간에 중국 진(秦)나라 이전의
선진(先秦) 시대에 태동한
원시유학(原始儒學)도 집중적으로 연구함으로써
이를 기반으로 성리학적(性理學的) 사상체계(思想體系)를 극복해보고자
많은 노력도 하였다.
서기 1818년 57세 되던 해,
다산(茶山)은 유배에서 풀려나
경기도 향리(鄕里)로 돌아온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강진에서 마무리 짓지 못한 저술작업을 이어갔다.
매씨서평(梅氏書平)의 개정과
아언각비(雅言覺非), 사대고례산보(事大考例刪補) 등이
이 때 지필된 저서들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회갑(回甲)을 맞아
자서전적(自敍傳的) 기록인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을 저술하였으며.
그밖에도 자신과 관련된 인물들의
전기적(傳記的) 자료를 집필하기도 했고
500여 권에 이르는 자신의 저서들을 정리하여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를 편찬한다.
이상에서 살펴 보았듯
그의 생애는 결코 순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유배기간에도
저술(著述)과 강론(講論)을 통해
위기에 처한 조선왕조(朝鮮王朝)의 현실을 개혁하고자 많은 노력을 하였으며,
현실 개혁(改革)의 이론적(理論的) 근거를 확보하기 위해
선진유학(先秦儒學)을 비롯한 여러 사상(思想)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유배시절 이곳에서 가까운
해남(海南) 두륜산(頭輪山)의 대흥사(大興寺) 일지암(一枝菴)에서
차문화(茶文化)에 심취한
초의선사(草衣禪師)을 만나 불교(佛敎)를 심도있게 접했고
초의선사(草衣禪師)에게 유학(儒學)을 가르치며
학문(學文)의 폭을 넓혀갔다.
또한 당시 제주도에 유배중이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와도
서신(書信)으로 종종 왕래하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추사(秋史)는 "윤상도(尹尙度) 옥사사건(獄事事件)"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를 갔다.
윤상도(尹尙度)라는 하급관리(下級官吏)는 어느날
3명의 고급관리(高級管理)가 부패하다고 조정(朝廷)에 상소(上疏)를 올렸는데,
이것이 역풍(逆風)을 맞아
상소문(上疏文)의 초안(草案)을 작성한 자가
김노경(金魯敬)으로 밝혀지면서
김노경(金魯敬)은 고금도(古今島)로 유배형(流配刑)을 받았으며,
상소(上疏)를 올린 윤상도(尹尙度)는
사지(四肢)가 찢기는 능지처참(陵遲處斬)을 당했다.
이 김노경(金魯敬)이,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부친(父親)이었던 까닭에
추사(秋史)도 연루되어
이조판서(吏曹判書)의 관직(官職)을 박탈당하고
제주도로 유배형(流配刑)에 처해졌다.
다산(茶山)은 유배에서 풀려난 후에도
서양(西洋)의 학문에 관심을 기울였다.
학문에 대한 그의 집착은 끊임없는 탐구정신(探求精神)으로 이어지며
연구와 자신에 대한 깊은 성찰(省察)을 통해,
실학사상(實學思想)을 집대성한 조선 후기의 대표적(代表的) 지성(知性)이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