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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경주박물관(國立慶州博物館)

원회 choi 2016. 10. 27. 19:11


국립경주박물관(國立慶州博物館)

역사(歷史)에서 길을 묻다...!

선사시대(先史時代)부터 신라(新羅) 말기(末期)까지...


제주도에는 오늘까지 3일 연속으로 비가 내렸다는 소식이다.

이곳 경주에도 새벽부터 이른 아침까지 재법 많은 비가 내렸다.


빅물관은 오전 9시에 문을 연다.

미리와서 기다리는 외국인들과 여행객들로 주차장은 빈자리가 별로 없다.


박물관(博物館) 본관(本館)


성덕대왕(聖德大王) 신종(神鍾) 국보(國寶) 제29호.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동종(銅鐘) 중에
오대산 상원사(
上院寺) 동종(銅鐘)에 이어 두번째로 오래된 종이다.
이 신종(神鍾)은 신라(新羅) 제35대 경덕왕(景德王)이, 돌아가신 아버지 성덕대왕(聖德大王)을 기리고자
구리(銅) 12만 근(斤)을 들여 만들다가 실패한 후,
아들인 혜공왕(惠恭王) 7년인 서기 771년에 비로소 완성한 한국 최대의 종(鍾)이다.
이 종(鍾)이 성덕대왕(聖德大王)의 명복(冥福)을 빌기 위해 제작됐음을 알리는
1,037자의 글이 대칭으로 새겨져 있다.


공양천인상(供養天人像).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성덕대왕 신종(聖德大王 神鍾)은 맑은 소리를 내기 위해 고심하다가,
에밀레라는 이름의 어린 애기를 구리를 녹이는 솥에 넣었다는 끔찍한 전설(傳說)이 전해오기도 한다.
그래서 종을 치면 에밀레~ 에밀레~ 하고 운다고 하여 "에밀레종"이란 이름으로도 불려지고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三國史記)나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그런 이야기가 실려 있지 않다.
해방(解放) 전에는 없었던 이야기라고도 하는데...
일제 강점기(强占期) 때 일본인들이 만들어 유포한 이야기라는 설도 있다.


아무튼 한 번의 실패를 맛보고 다시 만든 종이며
당시의 주조기술(鑄造技術)로 볼 때 대단히 어려운 사업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예이다.
어찌됐든 이와같은 전설적(
傳說的) 이야기가 나온 것을 보면

그만큼 이 종(鍾)을 제작하기 위한
국가적(國家的), 국민적(國民的) 염원이 얼마나 강렬했는지를

시사하는 대목임엔 분명하다.


울산 반구대 암각화(巖刻畵) 모형도.
태화강의 한 지류인 대곡천의 바위에 새겨진 그림으로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부터 여러 시기에 걸쳐 고래, 호랑이, 사슴, 거북, 물고기, 사람 등의 형상과
고래잡이 모습 등을 볼 수 있다.
국보(國寶) 제 285로 지정되어 있다.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 빗살무늬 토기.

이런 토기가 발견 된다는 것은 이때부터 정착생활을 했다는 증거이다.


반월형(半月形) 돌칼.

청동기(靑銅器) 초기 유물이다.

추수하기 위한 기구들로 농경생활(農耕生活)의 전형을 보여준다.

수렵(狩獵) 즉 사냥으로 이어오던 생활을 벗어나

본격적인 촌락(村落)을 형성하였고

위계질서(位階秩序)가 생겼으며 계급사회(階級社會)로 들어선 때였다.


마제석검(磨製石劍).

정교하게 돌을 갈아 만든 칼로 신분을 나타내던 징표(徵標)로 쓰였다.


각종 마제(磨製) 석검(石劍)들...


이 무문토기(無紋土器)들은

청동기새대(靑銅器時代)의 대표적(代表的) 토기들이다.


비파형(琵琶形) 동검(銅劍).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의 무기(武器)였거나 혹은 제기(祭器)로 쓰였으리라 추정하는데,
검(劍)의 형태가

중국(中國) 현악기(絃樂器) 비파(琵琶)와 비슷하게 생겨 붙여진 이름이다.
중국 동북지방(東北地方)에 있는 요하(遼河)를 중심으로 한 요녕지방(遼寧地方)에 주로 분포하기 때문에

"요녕식(遼寧式) 동검(銅劍)"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의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를 대표하는 청동제(靑銅製) 검(劍)이며,
BC, 800~900년 무렵의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부터 철기시대(鐵器時代) 이전까지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측한다.


목걸이와 팔찌들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를 지나 철기시대(鐵器時代)가 도래한다.



철제품(鐵製品)인 검(劍)과 칼(刀)이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고 이때부터

조직적인 전투(戰鬪)가 시작되었다.


철제(鐵製) 갑옷.


유리 장신구(裝身具)

유리는 당시 서역(西域)에서 들여온 것으로 외국(外國)과 무역(貿易)을 했다는 증거들이다.


신라(新羅) 토기류(土器類)


곡옥(曲玉)

반달 모양으로 다듬은 옥(玉) 등의 머리부분에 구멍을 내어 끈으로 매다는 장신구(裝身具)의 하나이다.

머리부분은 크고 굵으며 꼬리부분으로 가면서 차츰 가늘게 꼬부라져

곱은옥이라 하며

곡옥(曲玉), 구옥(句玉)이라고도 한다.

옥(玉)을 비롯하여 흙, 돌, 뼈, 뿔, 비취, 수정, 마노(瑪瑙) 등을 사용하며

크기는 1∼10㎝까지 다양하다.


천마총(天馬塚) 출토 금제(金製) 귀고리


금관(金冠)


철제(鐵製) 전투모(戰鬪帽)


각종 동물이 장식된 토기


박물관 2층 중앙 홀


최치원(崔致遠).

신라(新羅) 말기(末期)의 관리(管理)겸 문장가(文章家)이다.


위 책은 "계원필경(桂苑筆耕)"으로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한시문집(漢詩文集)이며

서기 879년에 완성되었다.
당(唐)나라에 머문 17년 동안 지은 작품을 간추려 엮은 책으로

정강왕(定康王)에게 바친다는 기록이 들어있다.

정강왕(定康王)은 신라(新羅) 제50대 왕으로 진성여왕(眞聖女王) 바로 앞 대(代) 왕(王)이다.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

지은이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신라(新羅) 말기에서 조선(朝鮮) 후기까지

 235명에 달하는 명신(名臣)들의 행적(行跡)을 기록한 책이다.
권1에는 설총(薛聰), 최치원(崔致遠), 최충(崔沖), 안유(安裕), 길재(吉再),

김숙자(金叔滋), 이황(李滉), 이이(李珥) 등 34명이 실려있다.


수막새

목조건축 지붕의 기왓골 끝에 사용되었던 기와


금강역사상(金剛力士象)의 석두(石頭)와 팔



중국(中國) 서안(西安)의

"섬서성(峽西省) 역사박물관(歷史博物館)"에 소장돼 있는

조우관(鳥羽冠)을 쓴 "신라사절도(新羅使節圖)"의 영인본(影印本)이다.
당(唐)나라 태종(太宗) 때 장휘태자(莊徽太子) 묘(墓)에서 발견된 이 벽화(壁畵)는,
조우관(鳥羽冠), 즉 새 깃터를 장식한 모자를 쓴 인물이
신라(新羅)에서 온 사신(使臣)이며

신라(新羅) 사신(使臣)을 중심으로

오른쪽은 여진(女眞) 그리고 가운데는 동로마에서 온 사신(使臣)으로 알려지고 있다.


토용(土俑).
왕(王)이 죽어 순장(殉葬)할 때 사람 대신 무덤에 묻은 흙으로 만든 사람들.


귀면와(鬼面瓦)


수막새

기와를 빚던 장인(匠人)이 잠시 쉬면서 대충 만들어 본 사람 얼굴의 수막새로 보이는데,

그 순박한 모습이 신라인(新羅人)을 닮았다하여

"신라(新羅)의 미소(微笑)"라는 애칭(愛稱)으로 불린다.


천마총(天馬塚) 출토 금관(金冠).


신라(新羅) 유물(遺物)의 극치(極致)를 보는 것 같았다.


금제(金製) 장신구(裝身具).


금제(金製) 귀걸이



천마총(天馬塚) 출토 청동기(靑銅器)들이다.

정교함과 세련미가 당시 선진국이던 당(唐)나라에서 만든 제품들로 보여진다.


마침 아프가니스탄(Afghanistan)의 정교한 예술품 전시회가 열렸서 봤는데...

전시실 사진은 찍을 수가 없었다.


바로 이곳에서...

정교한 금제(金製)들과 상아(象牙)로 조각한 정교한 인물상(人物像) 등이 압권이었다.



월지관(月池館).
일명 안압지관(雁鴨池館)은
신라(新羅)의 동궁(東宮)과 안압지(雁鴨池)에서 발견된

3만여 점의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 문화재(文化財) 중에서 엄선한
약 1,000여 점의 문화재(文化財)를 주제별로 전시하여
통일신라의 문화(文化),

특히 왕실(王室)의 생활문화(生活文化) 전반을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문무왕(文武王) 14년인 서기 674년 궁궐 안에 완공된 안압지(雁鴨池)에서는
신라(新羅)의 건축문화(建築文化)를 보여주는 다양한 종류의 기와를 비롯한 토기류와 생활용품(生活用品),

그리고 왕실(王室)의 놀이기구들과
불교용품(佛敎用品) 등이 무더기로 발견 되었다.




금속제(金屬製) 접시, 완, 숟가락과 여러 가지 형태의 토기 등은 당시
궁궐의 실생활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들이다.
또한 중국 당(唐)에서 만들어진 청자(靑磁)와 백자(白磁)는 신라(新羅)와 당(唐)나라 사이의 활발한 교류를 짐작케 한다.
그 외에도 목간(木簡)과 건물을 장식하는 금속공예품(金屬工藝品)과
곱돌로 제작된 장식품(裝飾品)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귀면와(鬼面瓦)

귀신의 얼굴을 조각한 장식 기와이다.

 잡귀나 재앙을 막기 위하여 내림마루, 귀마루, 또는 사래 마구리에 붙였었다.


안압지(雁鴨池) 뻘 속에서 발견된 목선(木船)


안압지(雁鴨池)의 실제 모형도이다.

현재의 안압지 못 보다 2배나 컸다고 한다.


그런데...

이거이~ 뭣에 쓰는 물건이었던고~??

안압지(雁鴨池)는 궁(宮) 안에 있던 왕(王)과 왕족(王族)들의 전용 유원지(遊園地)였는데...

도데체 뭔 놀이를 하며 놀았기에 이런 남성(男性) 음경(陰莖) 모양의 나무막대기가 무더기로 나왔을까~??

사진에는 일부이지만 실제로는 10여 개가 넘는다.

그럼 당시에는 엄청나게 많았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구중궁궐(九重宮闕)의 음탕한 놀이 문화(文化)를 짐작해 볼 수 있는 유물이다.


놋대접


동(銅)으로 만든 숫가락


중국에서 들여온 것으로 보이는 곱돌로 만든 정교한 사자상.



이렇게 많은 놀이개와 보석들이 연못 바닥에서 나왔다.


나무로 만든 정교한 주사위.

나무의 질(質) 그리고 오차없는 정확한 각도(角度)의 대칭(對稱)과 글자의 아름다움으로 볼 때

이것 역시 당(唐)나라 물품으로 보여진다.

당시 신라(新羅)의 장인(匠人)들 기술력(技術力)은 이 정도로 정확한 제품을 만드는 능력이 없었다.

수백년을 물속에 잠겨 있었지만 엇그제 만든 제품처럼 깔끔하다.

놀이에서 질 경우 벌칙까지 적혀있다.


이렇게 큰 항아리도 건져냈다.


기름을 부어 불을 붙였던 등잔(燈盞)들...



이것들도 전부 등잔인데,

온전한 것만 모아놓은 것이다.

발견된 토기 등잔들은 좀 과장해서 한 트럭분이나 나왔다.



박물관(博物館)을 나서며 많은 생각이 교차한다.

1천 년을 이어온 유구한 역사속에서 탄생된 신라(新羅)의 유물들이 감탄(感歎)을 자아내게 하는 것들도 많았다.

그러나 안압지(雁鴨池) 출토 유물들을 보면서

이런 호화롭고 음탕한 놀이에 정신이 팔려있던 신라(新羅) 왕실(王室)의 행태는

망해도 싸다는 생각을 지울수가 없었다.


포석정(鮑石亭)에서 연회(宴會)를 열어 흐르는 곡수(曲水)에 술잔을 띄워놓고 술에 쩔어 흥청이며 노는데,

때마침 후백제(後百濟)의 권훤(甄萱)이 군대(軍隊)를 이끌고 처들어온다.

음탕한 놀음에 정신이 팔려있던 경애왕(景哀王)이 그자리에서 목이 잘려 죽임을 당하고,

왕비(王妃)와 궁녀(宮女)들이

현장에서 겁탈(劫奪)을 당하는 수모(受侮)를 겪은 신라(新羅)가 아니었던가~

1천 년의 역사(歷史)와 빛나는 유물(遺物)들 보다는...

음탕에 쩔어 망해버린 신라(新羅)의 측은함이 더 강열하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