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서원(紹修書院)... 경북 영주시 순흥면
불영계곡(佛影溪谷)을 넘어 동해(東海)로...
3),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國家) 공인(公認) 서원(書院)
소수서원(紹修書院)은 사적(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書院)이며, 최초의 사액서원(賜額書院)이기도 하다.
소수서원(紹修書院)이 위치한 자리는 원래 숙수사(宿水寺)라는 이름의 사찰터(寺刹攄)로,
서원(書院) 입구에는 현재까지 4m 높이의 육중한 당간지주(幢竿支柱)가 남아있다
중종(中宗) 38년 서기 1543년 풍기군수(豊基郡守)로 부임한 주세붕(周世鵬)이
평소 자신이 흠모해 왔던 고려(高麗)의 유학자(儒學者) 안향(安珦)의 연고지(緣故地)인
이곳 풍기(豊基) 땅에 부임한 것을 계기로
그의 향리(鄕里)에 안향(安珦)의 사당(祠堂)을 세우고,
이듬해에는 사당(祠堂) 앞에 향교(鄕校) 건물을 옮겨다 재실(齋室)을 마련하여 선비들의 배움터로 삼음으로써,
서원(書院)의 대체적인 골격(骨格)을 이루게 된다.
안향(安珦)은 주자(朱子)의 성리학(性理學)을 이 땅에 최초로 들여온 인물이다.
서원(書院)의 시설을 정비한 주세붕(周世鵬)은 주자(朱子)의 백록동학규(白鹿洞學規)를 인용하여
유생(儒生)들에게 독서(讀書)와 강학(講學)의 편의를 제공했다.
그리고 한양(漢陽)의 종갓집에서 안향(安珦)의 영정(影幀)을 이곳으로 옮겨와 봉안(奉安)한다.
이때부터 이곳 이름을 백운동서당(白雲洞書堂)이라 부르다가,
중종(中宗) 40년 서기 1545년에 안향(安珦)의 후손(後孫)으로 고려(高麗)와 원(元)나라에서 과거(
역시 고려(高麗)의 문신(文臣)이었던 안보(安補)의 영정(影幀)도
이곳에 함께 배향(配享)하면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으로 고쳐 부르게 된다.
그리고 조선(朝鮮) 명종(明宗) 때에 이르러
이황(李滉)이 풍기군수(豊基郡守)로 부임해 와서는 서원(書院)의 격을 높이고자 송대(宋代)의 예(例)를 언급하며,
서원(書院)에 대한 합법적(合法的) 인정(認定)과 정책적(政策的) 지원을 요청하는 상소문(上疏文)을 올린다.
마침내 명종(明宗)은 이를 윤허(
친필(親筆)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편액(篇額)을 서원(書院)에 하사했다,
또한 사서오경(四書五經)과 성리대전(性理大全) 등의 서적(書籍)과 노비(奴婢)들도 함께 내려보낸다.
이로써 소수서원(紹修書院)이
사액서원(賜額書院) 즉 국가(國家)의 공식적(公式的) 인정(認定)과 지원(支援)을 받은 최초의 서원(書院)이 됨과 동시에
국가(國家)가 인정하는 교육기관(敎育機關)이 되었다.
"소수(紹修)"란 "기폐지학(旣廢之學) 소이수지(紹而修之)"라 하여,
"이미 무너져내린 교학(敎學) 즉 학문(學文)을 다시 이어 닦게 했다"는 말에서 따온 이름이다.
이때부터 입학 정원도 평소 10명 수준에서 30여 명으로 대폭 늘렸으며,
서원(書院)의 원생들이 배움에 충실하도록 이황(李滉)은 학업(學業) 규칙(規則)도 엄히 세웠다.
입학 자격은 초시(初試)에 합격했거나 순수학문(純粹學問)에 정진(精進)하는 유생(儒生)들로 한정 했으며,
학문(學問) 정진(精進)에 소홀하고 과거(科擧)에만 매달리거나 미풍양속(美風良俗)을 해치는 경우에는 곧바로 퇴원(退院) 조치했다.
그동안 이곳 소수서원(紹修書院)을 거쳐간 유생(儒生)들이 자그마치 4천 명에 달했으며,
그 중에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로 진주성(晉州城)에서 전사(戰死) 한 김성일(金誠一)과,
선조(宣祖) 때의 좌의정(左議政)을 지낸 정탁(鄭琢) 등
국가(國家)에 큰 업적(業績)을 남긴 인사들이 부지기수(不知其數)였다.
소수서원(紹修書院)은 그야말로 영남(嶺南) 교육(敎育)의 산실(産室)로
자 타가 인정하는 명문(名門) 교육기관(敎育機關)이었다.
4m 높이의 숙수사지(宿水寺址) 당간지주(幢竿支柱)
취한대(翠寒臺)...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지은 정자(
죽계천(竹溪川)
죽계천(竹溪川)의 어리연
취한대(翠寒臺)
탁청지(濯淸池)
관리사무소 겸 충효교육관
사료관
학구제(學求齊)와 지락제(至樂齊)
영정각(影幀閣)
일신제(日新齊)... 상급 유생(儒生)들이 기거하던 방
강학당(講學堂)... 학문(學文)을 강론(講論)하던 건물로 너무 낡아 재 시공중이다.
경렴정(景濂亭)
학자수림(學者樹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