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왕곡(旺谷)마을... 고성(高城)
18), 고성(高城)... 왕곡(旺谷)마을
19세기 전 후에 건립된 북방식(北方式) 전통한옥(傳統韓屋)과 초가집이 전국에서 유일하게 밀집(密集) 보존되어 있어,
1988년 전국 최초로 전통건조물 보존지구로 지정되었으며,
2000년에는 국가 지정 중요민속자료(重要民俗資料)로 지정된 마을이다.
마을의 역사는 고려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14세기 말 고려 마지막 왕인 공양왕(恭讓王)의 최측근이었던 함부열(咸傅說)이
이성계(李成桂)의 조선왕조(朝鮮王朝) 건국(建國)에 반대하며 마을 근처에 은거(隱居)하였고,
그의 차남이 이곳으로 옮겨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이후 오늘날까지 약 600년 동안 그의 후손(後孫)인 양근 함씨(楊根 咸氏)와 강릉 최씨(江陵 崔氏)가 주를 이루어 거주하고 있다.
19세기 말 인구가 증가하면서 마을은 금성(錦城), 왕곡(旺谷), 적동(笛洞)의 세 마을로 분리되었다가
일제 강점기 때 다시 합쳐서 오봉(五奉)이라 불렸다.
이곳은 19세기 말 동학(東學)의 활동과도 관련이 깊은 마을이다.
동학(東學)의 2대 교주(敎主)였던 최시형(崔時亨)이 1889년 이곳에 머물며 포교활동(布敎活動)을 하였고,
1894년 동학혁명(東學革命) 당시에는 관군(官軍)을 피해 이 마을에 은거하며 전력을 재 정비한 것으로 알려지기도 한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마을 입구에는 "동학의 빛 왕곡마을"이라는 기념비(記念碑)가 세워졌다.
마을 내 대부분의 가옥은 관북지방(關北地方)에서 볼 수 있는 북방식(北方式)의 전통한옥(傳統韓屋)들이다.
안방과 사랑방, 마루, 부엌을 한채의 건물 안에 배치하고 부엌에 마구간을 연결한 "ㄱ"자 형의 겹집구조를 보인다.
가옥들은 대문과 담이 없어 앞마당이 개방적인데 이는 햇볕을 충분히 받고 폭설로 인한 고립을 방지하기 위해서 그리 지었다.
반면에 뒷마당은 비교적 높은 담장으로 되어 있어 폐쇄적인 구조를 띄는데,
이는 뒤에서 불어오는 북서풍(北西風)을 막기 위한 용도로 보여진다.
또 눈이 많이 내리는 지역 특성상 지붕에 쌓이는 눈의 무게를 지탱하고 건물을 보호하기 위해서
지붕 뒤쪽(북쪽)에 두꺼운 나무로 튼튼하게 지었다.
또한 외양간 지붕의 모양새로 마을 내 집들의 구조를 구분할만큼
외양간 지붕이 가옥마다 달리 지은 점이 특징이다.
그러므로 "ㅅ"자 모양의 맞배지붕과 지붕이 한쪽으로만 경사진 가적지붕 등,
이곳의 외양간지붕은 한옥의 다양한 형식을 지니고 있다.
왕곡마을에는 어머니의 제사(祭祀)는 반드시 차남(次男)이 모시는 풍습(風習)이 전해온다.
이는 고려(高麗) 말(末) 함부열(咸傅說)의 차남이었던 함치원(咸致遠)이,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면서 생긴 풍속이라 한다.
또한 음력 1월 14일에는 오곡밥 아홉 사발을 먹고, 산에가서 나무 아홉 짐을
해와야하는 풍습(風習)이 전해지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