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

중국문자박물관(中國文子博物館)... 태행산(太行山)

원회 choi 2013. 11. 9. 20:32


중국(中國)... 타이항(太行) 대협곡(大峽谷)을 가다.

 
중국문자박물관(中國文子博物館)

문자(文子)의 기원(起源) 갑골문(甲骨文)를 만나다.

 

중국(中國)은 세계적(世界的)인 문자(文字) 강국(强國)이다.
인류(人類)의 문자(文字)에 관한 문명사(文明史)를 수천 년 끌어올린 문자(文字)들이 많이 발굴 됐고
지금도 끊임없이 유물(遺物)들이 출토(出土)되고 있다.
이렇게 발굴된 문물(文物)들은 보존되어 새 역사(歷史)를 창출(創出)하는데 활용된다.
그 중 대표적인 곳이

허난 성(河南省) 안양시(安陽市)에 세계 최초이며 최대규모로 세워진
"중국문자박물관(中國文子博物館)"이다.
갑골문(甲骨文) 발굴지(發掘地)에 세워진 이 박물관(博物館)은
중국(中國)에 존재했던 각종 문자(文子)의 종류(種類)와 유물(遺物)들을 전시(展示)하여
선대문명(先代文明)의 우수성(優秀性)을 널리 알리는데 중점(重點)을 두고 있는 박물관(博物館)이다.

 

2009년 11월에 개관(開館)하여

세계적(世界的)으로 널리 알려진 이 박물관(博物館)의 독특한 외관(外觀)의 특징은

바로 자방(字坊)을 닮은 지붕의 독특한 모양새와,
넓은 4각면에는 금빛 구리로 정교하게 장식한
봉조문(鳳鳥文)과 은상문(殷商文)을 빼곡하게 배치하여 웅장하고 화려함을 강조했다.
박물관(博物館)측은 이를 가리켜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한 기세(氣勢)가 있어 새로운 시기(時期)
중국(中國) 문자문명(文子文明)의 비약(飛躍)을 상징한다"
는 설명을 달아 놓았다.

 


갑골문(甲骨文) 태생지(胎生地) 다운 문자박물관(文子博物館)의 위용(威容)은 대단했다.

중화문명(中華文明)을 한껏 뽐내 듯

3만4500㎡의 대지(垈地) 위에 4층 규모로 웅장하게 지었다.

 

 은상(殷商)은

은(殷)나라 혹은 상(商)나라 라고 하는 고대국가(古代國家)로

처음으로 글자를 만들어 사용했으며 국가의 틀을 갖춘 나라였다.

기원전 17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니 지금으로부터 3,700년 전이나 4,000년 전을 의미하는 오래전이다.

 

발굴(發掘)이 시작된 지역이 중국에서 7대 옛 도시로 손꼽히는 이곳 안양(安陽)으로,

여기서 처음 갑골문(甲骨文)이 발견됐다.
갑골문(甲骨文)은 거북 등딱지(甲)나 짐승 뼈(骨) 조각에 새긴 은허문자(殷墟文字)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따라서 이곳에 중국문자박물관(中國文子博物館)을 세우게 된 것으로,

 갑골문(甲骨文)의 태생지(胎生地)답게 중국에서는 "문자(文子)의 성지(聖地)"로 불리며
한자(漢子)를 테마(Thema)로 하여 세워진 전문(專門) 박물관(博物館)이 이곳이다.

 

 왕의영(王懿榮) 동상(銅象)

1899년 국자감(國子監) 제주(祭主: 현재(現在)의 국립대(國立大) 총장격(總長格)였던, 왕의영(王懿榮)은

학질(瘧疾)에 걸려서 고생을 했는데,
용골(龍骨)이라는 짐승의 뼛조각이 말라리아에 특효(特效)라는 이야기를 듣고
이를 구하게 된다.

 

금석학(金石學) 전문가(專門家)였던 그는

모아온 일부 뼛조각에서 조그맣게 새겨진 이상한 부호(符號)들을 발견하고는,

심상찮음에 살피던 중
이것이 고대(古代)의 문자(文子)임을 알게 되면서 깜짝 놀란다.
자그마치 4,000년 전,

은허문자(殷墟文字)라고 불리는 갑골문(甲骨文)은 이리하여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4,000년 전이면 한반도(韓半島)는 구석기시대(舊石器時代)로

짐승과 다를 바 없는 동굴 생활과 수렵으로 살아가던 그야말로 원시시대(原始時代)였다.

 

 그 후 한반도에 문자(文子)가 도입된 시기는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대략 기원전 7~8세기였던 아마도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로 추측한다.

따라서 1,000년이 더 흐른 뒤에야 중원에서 한반도로 문명(文明)이 건너왔다고 불 수 있다.

 

 갑골(甲骨)은 거북 등껍질(甲)이나 짐승의 뼈(骨)를 말하고,

여기에 새겨진 글을 갑골문(甲骨文)이라 한다.

 

바로 이것.

나는 글자가 크게 쓰여졌으라라 생각했는데...

자세하게 봐야 보일 정도로 매우 날카로운 조각으로 긁어서 파낸 작은 글자들이

거북 등껍질에 군데 군데 쓰여 있어서 언듯 보면 글자가 있는지조차도 모를 정도였다.

 

 이렇게 뼈조각에도 글자가 새겨져 있다.

그런데 이 글자들은 거의가 점을 보는 복술(卜術) 즉 점술(占術)에 관련된 글자들이라는

설명이 달려 있다.

 

 처음 발굴된 모습이 이랬다고...

이렇게 구멍이 숭숭 뚫어진 것은 별자리를 나타냈거나.

점(卜)에 관한 내용들이다.

인간(人間)의 역사(歷史)에서 문자(文子)보다 앞서는 것은 절대자(絶對者)에 대한 간절한 믿음이었고,

그 믿음은 조직화 되어 종교(宗敎)로 발전했으며

종교(宗敎)는 이렇게 문자(文子)를 생성(生成)하는데 중요한 역활을 했다.

 

문자(文子)에 관한 테마(Thema) 방물관(博物館)이다 보니

1층부터 4층까지 문자의 변천사(變遷史)를 입체적(立體的)으로 전시(展示)를 하고 있었다.

 

 당시 발굴층에서 나온 은(殷)나라 때 무덤 속 유골(遺骨) 모습...

 

 자그마치 그 표층(表層)의 두께가 3m 정도나 돼 보였다.

그만큼 오렌 세월이 흘러갔다는 이야기인데,

화석(化石)이 되어 누어 있는 저 고대인(古代人)은 최소한 4,000년 전에 살았던 사람이다.

 

 그들은 이렇게 살았다.

도자기를 만든다는 것은

불(火)을 다스릴줄 알았다는 증거이며 문명생활(文明生活)을 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대부분의 문자(文子)가 그러하듯 한문(漢文)도 상형문자(象形文字)가 그 원류(源流)이다.

 

 청동기(靑銅器)에 글을 새긴 금문(金文),

당시의 청동기(靑銅器)는 종류도 많고 매우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특히 술잔(盃)이 많았다.

우리나라의 청동기(靑銅器) 출토(出土) 유물(遺物)들을 보면

비파형(琵琶形銅) 동검(銅劍)이나 동경(銅鏡) 즉 원형 거울이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같은 청동기(靑銅器) 문화(文化)라 해도 이곳과는 문화(文化) 수준(水準)이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차이가 느껴졌다.

 

 대나무나 나뭇조각에 쓰인 간책(簡策)들도 전시되어 있다.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엔 이렇게 대나무를 쪼개서 엮어 그 면에 글을 썼다.

이런 것들을 목간(木簡) 혹은 죽간(竹簡)이라고도 한다.

 

 갑골문(甲骨文)에 관련해서는 책에서만 사진으로 보아 왔고

한문(漢文)의 원류(源流) 정도로만 이해를 했는데... 여기 와서 실물(實物)을 직접 보니 감회(感懷)가 남달랐다.

 

 발굴된 정교한 청동기 유물

 

 예술성(藝術性)에서도 현대의 작품들과 비교해도 전혀 뒤지지 않을 정도이며

작품성(作品性) 역시 매우 뛰어나다.

 

박물관(博物館)은 현대식(現代式)으로 지어졌다.

전 층에는 엘리베이터가 설치 됐으며

커다란 모니터에서는 지난 발굴 과정을 비롯해

중국의 문자(文子)와 문화(文化)의 우수성(優秀性)을 다큐멘터리(documentary)로 제작해 상영하고 있었다.

 

1층 한켠의 기념품(紀念品) 매장

 

 인류(人類) 문명(文明)의 원류(源流)를

크게 나누어 4대문명(四大文明)이라고 이야기들 하는데,

이집트의 나일강 유역에서 생성된 이집트 문명, 유푸라테스와 티그리스강 유역에서 태동한 메소포타미아 문명,

그리고 인도의 인더스강 유역의 인더스 문명과

여기 황토고원의(黃土高原)의 황하(黃河)를 따라 형성된 동아시아(東Asia) 문명(文明)인

황하(黃河) 문명(文明)을 꼽는다.

 

 그 외에도 중국에는 홍산문명(紅山文明) 혹은 요하문명(遼河文明)이라고 하여

황하문명(黃河文明)과 별개로,

중국(中國) 만리장성(萬里長城) 북동부에 존재했던 신석기(新石器) 시대(時代)의 문명(文明)과 문화(文化)가 있었다.

연대는 기원전 4,700년~2,900년 경이며,

연산산맥(燕山山脈)의 북쪽 요하(遼河) 부근에 널리 퍼져 있었던 문명(文明)인데,

고조선(古朝鮮)도 이 문명(文明)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으로 학계(學界)는 보고 있다.

 

 기둥에 세겨진 문양(文樣)이

은상(殷商) 문양(文樣)인 은(殷)나라 혹은 상(商)나 때의 전통문양(傳統文樣)들이다.

 

 그리고 지붕에 세겨진 문양(文樣)은 봉조문(鳳鳥紋)이라 하여

당시에 유행하던 봉황(鳳凰)을 나타냈으니 봉황(鳳凰)의 역사(歷史)가 얼마나 오래됐는지를 알 수 있다.

 

 방물관 마당으로 나오니...

주변에는 저렇게 아파트 공사가 한창이다.

중국은 어디를 가도 아파트 공사장을 흔하게 볼 수 있는데,

한결 같이 20층에서~40층에 이르는 고층 아파트를 짓고 있었다.

 

 마당에는 두줄로 자세하게 볼 수 있도록 갑골문(甲骨文)을 확대한 모형을 만들어 걸어놨다.

 

 

 

 

 

 저 앞이 정문(正門)인데 공사중이라 막아놨고

현재는 측문(側門)으로 드나든다.

 

 방물관(博物館)이 있는 이곳은

안양시(安陽市)에서 조금 벗어난 외각지역이다.

화북평원(華北平原)에 자리한 도시다 보니 매연과 미세먼지가 뒤섞여 늘 이렇게 뿌연 스모그가 끼여 있다고...

 

최근 저장 성(浙江省) 고분(古墳) 유적지(遺蹟地)에서 출토된 돌도끼 표면에

문자(文子)와 비슷한 부호(符號)들이 쓰여진 것이 발견 되었는데,
중국(中國) 고고학계(考古學界)는

돌도끼에 새겨진 몇 가지 부호(符號)가
현존(現存)하는 중국(中國) 최고(最古)인 갑골문자(甲骨文字)보다 1,400여 년 앞선 것이라고 주장한다.
갑골문(甲骨文)이 기원전 3,600년에서 4,000년 전 것이니,

돌도끼에 세겨진 부호(符號)는 중국(中國) 문자역사(文子歷史)를 5,000여 년 전(前)으로 끌어올린다며
관련 학계(學界)에서는 매우 흥분된 상태라고 신문에 보도된 것을 읽은 적이 있다.

 

우리나라는 지리적(地理的)인 특성상

중화문화(中華文化)의 영항을 오래도록 받고 살아왔다.

따라서 우리 생활 속에 녹아든 각종 풍습(風習)과 전통(傳統), 습관(習慣)들이 알고보면 중국(中國)의 문화(文化)에서

연류(連類)된 것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비근한 예로 단오(端午)와 추석(秋夕)이 그렇고 칠석(七夕)과 정월 대보름이 그렇다.

많은 전통(傳統) 명절(名節)들이

중국(中國)에서 온 것임을 알았을 때 허탈한 마음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지금 섞어 쓰는 한자(韓子)도 바로 이곳 중국(中國)의 고대국가(古代國家) 은(殷)나라가 그 원류(源流)이다.

사실 독창적(獨創的)인 문화(文化)란 그리 흔치 않으며,

있다 할지라도 그 내용을 들여다 보면

오랜 세월동안 여러 문화(文化)가 녹아들어

그 지역(地域)이나 국가(國家)의 상황에 맞게 형성(形成) 된 것들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사실이다.

이제는 전 세계가 문화 컨텐츠를 서로 공유(共有)하는 디지털 시대(時代)에 우리는 살고 있다.

네것 내것을 따질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은 받아들이고

 우리에게 맞게 발전시켜나가는

 넓은 포용(包容)과 지혜(智慧)가 필요할 때가 지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