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고전 명시 감상

양주사(凉州詞): 변방 이야기... 왕지환(王之渙)

원회 choi 2013. 5. 15. 22:20

황하(黃河)를 거슬러 끝까지 올라가면,

흰 구름에 쌓인 높은 설산(雪山)이 나타난다는데...
바로 곤륜산(崑崙山)이다.

산 위에는 외딴 성(城)이 한 채 있으며,
그 산꼭대기 성(城)을 당(唐)나라 병사들이 지키고 있다.


그런데 먼 곳에서 구슬픈 피리소리가 들려온다.

절양류(折楊柳)라고하는 오래된 이별곡(離別曲)이다.


오랑케 진영에서 병사들의 마음을 울적하게 만들어

사기(士氣)를 떨어뜨리려는 심리전(心理戰)을 편 것이다.

 

고향을 떠나 머나 먼 변방(邊方)에서 고생하며 지내는 병사들은

평소에도 늘 춥고 외롭다.


남녁 고향에는 지금쯤 봄바람이 불 텐데...

날씨마저 을씨년스러워 병사들은 이래저래 마음이 심란해진다.

 

시(詩)를 읽는 이로 하여금 병사(兵士)들의

스산한 마음을 함께 느끼도록 했다.
당시 악부(樂府)의 곡으로 불려졌다고 하는데,
변방(邊方)을 지키는 병사들의 애환(哀歡)을 노래하고 있는 시가(詩歌)이다.


왕지환(王之渙)에 대해서는 엇그제 소개한 "등관작루(登鸛雀樓)"에서

짤막하게 소개를 했기에 여기선 생략한다.


시인(詩人)은 이런 변방(邊方)의 풍광을 담담하게 표현했지만,
읽는 이로 하여금 병사(兵士)들의 스산한 마음을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凉州詞(양주사): 변방의 노래

黃河遠上白雲間(황하원상백운간): 아득한 흰구름 사이로 황하가 시작되는 곳.
一片孤城萬仞山(일편고성만인산): 만 길 높은 산 위엔 외로운 성(城) 하나
羌笛何須怨楊柳(강적하수원양류): 오랑캐 피리소리는 하필 구슬픈 이별곡
春風不度玉門關(충풍부도옥문관): 봄바람은 아직 옥문관을 넘지 못했는데...

- 주(註) -

우선 본 시(詩)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적(歷史的)인 배경과
당시의 지명을 먼저 알아야 속에 담긴 뜻을 알 수가 있다.
대부분의 한시(漢詩)가 그러하듯
시(詩)가 쓰여진 시대의 역사적인 사실과
시인(詩人)의 성격과 정신 그리고 생활을 모르면
그 깊은 맛을 알기란 매우 어려운 게 한시(漢詩)의 특징이기도 하다.
따라서 시(詩)의 배경을 풀어서 덧붙이고자 함은,
본 시(詩)를 이해함에 있어 읽는 이로 하여금 이해력을 돕고자
미천한 주석(註釋)을 덧붙이니 이해를 바라는 바이다.

양주사(凉州詞)는

칠언절구(七言絶句)로 된 짧은 시(詩)이다.

위의 시(詩)는 악부(樂府) 즉 노래로 불려지던 시가(詩歌)이며
시(詩)의 첫째 줄에 나오는 황하(黃河)가 시작되는 곳은 "곤륜산(崑崙山)"을 말한다.

곤륜산(崑崙山)은

중국(中國)의 전설에 등장하는 신성한 산으로,

중국 서쪽의 천산산맥(天山山脈) 어디쯤인가 설산(雪山)에 있다고 하며

이곳에서 황하강(黃河江)이 발원(發源)한다고 믿고 있다.


전설에는 하늘에 이르는 가장 높은 산,

또는 아름다운 옥(玉)이 나는 산으로 전해오기도 하고,
신(神) 중의 신(神)인 황제(黃帝)

여신(女神) 중의 으뜸인 서왕모(西王母)산다는 신성한 곳이며,

한 번 마시면 영원히 죽지않는 물이 흐른다는 신비한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곤륜산(崑崙山)은
전설과 설화(說話)가 수도없이 많은 산이며,
예로부터 시인(詩人) 묵객(墨客)들이

이상향(理想鄕)의 본산(本山)으로 많이들 인용하는 전설의 산을 가리킨다.

윗 시(詩) 셋째 구(句) 첫머리의 "강(羌)"
중국(中國) 소수민족(少數民族)인
"강족(羌族)"을 가리키는 말이다.

오래전부터 강족(羌族)들은  쓰촨(四川) 지방이나 윈난(雲南)과 구이저우(贵州) 등

중국 서남 지역을 중심으로 퍼져나갔고
수많은 민족 공동체을 만들며
그들끼리 모여 살았던 유목민 출신의 강성(强性) 민족이다.


지금은 강족(羌族)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간직한 민족(民族)은

이제 민강(岷江) 대협곡(大峽谷)을 중심으로 13만 명 정도가 살고 있을 뿐이다.


한족(漢族)에 거의가 융화되고

중국 전역을 합쳐야 20만 명 정도가 될까 말까 한 작은 소수민족(少數民族)이 되었다.


전통을 지키는 강족(羌族)은

지금도 산줄기가 험난하고 골이 깊은 칭하이성(靑海省)을 중심으로

전통을 이어가며 살아가고 있다.


골격은 몽골족에 가까우나 티벳트 근방에 흩어져 유목생활을 하며 살았으므로

티벳트족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는데,
대부분의 소수민족(少數民族)들이 그렇듯
그들도 순수한 혈통은 드물다.


옛부터 주로 척박한 지형에 자리잡고 유목으로 살다보니

먹거리와 생필품이 항상 부족해,

한족(漢族)이 사는 중원(中原)을 수시로 침략하여
노략질로 모자란 부분을 채우며 살아왔던 민족들이다.

 

그러니 당시 당(唐)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용감한 강족(羌族)들은

흉노와 함께 커다란 골치덩어리였던 오랑케 중 하나였다.


오죽했으면 중원 사람들은 
약탈을 일삼는 북방의 흉노(匈奴)의 침입을 막고자

저 엄청난 만리장성(萬里長城)까지 쌓았겠는가~!.

 

역사적으로 볼 때도  소수민족들은 모두가 기름진 농토를

절대 다수를 차지한 한족들에게 빼앗기고

척박한 외지로 밀려난 불쌍한 민족들이다.

 

그런 그들도 살아가기 위하여

곡식이 풍성한 평야지역인 관중(關中)을 주로 노렸는데,
머리 좋고 용맹한 강족들은
한족들을 원수로 여겨며 죽기 살기로 덤벼들기에

변방에서는 크고 작은 싸움들이 그칠 날이 없었다.

 

강족(羌族)들은

당(唐)나라 초소(哨所)를 지키는 병사들을 무력화 시킬 작전을 종종 쓰곤 했다.
그 옛날 한(漢)나라의 유방(劉邦)이

초(楚)나라의 항우(項羽)를 잡고자 낸 계책이

바로 "사면초가(四面楚歌)"였다.

승승장구하던 항우(項羽)의 초군(楚軍)은

어느날 해하(垓下)에서 유방(劉邦)이 이끄는

한(漢)나라군의 포위망에 갇히게 되었고
한(漢)나라 군(軍)은
유방(劉邦)의 책사(策士) 장량(張良)의 계책으로

초군(楚軍) 병사들의 사기를 꺾기 위해 낸 계책이 바로 "사면초가(四面楚歌)"다.

 

포로로 잡혀 온 초()나라 병사들을 사방에 모아놓고 초군(楚軍) 진영을 향해

초(楚)나라의 구슬픈 민요를 부르며 악기를 연주하게 하였다.


깊은 밤 사방에서 들리는 고향 초(楚)나라의 노랫소리는

병사들 마음을 파고들며 고향에 대한 진한 향수를 불러일으켰고,
급기야 여기 저기서 눈물을 흘리며

흐느껴 우는 병사들의 울음소리가 밤하늘에 구슬프게 메아리쳤다.


결국 사기가 꺾인 초군(楚軍)은
급속하게 전의를 상살하고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병사들은 말할 것도 없고
종리매((鐘離昧)계포(季布) 등,

항우(項羽)의 오른팔이라 불리는 용맹한 장수들까지 줄줄이 탈영을 했다.


특히 최측근의 작전참모이자 항우(項羽)의 숙부(叔
)

항백(項伯)마저 유방(劉邦)에게 투항하고 만다.


이리하여 초군(楚軍)은 와르르 무너지고

겨우 수백 명을 수습한 병사들을 이끌고 항우(項羽)는 오강(烏江)까지 도망을 쳤으나
뒤쫓는 한신(韓信)의 50만 대군에 포위되어

결국 항우(項羽)는 목숨을 잃고 초(楚)나라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이리하여 중원땅에 유방(劉邦)이 이끄는 통일 한(漢)나라의

천하(天下)가 열리게 된 것이다.

 

오랜 옛날 그 사면초가(四面楚歌)의 략(計略)을

지금 대치하고 있는 당(唐)나라 병사들을 향해

오랑케족인 강족(羌族)이 쓰고 있다.


산이 높아 성(城)을 스치는 칼바람은 살을 애이듯 차가운데...
여기 저기서 들리는 오랑케들의 구슬픈 이별곡(離別曲)인

양류(楊柳)"절양류(折楊柳)"라는  슬픈 노래의 피리소리는,
그러잖아도 춥고 외로움에 지쳐 죽을맛인 변방의 당(唐)나라 병사들에게는
고통 그 자체였을 것이다.


지난날 초(楚)나라의 병사들이
해하(垓下)에서 그랬던 것처럼,
두고 온 고향의 처자식과 부모에 대한 향수(鄕愁)를 일으키며

괴로워 했을 병사들의 심정을 시인(詩人)은 안타까워 한다.

 

이왕 강족(羌族) 이야기가 나온김에

강족(羌族) 출신 인물에 대해 잠시 알아보고자 한다.


강족(羌族) 출신의 빼놓을 수 없는 역사적 인물로

삼국지(三國志)의 강유(羌族)가 있다.

강유(姜維)

 원래는 조조(曹操) 진영의 위(魏)나라 장수(將帥)였으나

자신이 섬기던 마준(馬遵)촉한(蜀漢)에 투항허려 한다는 의심을 받으며,

당시 위(魏)나라 황제인 조비(曹丕)로부터 외면당하자

외톨이가 된 마준(馬遵) 갈 곳이 없게 되었다.


이에 촉(蜀)의 제갈량(諸葛亮)
강유(姜維)의 사람됨을 알아보고

그를 어렵게 설득 투항 케 해 얻은 인물이 바로 강유(姜維)이다.


강유(姜維)는 장수임에도 집안이 늘 검소했으며

지극한 효자(孝子)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학문(學文)과 무예(武藝), 인품(人品)을 두루 갖춰 
제갈량(諸葛亮)으로 부터
자신의 심복인 "마량(馬良) 보다 더 뛰어난 인재(人材)"라며

높이 평가했을 정도로 문(文), 무(武)에서 두각을 나타났다.

 

따라서 제갈량(諸葛亮)은 강유(姜維)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하고

크게 아꼈던 장수(將帥)이다.


지혜(智慧)와 용맹(勇猛)을 겸비(兼備)한 강유(姜維)에게

제갈량(諸葛亮)은 오장원(五丈原)에서 눈을 감으며
자신의 병법(兵法)들을 정리하여 기록한 책들을 모두 물려주면서

촉한(蜀漢)의 후일을 간곡하게 당부하고 숨을 거두었다.


그 강유(姜維)가
바로 윗 시(詩)에서 오랑케족속이라고 표현한

족(羌族) 출신(出身)의 장수(將帥)이다.

 

강유(姜維)는 촉한(蜀漢)의 관문(關門)인 검각(剣閣)

"검문각(劍門閣)"에서 위(魏)나라 장수(將帥) 종회(鍾會)가 이끄는
10만 대군을 2만의 병력으로 끝까지 막아냈으나,

 

당시 나약한 촉한(蜀漢)의 황제(皇帝)인 유비(劉備)의 아들

유선(劉禪)으로 부터 "이미 우리 촉(蜀)은 국운(國運)이 다했으니

싸우지 말고, 위(魏)나라 장수(將帥) 종회(鍾會)에게 항복하라"조서(詔書)를 내리자,


울분을 참지 못 하고 검을 뽑아
바위을 내리쳐 잘라버렸는데,

그 잘려진 바위가 지금도 검문각(劍門閣) 안에 있으며
강도석(姜刀石)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다.


그리고 역시 삼국지(三國志)에서

충직하고 용맹한 장수(將帥)인 마등(馬騰)과, 한수(韓遂)
그의 용감한 아들 마초(馬超) 그리고 조카 마대(馬岱) 역시

강족(羌族) 출신(出身)의 장수(將帥)들로 알려져 있다.

 

옛부터 중국(中國)은 북으로는 만리장성(萬里長城)을 기준으로 하여

흉노족(匈奴族)이 사는 위쪽은 오랑케들의 땅이라 여겼다.


물론 우리나라가 있는 동북지방의 동이족(東夷族)과 조선족(朝鮮族)들도

모두 오랑케로 여겼으며,
서쪽과 남쪽도 마찬가지였는데
주로 소수민족(少數民族)이 모여서 사는

운남성(雲南省)을 비롯하여 서쪽의 위그루 자치족과 칭하이성(靑海省) 등의

소수민족(少數民族)들을 중원(中原)의 한족(漢族)들과 엄격한 구분을 두어,
미개한 오랑케들이라 부르며 골칫거리로 여겼다.

 

따라서 그들이 사는 경계지역인 변방에 군대를 파견하여
방어에 심혈을 기울이며 지켰다.


그리고 늘 통제를 하며 조공(朝貢)을 바치게 하고

왕(王)이나 세자(世子) 책봉시에는

황제(皇帝)의 윤허(允許)를 받아야함을 잊지 않았다.

 

어찌어찌 하다보니 이야기가 새버렸는데...
아무튼 오랭케라함은
위쪽으로는 황하(黃河)를 경계로 하고,

아래로는 양쯔강(揚子江) 즉 장강(長江)을 경계로 하여
그 외각에 사는 민족들은 모두 오랑케로 여겨

멸시와 간섭을 했던 것이 중국(中國)의 오랜 역사적(歷史的) 사실이다.

다시 시(詩)로 돌아가...

본 시(詩)의 마지막 구(句)에서 "옥문관(玉門關)"이라 함은

돈황(燉煌)의 서쪽지역으로 만리장성(萬里長城)의 서쪽 끝이기도 하다.

 

또한 실크로드의 관문(關門)으로  서역(西域)과 당(唐)을 연결하는 통로에

당(唐)나라 때 세워진 성문(城門)을 말한다.


따라서 당(唐)나라 입장에서 보면,

머나먼 서역(西域)으로 향하는 옥문관(玉門關)이
또다른 세상을 연결하는 상징적(象徵的)인 문(門)으로

많은 문인(文人)들이 글에서 인용을 하곤 했다.

 

시인(詩人)은 마지막 구(句)에서
병사들의 고통을 이렇게 마무리를 지었다.


남녁은 이미 봄이 와 잎새가 피어나고
꽃들이 지천으로 피고 지련만...
이곳의 봄은 아직도 옥문관(玉門關)을 넘지도 못한
엄동설한(嚴冬雪寒)인데...


오랑케의 구슬픈 피리소리마저
병사들 마음을 혜집어 놓으니...
변방(邊方)을 지키는 병사(兵士)들의 애환(哀歡)이 얼마나 클까~

하는 여운을 남기며 끝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