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 등산

계룡산(鷄龍山) 연천봉(連天峰)에 올라 낙조(落照)를 그려보다

원회 choi 2012. 3. 9. 21:23


계룡산(鷄龍山)은
우리나라 4대 명산 중 하나로 손꼽는다.
1968년 12월 지리산에 이어 2번 째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주봉(主峰)인 천황봉은 해발 845m로 20여 개의 커다란 봉우리들을 아우르고있다.
울타리처럼 옹기종기 모여 솟아오른 봉우리들은 마치 "닭 볏을 쓴 용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산수경관이 수려한 한국의 명산이다.

 

 

 조선의 대표적인 비결서(秘決書)로 알려진 정감록(鄭鑑錄)에서는
계룡산 일대를 십승지지(十勝之地:나라가 위태로울 때 숨어 살만한 열군데의 길지)의 하나로 예언 했고,
조선 초에 와서는 실제로 계룡산 신도안에 도읍을 건설하려고 시도했을 만큼 대단한 길지라고 알려진 명산이다.
19세기 말경 병자호란을 거쳐 왜의 침략으로 나라가 극도로 혼란해지자,
어지러운 세태을 혜집고 국운을 점친다는 등,
혼란기를 틈 탄 각종 무속신앙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는데,
때마침 정감록이라는 비기서가 민간인들 사이에 소문이 퍼졌다.
길지(吉地)라고 알려진 계룡산 신도안으로,

신흥 종교인들이 몰려들어 수려한 계곡 곳곳에 교당과 암자 수도원과 기도원들이 빽빽하게 들어서게 된다.
그러나
유신정권을 지나 5공화국에 이르러 "종교 정화운동"의 일환으로 어수선하던 종교 시설물들이 전부 강제 철거되고,
주변을 깨끗하게 정리하여 지금은 당시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현재는 우리나라 국토방위의 중핵으로 육, 해, 공군의 각군 본부가 들어서서,
대한민국 안보를 수호하는 국방 수뇌본부로 탈바꿈 했다.

 

 

과거 계룡산이 잡종교의 집산지가 된 가장 큰 이유로는...


                               첫째... 태조 이성계의 등극과 함께 조선의 도읍지로 계룡산 신도안이 주목을 받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개경(지금의 개성)에 도읍을 둔 고려를 벗어나 새로운 왕국을 세우자니 새로운 도읍지가 필요했던 것이다.
                               둘째는... 비기서인 정감록에서 풍수적 길지로 지정하고 차기 도읍 예정지로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다 정감록을 과장, 맹신하며 설쳐대는 각종 잡신교 신자들이 모여들어,
                                         "영험이 깃든 산"으로 소문을 낸 점도 크다 하겠다.
                               셋째는... 병자호란 임진왜란등 나라에 큰 병란이 닥쳐 위태로울 때 마다,
                                         조정에선 피난처에 대한 논의가 증폭되었는데,
                                         그 때 마다 후보지로 이곳이 강력하게 물망에 올랐다는 점을 그 예로 든다.

 

 

정감록(鄭鑑錄)은...
조선 중기 이후 민간에 널리 유포 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예언서로 저자는 알 수 없다.
전쟁 등으로 인한 극심한 사회적 혼란의 정세가 반영되어,
역성혁명(易姓革命: 왕의 성씨를 바꾼다는 뜻으로 새로운 왕국 즉 새로운 나라를 의미함) 사상과
현실 부정적 사상을 담고있다.


정감(鄭鑑)과 이심(李沁)이라는 인물의 대화를 통해 미래의 변화를 예언했다고 하나,
이본(異本:진본이 아닌 가본서적)이 많아서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참위설(讖緯說: 미래의 길 흉에 대한 예언을 믿는 사상으로, 음양오행설, 풍수지리설 따위가 섞여 있으며,
중국 전한(前漢) 말기부터 후한(後漢)시대까지 극심한 사회적 혼란기에 나타났던 사상)과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 및 도교사상(道敎思想)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조정에서는 금서(禁書)로 지정하여 철저하게 막았으나 새로운 변혁을 갈망하는 사회 심리가 반영되어,
민간인들 사이에 은밀하게 확대 전승되어 왔다.

 

 

아무튼 계룡산은...
동학사쪽에서 보면 천황봉이 주봉이지만,
뒷편인 신원사쪽에서 보면 단연 연천봉이 주봉이다.
연천봉(連天峰)의 명칭은 뜻 그대로 "하늘과 이어지 듯 높은 산"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해발 738.7m로 정상에 올라서면 백제와 신라가 마지막으로 결전을 벌인 황산벌 평야가 드넓게 펼쳐진다.
백제의 명장 계백과 당나라의 소정방을 등에 업은 신라 김유신과 혈전은,
결국 군사력이 턱없이 약한 계백의 패배로 끝이 났다.
그로 인해 백제의 멸망을 불러 왔고, 신라의 승리는 사실상 삼국통일의 완결을 의미했다.

 


연천봉 정상 바로 아래 양지쪽에는 천황봉을 바라보며 아담한 암자가 돌아 앉았다.
신라 문무왕(文武王) 5년(665)에 창건한 등운암(騰雲庵)이라는 암자다.
등운대사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이 암자는,
계룡산 최고의 명당자리로 시원스레 시야가 탁트인 전망이 일품이다.






천황봉이 일출(日出)로 이름이 높다면 연천봉은 낙조(落照)로 유명한 산이다.
황산벌을 벌겋게 물들이며
굽이도는 백마강의 물결이 은빛으로 반짝인다는,
황홀한 연천봉의 낙조(落照)는 놓칠수 없는 감동이라는데...
언젠간 꼭 보고싶은 풍경이다.

 

 


시야가 탁하고 어둡다.
중국에서 밀려 온 매연의 영향인지 근년에 와서는 점점 맑은날 보기가 쉽잖은 것이 현실이다.
뿌옇게 온 대지를 덮어버린 구름도 안개도 아닌 산업화의 부산물인
저 스모그가 그저 답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