姑蘇臺(고소대)
故國荒臺在(고국황대재): 옛 영토에 황폐한 고소대(姑蘇臺)는 여전하고
前臨震澤波(전임진택파): 앞에 있는 태호(太湖)엔 파도가 인다.
綺羅隨世盡(기라수세진): 비단옷의 미녀(美女)는 세월 따라 가버렸고...
麋鹿占時多(미록점시다): 고라니와 사슴이 노니는 시간이 많구나.
築用金椎力(축용금추력): 쌓을 땐 수천(數天) 금(金)을 들였다지만
摧因石鼠窠(최인석서과): 쥐들이 판 굴로도 허물어지네.
昔年雕輦路(석년조연로): 그 옛날 제왕(帝王)이 탄 수레가 다니던 길엔
唯有採樵歌(유유채초가): 이젠 나뭇꾼의 노랫소리만 들리는구나.
옛 오(吳)나라 땅이었던 고소산(姑蘇山)에 올랐더니...
휘황찬란하다던 고소대(姑蘇臺)는 허물어져 흔적만 남았고
산 밑의 드넓은 태호(太湖)에는 옛날처럼 파도만 일렁이네.
이곳은 화려한 비단옷을 휘감은 미인(美人) 서시(西施)가 춤추던 곳인데,
지금은 고라니,
사슴이 뛰노는 적막한 폐허로 변했네.
수천(數千) 금(金)을 들여 지었다는 화려한 고소대(姑蘇臺)는 허물어지고
댓돌 밑에 쥐굴만이 가득하구나.
그 옛날 기세 높던 오왕(吳王) 부차(夫差)의 수레가 드나들던 길에는
이젠 나뭇꾼의 노랫소리만 간간이 들릴 뿐이네...
- 주(註) -
윗 시(詩)는 유우석(劉禹錫)이
소주자사(蘇州刺史)로 재직(在職) 시절 지은 시(詩)로 알려져 있다.
유우석(劉禹錫)...
지난 날 본 블로그에
"오의항(烏衣巷)"이란 그의 시(詩)를 소개하면서 짧게 그의 생(生)을 짚어 봤었다.
따라서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고소대(姑蘇臺)는...
지금의 장쑤성(江蘇省) 오현(吳縣) 서남쪽에 있는 고소산(姑蘇山) 위에 있던
화려한 옛 누대(樓臺)로,
기원전(紀元前) 오(吳)나라의 사실상 별궁(別宮)이었다.
오왕(吳王) 부차(夫差)가
미녀(美女) "서시(西施)"를 위해 지었다고 전해진다.
부차(夫差)는 서시(西施)를 위해
이곳 고소대(姑蘇臺)에서 매일 연회(宴會)를 배풀정도로 그녀를 아끼고 사랑했다.
그러나 서시(西施)의 미모에 눈이 먼 부차(夫差)는
결국 월왕(越王) 구천(鉤踐)의 재 침입으로
오(吳)나라는 멸망하고 부차(夫差)는 자살한다.
얼마나 미색(美色)이 출중했으면
나라를 망하게 할 정도였다 하여,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 했겠는가~!.
역대(歷代) 중국(中國)의 4대(四代) 미녀(美女)를 꼽으라면
서시(西施), 왕소군(王昭君), 초선(貂蟬), 양귀비(楊貴妃)를 꼽는다.
서시(西施)는
기원전(紀元前) 5세기 경
춘추시대(春秋時代) 말기(末期) 월(越)나라 미녀(美女)로,
오왕(吳王) 부차(夫差)의 정신(精神)을 흐려놓기 위해
월(越)나라의 책사(策士) 범려(范蠡)의 계략(計略)으로
부차(夫差)에게 선물로 보내졌던 여인(女人)이다.
윗 시(詩)에서도 언급했듯
오왕(吳王) 부차(夫差)가 늘 곁에 두고 아꼈으며,
화려한 고소대(姑蘇臺)를 지어 그녀에게 선물로 줄 정도로 사랑한 미인이다.
결국 서시(西施)의 미색(美色)에 혼(魂)이 나간 오왕(吳王) 부차(夫差)는
방탕한 생활에 젖어들게 되고
이 틈을 노린 월왕(越王) 구천(鉤踐)의 침입으로 망하게 된다.
이때 생겨난 유명한 고사성어(古事成語)가 바로
누워서 쓰디 쓴 곰 쓸개를 핥으며 재기를 다짐한다는
"와신상담(臥薪嘗膽)"이다.
왕소군(王昭君)은
기원전(紀元前) 1세기 전한(前漢) 원제(元帝) 때 여인이다.
북방의 흉노족(匈奴族)이 침입하여 한(漢)나라를 괴롭히며 약탈을 일삼자,
그들을 달래기 위해 궁녀(宮女)로 있던
미인(美人) 왕소군(王昭君)을 흉노(匈奴)의 왕(王) 즉 호한야 선우(呼韓邪 單于)에게
정략적(政略的)으로 보내졌던 인물이다.
미색(美色)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빼어나
옆에 끼고 밤낮 없이 흥청대다 결국
흉노(匈奴)의 왕(王) 호한야(呼韓邪)는
아들 한 명을 왕소군(王昭君)을 통해 생산하고는
복상사(腹上死) 했다고 전해진다.
그후 흉노(匈奴)는 한동안 한(漢)나라와 화친(和親)을 맺고
해마다 한(漢)나라가 먹을 것을 보내주는 조건으로
노략질을 중지했다.
이 흉노(匈奴)는 북방(北方)의 유목민(遊牧民)들로
초원(草原)을 떠돌며 사는 족속(族屬)들이다.
흉노(匈奴)가 얼마나 난폭하고 무서웠으면
천하(天下)를 호령하던 진시황(秦始皇)마저도 겁에 질려
저 어마어마한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쌓았겠는가...!.
초선(貂蟬)은
삼국지(三國志)에서 유명한 미인(美人)인데,
후한(後韓) 말기(末期) 때 여인으로
재상(宰相) 왕윤(王允)의 가기(歌妓)로 길러진 여인이다.
무력(武力)으로 황궁(皇宮)을 점령하고
황제(皇帝)를 어린 애로 바꿔버리고 섭정(攝政)으로 폭정(暴政)을 일삼던
승상(丞相) 동탁(董卓)을 죽이는데
연환계(連環計)로 이용됐던 비운(悲運)의 여인이지만,
연환계(連環計)를 쓴 왕윤(王允)도 결국 자신이 쓴 연환계(連環計)의
사슬에 걸려 죽고 말았다.
그녀는 자신을 끔찍이 사랑하고 자신도 깊이 사모했던 여포(呂布)를 따라가
죽을 때까지 함께했던 여인(女人)이다.
조조(曹魏)가 군침을 흘리며 초선(貂蟬)을 차지하려고 애를 썼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여포(呂布)가 조조(曹魏)에게 붙잡혀 처형 당하자,
초선(貂蟬)도 여포(呂布)를 따라가겠다며 자살했다.
마지막으로 "양귀비(楊貴妃)"는
너무도 잘 알려진 당(唐)나라 중기(中期) 현종(玄宗)의 비(妃)로,
"안록산의 난(安祿山之亂)"이 일어나게 된
원인을 제공한 여인(女人)이다.
현종(玄宗)이 양귀비(楊貴妃)의 교태(嬌態)에 정신이 나가
정사(政事)를 게을리 하자,
안록산(安祿山)과 그의 부하 장수 사사명(史思明)이
썪어빠진 나라를 뒤엎고자 난(亂)을 일으켰는데,
역사(歷史)는 이 난(亂)을
"안록산의 난(安祿山之亂)"혹은 "안사의 난(安史之亂)"이라고 적고 있다.
"안사의 난(安史之亂)"은
중국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반란(反亂)으로
엄청난 인명 피해와 상처(傷處)를 남겼다.
그러나 당(唐)나라
시문학(詩文學)을 몇 단계 발전시키는 계기도 되었으니...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것도 있는 것이
자연(自然)의 섭리(攝理)아니겠는가~.
사실 현종(玄宗)은 양귀비(楊貴妃)를 만나기 이전에는
국정(國政)을 잘 이끌던 현명한 황제(皇帝)였다.
그러나 양귀비(楊貴妃)를 만난 후부터 나태해져 국정(國政)을 돌보지 않았다.
빼어난 미색(美色)은 이토록
제왕(帝王)의 혼(魂)을 빼버려 나라를 혼란케 하고
때로는 망하게 하는 요물(妖物)이기에
지도자(指導者)가 가장 경계해야할 요주의(要注意) 인물이었다고
역사(歷史)는 반복해서 일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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